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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드리아나 Aug 28. 2024

바다가 젤리로 변했다!

1. 바다 위를 걷는 신발


  펭귄이 사는 곳에는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있다. 언젠가 남극의 빙하가 빠른 속도로 녹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구온난화의 영향력이 커지면 미래의 지구는 해수면이 높아지고, 남극에 서식하는 동물들이 위험해진다는 이야기였다. 남극의 빙하를 지켜야 한다. 꼭 지켜야 한다. 아~ 걱정이다! 지구의 자전 속도도 점점 느려지고 있다고 하던데... 지구를 지켜야 한다!

  엇! 해돌! 토리!

  해돌이와 토리가 덩치 큰 북극곰을 보고 겁을 먹었나보다! 펭귄들 사이를 정신없이 휘젓고 다녀서 아기 펭귄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 해돌, 토리! 얼른 이리로 와!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여긴 남극인데 북극곰이 어떻게 왔지? 그러고 보니 저 북극곰 어디서 본 것 같아! 맞아! 지난번 작은 얼음조각 위에 위태롭게 서 있던 그 곰이네! 지구온난화 때문이야. 이 때문에 빙하가 줄어들어서 북극곰들이 힘들어해. 북극곰들 먹이도 부족해졌어. 북극곰들은 빙하에서 바다사자를 사냥하잖아. 그러니까 빙하를 지켜야 해!

  아, 참! 해돌아, 토리야!


  “해리야, 아빠 오셨다! 해리야?”

  드디어 아빠가 돌아오셨다. 아빠를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아빠는 무려 131일 만에 집에 오신 것이다. 아빠 얼굴 봐야 하는데, 아~ 잠깐 다시 꿈속으로 돌아가 해돌이와 토리를 얼른 데려와야 하니 아빠, 아주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이것도 꿈인 걸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


  아침 일찍 벌떡 일어난 해리는 아래층으로 한걸음에 두 계단씩 내려갔다. 해돌이와 토리도 쫓아 내려왔다. 아빠가 돌아오실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간밤에 있었던 일들이 꿈이었는지 실제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아빠가 커다란 손으로 해리의 양볼을 감싸 안으며 뭐라 하신 것 같기도 하고, 엄마가 깨우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해서다.     

  “엄마아~, 엄마아~ 아빠 오셨어요?”

  솔솔 풍기는 맛있는 냄새가 뱃속을 자극했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간밤에는 그렇게 깨워도 일어나지 않더니 일찍 일어났네! 아빠 새벽 두 시 넘어서 주무셨으니까 조금만 더 주무시게 하자!”

  아침 준비를 하시던 엄마가 쉿! 하면서 말씀하셨다.     

  진짜였다! 아빠가 오셨다. 131일 만에! 야호!

  해리는 너무 기뻐서 해돌이와 토리를 안고 온 거실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아빠한테 할 말이 너무도 많이 쌓여있었고, 무엇보다 정말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리 아빠는 해양과학자다. 남극에서 환경 변화와 관련된 여러 가지 연구들을 진행하고 있어서 몇 개월씩 남극대륙 테라노바만이라는 곳에 있는 우리나라 장보고과학기지에서 살다 오시곤 했다. 물론, 늘 남극에만 계시는 것은 아니다. 연구소에서 일하실 때에도 몇 개월씩 연구실에서 지내시기 때문에 1년 중 집에 계시는 날은 50일도 채 되지 않는 것 같다. 아빠 영향인지 해리도 환경에 대한 관심이 무척 많았다. 주 관심사는 해양오염이었다. 최근에는 바다 플라스틱 쓰레기에 대한 내용들을 수집하여 정리하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떠들썩한 아침을 먹고서도 해리의 질문은 끝이 나질 않았다.

  “몇 개월 만에 우리 딸 키가 쑤욱 컸네!”

  “131일!”

  “아빠, 남극 너무 추워서 힘들지 않았어요?”

  “우리 딸 핫팩 덕분에 괜찮았어! 영하 40도도 핫팩이 있으니 견딜만하던데!”

  “아빠, 나 어제 꿈에 펭귄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왔는데, 글쎄~ 요 녀석들이 펭귄들 틈을 막 휘젓고 다니면서 난리를 쳤지 뭐예요! 근데 황당한 건 거기에 또 어마무시하게 큰 흰 북극곰이 나타났다는 거예요! 꿈이 좀 황당하기는 하지! 그런데, 아빠! 남극은 어떻게 빙하가 유지되는 거예요?”

  “해리가 아빠 생각하느라 남극 꿈을 꿨나 보다! 요 녀석들, 너희들이 펭귄들을 놀라게 했나 보네!”

  아빠는 해돌이와 토리를 번갈아 안아 올리며 말씀하셨다.

  “해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해류에는 난류와 한류가 있지? 남극대륙을 둘러싸고 있는 해류는 강한 한류여서 따뜻한 바닷물이 남극해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준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아~ 그러니까 강한 한류 덕분에 남극의 거대한 얼음이 유지된다 이거네!”

  “그렇지!”     

  “그리고 아빠, 그거 진짜예요? 이번에는 내 생일 지나서 연구소 가는 거?”

  “우리 딸 열두 번째 생일날에 아빠가 빠질 순 없지!”

  “야호! 그런데 이번에는 휴가가 길어도 괜찮은 거예요?”

  “그럼! 이 아빠가 누구냐? 해리 아빠잖니? 아빠 연구팀이 남극어류 유전자 설계도 분석을 완성해서 특별휴가를 받았지!”     

  “아빠, 나도 그동안 연구를 했는데... 어마어마한 아라온호도 바다 위를 항해하잖아요... 내가 만든 신발을 신으면 바다 위를 걸어 다닐 수 있을까?”

  “우리 딸 연구는 얼마나 진행이 되었는지 한 번 볼까?”

  “네, 박사님! 일단 제 연구실로 박사님을 모시겠습니다!”

  해리는 목소리 톤을 바꿔 사뭇 연구원 같은 억양으로 대답을 하고는 아빠 손을 이끌고 2층 자신의 방과 마주하고 있는 쪽방 연구실로 향했다. 해리는 그동안 스노보드처럼 신발 바닥을 넓게 만들면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을까 해서 오리발과 신발, 스노보드 등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해리′s 연구실’ 팻말이 달린 문을 열면 온갖 요상한 물건들이 가득한 방안의 모습이 보였다.


  해리네 집은 작은 범섬이 정면으로 보이는 법환포구 안쪽 마을에 있는 키가 낮은 이층집이다. 3년 전 이사 와서 마을지도 그리기를 하는데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이 너무 꼬불꼬불하고 돌담이 많아 해리는 땅속 개미집을 연상했었다. 아마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꼭 손으로 그린 미로가 될 것이라고도 생각했었다. 서귀포는 아빠의 고향이다. 지금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지만 이사 오기 전에도 서귀포에 왔었기 때문에 서귀포로 이사를 오는 것은 무척 기대되는 일이었다. 특히 바다를 매일 보고 바다에 매일 갈 수 있다는 것이 해리에게는 가슴 콩닥거리는 일이었다. 키 작은 이층집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서울의 아파트하고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나뭇가지처럼 큰 도로와 연결된 꼬불거리는 좁다란 돌담길을 가다 보면 오른편으로 다시 초록잔디 길이 집마당과 연결되어 있다. 초록잔디 길 가운데에는 맷돌 서너 개가 징검다리처럼 땅속에 박혀 있어 깽깽이 발로 가기 딱 좋았다. 엄청 넓지는 않지만 야생화를 가꾸는 마당도 있고 마당 가운데에는 커다란 파라솔도 있다. 엄마는 자잘한 풀꽃들이 사계절 내내 필 수 있도록 돌 틈과 항아리 뚜껑과 소쿠리, 나무상자, 심지어 낡은 군화 속에도 모두 풀꽃들을 심어 놓으셨다. 솔직히 해리도 무척 맘에 들기는 했다. 벽면에 매달린 풀꽃도 예쁘지만 소쿠리 가득 작은 꽃들이 채워지면 정말 예뻤기 때문에 가끔은 엄마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나가던 어른들이 카페인 줄 알고 기웃거리기도 하고 예쁘다고 한마디씩 하면서 가곤 했다. 어쨌든 그냥 지나치는 법은 없었다.


  이층집이라고는 해도 사실 이층은 다락방보다 조금 넓은 정도였다. 뾰족지붕으로 인해 해리의 방 천장은 세모꼴이었고, 연구실 천장도 비스듬하게 내려오다가 방바닥과 맞닿아 있었다. 해리는 연구실 모퉁이에 2년 동안 연구하면서 갖다 놓은 물건들을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그 중에 최근 몇 개월간 연구하고 있는 물건들이 연구실 다른 한쪽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여러 크기의 낡은 스노보드, 오리발, 고무신, 튜브 등이었다. 스노보드는 서울에서 내려오기 전에 외사촌 오빠에게 받은 것이 있었고, 중고나라에서 구입한 것도 있었다. 오리발은 마을 해녀 할머니께 얻었고, 찾기도 힘든 검정고무신과 흰고무신도 마을 할아버지, 할머니께 얻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글루건이나 접착제, 공구 등은 엄마 따라 대형마트에 갈 때마다 구입을 해야 했다.     

  “아빠, 바다 위를 걸어 다니려면 관건은 신발을 신고 물에 떠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서프보드는 부력이 좋아서 사람들이 파도타기를 잘할 수 있지만 너무 흔들려서 걸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좀 무겁고 넓은 보드를 신으면 덜 흔들려서 바다 위를 걸어 다닐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거지요!”

  “좋은 생각인데! 넓은 바다에서는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겠구나! 그런데 계속 파도가 밀려오는 곳에서는 어떻게 될까?”

  “아! 그래서 제가 이렇게 방수복도 생각 중이긴 해요. 그렇기는 해도 파도 위를 걷는 것이란 정말 힘든 일이겠지요?”

  “해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파도의 힘은 엄청나게 셀걸! 그래서 아빠도 준비를 하고 있지! 해리를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기대해도 될 듯하긴 한데 아직은 비밀이다! 생일날까지는!”

  “와~ 아빠, 정말이에요?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사실 해리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뭔가 아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너무도 궁금해서 두 배 커진 눈으로 빨리 알려 달라 졸라댔지만 아빠는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아 밝힐 수 없다고 하셨다. 할 수 있다면 생일날을 당장 앞당기고 싶었다.


2. 미완성의 화학약품


  사람들은 5월을 장미의 계절이라고 했다. 해리네 집 돌담 가장자리에도 넝쿨처럼 자란 장미가 탐스럽게 필 준비를 모두 마친 듯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5월은 귤꽃 향기의 계절이라고 해리는 생각했다. 학교 울타리 왼쪽 골목을 끼고 그 주변은 모두 귤밭이다. 이 귤밭들은 돌담을 경계로 끝없이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학교를 나서면 진한 귤꽃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고 집으로 돌아와 바닷가로 내려가면 바닷물과 비릿한 해초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해리는 그런 냄새가 좋았다.

 

  해리와 라산은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이 사시는 집을 사이에 두고 옆집이라 학교를 갈 때도 올 때도 같이 다니는 친구다. 처음에는 친구들이 사귀냐고 놀려댔지만 1년 넘게 같이 다니니 모두 그러려니 하고 더 이상 놀리지도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둘 중 한 명이 없으면 그게 이상해서 나머지 한 명에 대해 꼭 물어보는 것이 친구들의 일상이 되었다. 해리네가 이사 왔을 때 라산은 해리 보호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학교까지 가는 길, 동네 구석구석, 바닷가 탐방, 법환포구를 끼고 있는 올레길까지 모두 라산의 영역이었다. 라산은 학교 공부를 제외하고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귤꽃도 작은 몽돌해변도 모두 라산이 알려준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좋았던 것은 - 어쩌면 이것이 단짝이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 라산이가 아기 고양이 토리를 해리네가 키울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해리네는 해리 동생으로 흰 푸들 강아지 해돌이를 키우고 있었다. 아빠가 해돌이를 데리고 왔을 때 해리는 첫눈에 이 녀석이 딱 맘에 들었고, 자기 이름의 ‘해’자 돌림으로 이름을 지었다. 토리가 오면서 해돌이 동생이 생긴 셈이었다. 어쨌든 라산과 해리는 공동연구자로서 그리고 바다지킴이로서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해리가 태어난 날은 5월 31일이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바다의 날이다. 우연의 일치이기는 하나 해리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빠는 해양과학자이고, 자신은 바다의 날에 태어났기 때문에 바다와 자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다에 대한 애착이 많았다. 어렸을 때도 바닷가에만 가면 물 만난 물고기처럼 좋아했다고 했다. 자신의 생일도 모르는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바다를 좋아했으니 이건 분명 ‘운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해리의 논리다.


  해리는 5월 31일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밑면이 넓은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는 신발’ 만들기에 집중했다. 아마도 그날이 되면 어느 정도는 완성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아빠의 도움을 받아서 실험을 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어쩌면 성공할 수 있는 또 다른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해리의 생일, 아빠는 마당에 미니수영장을 꺼내 물을 4분의 3가량 채우셨다. 아마도 700L쯤 될 것 같았다. 파라솔 탁자에는 소품 양동이처럼 생긴 여러 가지 분말 통들을 준비해 두셨다. 해리는 라산과 해돌이와 토리를 불렀다.     

  “과연, 우리 아빠의 선물은 뭘까요?”

  “궁금하지? 일단 바닷물을 좀 만들고, 가만있어 보자! 바닷물의 염도, 3.5%로 맞추고, 음~ 수온이 조금 올라가면 그때 선물을 공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빠, 저 가루통들은 다 뭐예요?”

  “저게 바로 아빠가 준비한 선물이지!”

  “저 가루들이요?”

  “우리 해리가 생일 때마다 바다 위를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지? 벌써 3년이 넘었네. 그래서 아빠도 해리처럼 틈틈이 연구를 했어. 바닷물을 단단한 겔 상태로 만들어 보려고.”

  “우와! 그럼, 저 가루들은 바닷물을 젤리처럼 만드는 가루약인 거예요?”

  “아마도 젤리보다는 더 단단하게 될 것 같은데!”

  “대~박!”

  해리와 라산이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와! 아빠, 정말요? 빨리 해봐요.”

  라산과 해리는 커다래진 눈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만약에 아빠가 연구한 대로 성공을 한다면 바닷물 속에 가루가 들어가면서 가루가 퍼지는 주변 일정 부분만 바닷물이 단단하게 굳어지게 될 거야. 그러면 바닷물 속에서는 모든 것들이 잠시 활동을 멈추게 되는 거지. 마치 냉동실에서 급속 냉동 상태가 되는 것처럼 말이야.”

  “그럼, 바다가 잠시 젤리처럼 되었다가 다시 풀어지는 거겠네!”

  “그렇지! 그런데 아직 다시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약품이 완전하지 않아서 아빠도 더 연구해야 해. 우리 딸 생일에 맞춰서 끝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쉽지가 않은 연구라 시간이 좀 걸리네. 그럼, 일단 겔 상태로 만들어 볼까?”


  해리는 체육대회 100m 달리기 직전처럼 심장이 마구 뛰어서 긴장감을 없애기 위해 해돌이를 꼬옥 끌어안았다.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정말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아빠가 분말 통 중 첫 번째 통의 가루 한 숟가락을 물에 넣었다. 그리고 가루들이 물속에 퍼지는 것을 확인하고 두 번째 통의 가루를 조금씩 넣기 시작했다. 마치 엄마가 요리를 하면서 간을 맞추기 위해 조미료들을 조금씩 넣는 것처럼 느껴졌다. 해리와 라산은 바짝 긴장한 상태로 지켜봤다. 두 번째 통 분말 두 숟가락 정도를 넣고 조금 기다려 보자는 말씀을 하셨다. 물이 서서히 반투명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아빠는 손으로 물을 눌러보라고 했다. 해리와 라산은 손으로 물을 눌러보았다. 정말 커다란 젤리가 된 것 같았다. 젤리처럼 매끄럽고 약간의 탄력도 느껴졌다. 과연 이 위를 걸을 수 있을까? 아빠는 약간의 시간을 두고 물을 좀 더 단단하게 굳게 한 후 해리에게 물 위로 올라가 보라고 하셨다. 해리는 해돌이를 라산에게 넘긴 후 아빠 손을 잡고 조심히 물 위로 올라섰다. 거대한 바닷물 곤약젤리 위를 신발 자국을 남기며 걷는 순간이었다. 아직 완전히 굳어지지 않은 약간의 바닷물이 있어 이 곤약젤리는 마치 빙하덩어리 느낌이었다. 해리는 빙하를 본 적이 없었지만 꿈속에서 봤던 북극곰의 빙하를 연상했다.


  “와~ 아빠, 진짜 바닷물 위를 걸었어요. 야호!”

  조심조심 걷던 해리는 좀 더 과감하게 바닷물 위를 폴짝폴짝 뛰면서 좋아했다.

  “라산! 완전 신기해! 너도 얼른!”

  해리와 교체하여 라산도 바닷물 위를 걸으며 엄지를 척 내보였다. 해돌이와 토리도 바닷물 위로 올라갔다. 해리가 다시 올라가도 단단한 바닷물은 탱글탱글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얘들아, 이 실험을 실제 바다에 했을 때는 결과가 좀 다를 수도 있어. 오늘은 바닷물처럼 만들어서 실험을 했지만 이걸 바닷가에서 한다면 꼭 이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지. 바다는 생물체처럼 계속 움직이며 활동을 하고 있어서 굳어지는 속도보다 약품의 효력이 더 빨리 떨어질 수도 있고... 아직 약품이 완전하지 않기도 하고!”

  “그래도 아빠, 너무너무너무 감사해요! 기분이 정말 좋아요!”

  “바다 위를 걸어본 사람은 지구에서 아마 우리뿐일걸요!”

  라산도 여전히 신기해하면서 거들었다.

  “너희들이 좋아하니, 아빠도 기분이 좋은데! 자~ 그럼, 굳어진 바닷물을 다시 풀어볼까?”

  모두 내려오게 한 후 아빠는 다른 통의 가루를 또 조금씩 넣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굳어졌던 바닷물은 뭉그러지면서 김치 만들 때 썼던 찹쌀 풀 같기도 하고 밀가루 풀 같기도 했다. 지난겨울에 엄마는 김치에 넣을 풀을 쑤다 실패해서 풀이 되직하게 되었는데 해리는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면서도 뭔가 실패했다는 느낌을 받고 막 웃었던 기억이 있다. 가루약품을 좀 더 넣고 나니 바닷물이 쌀뜨물처럼 되었다.

  “그런데, 아빠 바닷물 색깔이 원래대로 안 돌아와요?”

  “조금 더 기다려 볼까?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아빠 약품이 아직 미완성이라 약간의 부작용이 발생했나 보다!”

  아빠는 짐짓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바다 위를 걷는 신발도 미완성이기는 하나 해리는 자신의 12번째 생일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3. 환경 쓰레기? 환경 사고 발생


  “포터, 너 잠수함 타 봤냐?”

  “야! 별명 부르지 말라고 했지! 너 자꾸 별명 부르면 나도 너한테 ‘낫산’이라고 할 거야.”

  “아~ 알았어. 미안해! 그건 그렇고 잠수함 타 봤어?”

  “아니, 넌 타 봤어?”

  “지난 일요일에 잠수함 타고 바닷속 구경했는데, 엄청 신기했어.”

  “그럼, 산호 봤어?”

  “응, 산호가 원래 그렇게 예쁜 건 줄 몰랐는데, 진짜 엄청 예쁘고 색깔도 다양하더라. 니가 좋아하는 보라꽃 무더기가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어. 근데 진짜 웃긴 게 있었는데 요렇게 생긴 가오리 얼굴!”

  라산은 양손으로 눈꼬리와 입꼬리를 올려 가늘게 찢어진 눈을 만들고 해리를 쳐다봤다. 해리는 순간 못생긴 도깨비 가면을 본 것 같아 웃음을 퍽 터뜨렸다. 해리와 라산은 오늘도 법환 앞바다 주변을 돌며 쓰레기를 줍고 있다. 다른 친구들은 학원을 다니지만 그 시간에 해리와 라산은 바다를 지키기로 약속했다. 가끔 마을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칭찬을 해주시곤 했다.


  “라산, 너 그거 알아? 플라스틱 쓰레기, 2050년에는 바다 플라스틱 쓰레기가 전체 물고기 수보다 훨씬 더 많아지게 된대.”

  “야! 물고기 수가 얼마나 많은데! 말도 안 돼!”

  “진짜야, 나 그거 지난번 엄마랑 서울 갔을 때 내셔널지오그래픽 특별전 사진 설명 자료에서 읽었어.”

  “그것만이 아니야. 현재 바다에는 5조가 넘는 플라스틱 조각들이 떠다니고 있대. 있다가 집에 가면 내가 사진 한 장 보여줄게. 너 해마 알지?”

  “어, 해마 사진 찍었어?”

  “아니, 내가 어떻게 해마를 찍을 수 있겠냐? 해마 사진을 찍어왔지. 해마들이 해류를 타기 위해 해초나 자연 부유물들을 잡고 이동을 하는데, 그 사진에는 해마가 플라스틱 면봉을 붙들고 있어.”

  “헐!”

  “그래서 사진작가가 존재해서는 안되는 사진이라고 그랬대. 그거 오염된 바다에서 촬영한 거라 했거든.”

  “야,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하고 있잖아! 청정 법환 바다는 우리가 지킨다!”

  “그리고 너, 뉴스 봤어?”

  “어떤 뉴스?”

  “우리 동쪽 바닷가에 괭생이모자반이 해류를 타고 엄청 밀려와서 포구를 뒤덮고 있대.”

  “아니, 못 봤어. 모자반? 그거 먹는 거 아냐?”

  “응, 근데 그건 식용이 안되나 봐. 문제는 괭생이모자반이 가지에 공기주머니가 있어서 조류를 타고 제주 바다로 막 몰려오고 있다는 것이 문제지. 엄청 쌓여서 악취를 풍기고, 그리고 그게 양식장 그물에 달라붙어서 수산업에도 피해를 끼친대.”

  “그러다 여기까지 밀려오면 우리 바다는 어떡하냐? 해양쓰레기로 넘쳐나는 거 아냐?”

  “그러니까 우린 부지런히 이렇게 쓰레기들을 치워야지. 그런데 라산아, 나 너무 배가 고프다. 우리 내일 다시 오자!”

  “그래!”


  바다는 맑은 햇빛을 통째로 흡수했다가 토해내는지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부서지는 포말들을 보고 있으면 자신이 듣는 소리가 바람 소리인지 아니면 부서지는 파도 소리인지 헷갈렸다. 해리는 서귀포 바닷가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했다. 집을 조금만 걸어 나오면 시커먼 바위들이 바닷물을 막는 것인지 지키고 있는 것인지 아무튼 시커먼 바위들이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데 그 자체가 신기했고 바닷물이 마을로 들어오지 않는 것도 신기했다. 가끔 바위들이 너무 날카롭고 거칠어서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다치기도 했지만 바다로 나가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 거친 현무암 덩어리들은 강한 햇빛에 그을려 숯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게다가 파도와 비바람에 온갖 형상으로 나타나 해리와 라산에게는 상상의 공간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덕지덕지 붙어있는 허연 딱지들은 패각인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실험의 대상임에는 틀림없었다. 심심찮게 살아있는 생물도 발견하니까! 밤에는 똑같은 우리나라인데 서울보다 이상하리만치 서귀포의 밤은 훨씬 더 껌껌했다. 껌껌해서 좋은 것은 집 마당에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것이었고, 껌껌해서 무서운 것은 더 크게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더 시꺼멓고 크게 보이는 바닷가 검은 바위들이었다. 이것들은 마치 완벽하게 다른 세상을 연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음날 볕발이 길게 드리워지자 해리와 라산은 또 쓰레기봉투를 들고 만났다. 어느새 탔는지 벌겋게 탄 얼굴이 뭔가 하늘색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해돌이는 혓바닥이 두 배는 길어진 듯한 모습으로 쫓아왔고 낮잠을 즐기던 토리도 오늘은 무슨 일인지 따라왔다. 여느 때처럼 선착장 길냥이들 다친 곳은 없는지 살펴보고 올레길을 따라 무성하게 자란 풀숲을 사이로 작은 몽돌해안으로 향했다. 올레길 코스이기는 하나 몽돌해안으로 가는 길은 한 사람씩 걸어 다녀야 할 만큼 좁았고, 조심하지 않으면 높지는 않지만 절벽으로 떨어질 수 있었다. 절벽이라기보다 해안가 돌들을 쌓아 만든 돌담 혹은 키 낮은 둑방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했다. 가끔씩 손바닥선인장인지 부채선인장인지 바위틈에 자란 선인장에서 백년초가 눈에 들어오지만 오늘 수거해야 할 쓰레기를 생각하면 다른 곳에 신경써서는 안된다고 해리는 생각했다. 그 좁다란 길 중간에 졸졸 흐르는 도랑물과 만나 진흙탕을 이루고 있는 곳이 있었는데 어른들은 거기에다 멍석 - 야자 매트라 했던 것도 같은데 - 같은 걸 깔아서 신발이 젖지 않도록 해놨다. 길은 몽돌해안에서 사라지고 작은 몽돌해안 끝으로 다시 올레길 코스가 이어지고 있었다. 해리와 라산의 오늘 목적지는 몽돌해안이었다.


  “라산아, 넌 저 범섬에 가봤어?”

  “아니, 넌?”

  “당연 못 가봤지. 한번 가보고 싶다.”

  “옆집 할머니가 그러셨는데 저 범섬에 옛날에는 토끼가 살았대.”

  “정말? 지금도 살고 있을까?”

  “에이, 설마! 지금도 살고 있다면 토끼섬이 되었겠지!”

  “야! 그럼, 범섬은 범이 살아서 범섬이냐?”

  “해리야, 잠깐! 그런데 바닷가에 왜 이런 쓰레기가 있을까?”     

  라산은 말라 쪼그라진 운동화 한 짝을 주워 해리에게 보여줬다. 해리는 깨진 플라스틱 바가지를 보여주며 ‘이건 어떻고?’ 하는 반응을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쓰레기가 많아 보이지 않았는데 막상 줍고 있으니 쓰레기가 꽤 많았다. 해가 서쪽으로 제법 기울어진 것 같았다. 그때 해돌이와 토리가 바닷물 남실거리는 돌 틈에서 뭔가를 발견했는지 입으로 물려다 선뜻 물지 못하고 해리 쪽을 바라보며 짖어댔다. 해리와 라산은 해돌이 쪽으로 달려갔다. 살펴보니 물속에 원통 모양의 쇳덩어리 같은 게 비스듬히 박혀있었다. 일렁이는 바닷물 때문에 정확히 보이지는 않으나 대략 1.5L 음료수병 크기처럼 보였다.


  “해리야, 이거 혹시 포탄이 아닐까?”

  갑자기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유심히 쳐다보던 라산이 말했다.

  “에이 설마! 여기에 포탄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리고 너, 포탄 본 적 있어?”

  “야, 너 지난번 4․3사건 배웠던 거 기억 안 나? 그때 썼던 게 지금 드러날 수도 있지! 그리고 포탄, 만화에서 보면 진짜 이렇게 생겼어.”

  라산의 진지한 말에 해리는 덜컥 겁이 났다. 만약에 이게 포탄이라면 더 이상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았다.

  “라산아, 우리 이거 그냥 두고 집에 가서 어른들께 말씀드리자.”

  “안 돼! 이거 그냥 두고 가면 바닷물이 밀려와서 나중에 찾지 못할 수도 있잖아. 그리고 그냥 두면 위험할 수도 있고!”

  “그럼, 어떡해? 여기다 나뭇가지를 꽂아서 표시할까?”

  “그건 금방 휩쓸려 가버릴걸!”

  잠시 정적이 흘렀다. 뭔가 생각하던 라산이 말을 이었다.

  “해리야, 그거 있잖아, 바닷물 젤리 만드는 가루약! 그걸 조금 뿌려서 바닷물을 멈추게 하면 내가 양옆에 돌을 치우고 호미로 살살 파서 꺼낼게.”

  “그러다 포탄이 터지면 진짜 큰일 나! 그리고 가루약 아직 미완성이라 아빠가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된다 그랬잖아.”

  “아주 조금만! 요 부위만 쓰면 되지. 이거 못 꺼내서 나중에 큰일이 나면 그건 우리 때문에 생긴 일이 될 거야.”


  라산의 말에 해리도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걱정도 되고 무섭기도 했다. 일단 라산의 말대로 아주 작은 부위만 바닷물을 멈추게 하면 쇳덩어리를 꺼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해리는 서둘러 집으로 달려갔다. 해돌이도 해리를 따라 달렸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가서 가루약을 가지고 와야 할 것 같았다. 호미도 가지고 와야지!


  해리는 급한 대로 바닷물 젤리 가루통 두 개와 호미를 챙겨서 다시 몽돌해변으로 달려왔다. 그 사이에 라산은 쇳덩어리 주변 돌덩이들을 낑낑거리며 더 바깥쪽으로 밀어 쇳덩이 주변에 호미질을 할 수 있도록 공간을 확보했다.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깊게 박혀있어 옆으로 밀어내지 못한 것을 제외하고는 얼추 방해물들이 제거된 셈이었다. 심장이 심하게 방망이질했다. 해리가 도착하자 둘은 눈을 마주치고 조심스럽게 가루통에서 가루를 꺼내 바닷물에 조금씩 넣었다. 바닷물이 찰랑대서 그런 것인지 수온이 낮아져서 그런 것인지 바닷물은 여전히 남실거렸다. 두 번째 통의 가루를 좀 더 넣었다. 아마도 어쩌면 바닷물이 움직여서 가루들이 흩어지니 빨리 굳어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해리는 생각했다. 좀 더 많이 넣었다. 서서히 바닷물이 굳어졌다. 그제야 둘은 안도감에 긴장을 풀었다. 너무 많이 굳어지기 전에 작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라산의 발목으로 느껴지던 바닷물의 움직임이 사라지면서 바닷물은 푸딩이 된 것 같았다.


  “라산아, 자갈흙인데 파낼 수 있겠어?”

  “응, 생각보다 파기 쉬워. 바닷물이 가만있으니 그냥 모래 파내는 것 같은데. 조약돌들이 많아서 그렇지, 식은 죽 먹기다.”

  “그래도 조심해!”

  “걱정하지 마!”

  “그런데 해리야, 이거 이 돌 밑에 박혀있나 봐.”

  열심히 바닥을 파던 라산은 그 원통 모양의 쇳덩이가 치우지 못한 돌덩어리 밑으로 박혀있는 것을 확인했다. 마음 같아서는 쇳덩어리를 붙잡고 반대 방향으로 힘껏 끌어당겨 빼내고 싶은데 혹시 폭발할지 모르니 함부로 다룰 수는 없었다.     

  “우리 둘이 이 돌을 치워야 할 것 같아.”

  해리와 라산이 동시에 말했다. 해리는 위쪽으로 올라가 가루통들을 제법 평평하게 보이는 바위를 찾아 안전한 위치에 두고 돌아왔다. 그리고 라산의 옆으로 가서 돌부리를 힘껏 잡아당겼다. 꼼짝하지 않았다. 둘은 다시 힘을 합쳐 힘껏 잡아당겼다. 그래도 돌은 움직이지 않았다. 라산은 돌 주변을 호미로 파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파서 빼내든지 아니면 한 명은 밀고 한 명은 끌어당겨 볼 요량이었다. 돌 주변을 파내고 잡아당기고를 반복하니 드디어 돌이 움직였다. 그러나 쉽게 빠질 것 같지는 않았다. 땀이 비 오듯 했다. 그때 어디서 해돌이가 짖는 것 같아 잠시 멈추고 주변을 돌아봤다. 어느덧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고 해안가는 바닷물이 좀 더 빠진 것 같았다. 해돌이와 토리가 바닷물이 들어오는 쪽에서 소리를 지르며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보였다. 해리가 돌아오라고 큰 소리로 말해도 바닷가 주변을 분주하게 맴돌며 돌아오지 않았다.

  “라산아, 아무래도 이거 오늘 못 뺄 것 같아. 우리 내일 아침 일찍 다시 올까? 토요일이니까.”

  해리가 다소 지친 듯 말했고 라산도 하던 걸 멈추고 해리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뭔가를 하기에는 날이 너무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라산아, 저기서부터 여기까지 큰 걸음으로 몇 걸음 되는지 알아보고 쟤네들 데리고 오자!”

  “그래!”


  쇳덩어리 위치를 다시 확인한 후 해돌이와 토리가 있는 쪽으로 뛰어가니 그제서야 해돌이와 토리도 달려왔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이 해리를 사로잡았다. 어스름한 바닷가가 너무 조용한 것이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해리와 라산은 동시에 놀란 눈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바닷물 쪽으로 달려갔다. 바닷물은 굳어있었다. 어디까지인지는 알 수 없어도 생각보다 더 넓은 부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둘은 서로를 쳐다보다 가루통의 위치를 확인했다. 통이 보이지 않았다. 해리와 라산은 가루통이 있었던 위치까지 뛰어 올라가 주변을 확인했다. 통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바닷가 쪽으로 달려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통을 찾아다녔다. 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더 멀리 가기에는 너무 어두워서 갈 수 없었다.     

  “해돌아, 가루통 어디 갔어?”

  해리가 해돌이한테 다급하게 물어보자 해돌이는 바닷물을 바라보며 짖어댔다. 해돌이와 토리는 뭔가를 알고 있는 듯했다.     

  “큰일났다! 라산아, 어떻게 하지? 빨리 아빠한테 말씀드려야겠어. 해양경찰서에 신고를 해야 하나? 일단 아빠한테 가자.”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으나 큰일이 생긴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엄습해 온 적막감에 둘은 가슴이 툭 내려앉는 것 같았다. 덜컥 겁이 났다. 해돌이와 토리를 안고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라산과 해리한테는 휴대폰이 없었다. 몽돌해변 입구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아이들을 찾아 나선 어른들이 보였다. 엄마, 아빠를 보자마자 해리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더듬거리며 죄송하다고 하는 사이에 라산은 해리 아빠께 바닷물이 굳었다고 말씀드렸다. 해리와 라산은 엄마를 따라 집으로, 아빠들은 몽돌해변으로 향했다.     

  늦은 밤 해리네 집에서는 어른들의 의논 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4. 바닷물이 젤리로 변했다!


  해리와 라산은 일어나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바닷가로 향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선착장에는 마을의 어른들이 모여 웅성거리면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선착장에 폴리스라인이 처져 있었다. 밤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작은 어선 몇 척이 선착장에 밧줄을 묶지 못한 것 같았다. 배들은 선착장으로 들어오다가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고 굳어진 바닷물에 갇힌 듯했다. 몽돌해변으로 달려갔다. 거기에도 폴리스라인이 길게 처져 있었다.     

  “어른들이 경찰에 신고한 걸까?”

  라산이 폴리스라인 주변과 쇳덩어리가 있을 위치를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그렇겠지!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될까? 우리 아빠는 괜찮겠지?”

  해리는 사실 밤새 걱정이 되어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자기 때문에 큰일이 벌어진 것 같아 겁이 나기도 했고 가루약이 문제가 되어 아빠가 경찰에 잡혀갈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해리야, 정말 미안해! 내가 가루약 쓰자고 해서 일이 이렇게 된 것 같아. 경찰 아저씨께는 내가 말할게.”

  “아니야, 내가 약통에 신경을 쓰지 못해서 이렇게 된 거지! 그런데 그 가루 약통은 어떻게 된 걸까?”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 지난 저녁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꼼꼼히 되짚어 보았다. 가루 약통을 안전한 위치에 두고 한참이나 확인을 못한 것은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박힌 바위를 빼내는데 정신이 모두 빼앗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안전한 위치라 생각해서 걱정하지도 않았다. 언제 가루 약통이 바닷물 있는 곳까지 옮겨졌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바람이 세게 불었나 생각해 봐도 통이 날아갈 정도는 아니었고, 해돌이와 토리가 물고가서 쏟기에는 통이 좀 큰 편이었다. 그렇다면 통들이 바닷물 근처까지 굴러갔나? 그럴 수는 없는 것이 모두 울퉁불퉁한 돌들로 이루어진 해변이다.


  오전에 해리와 라산은 어른들과 함께 해양경찰서에 갔다. 쓰레기를 줍다가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어떻게 해서 가루약이 바닷물에 투입이 되었는지는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햇빛이 점점 뜨거워지자 바닷물은 훨씬 더 단단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어느 깊이까지 어디까지 굳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해양경찰은 경비용 헬기를 띄워 조사하기로 했다. 해리 아빠는 아직 굳어지지 않은 먼 바닷물 근처에 들어가 바닷속을 살펴보고 해결 방안을 찾기로 했다.


  법환포구에 경찰들이 배치되고 몽돌해변에도 조사가 시작되었다. 마을을 둘러싼 포구 일대에는 일시적으로 출입이 통제되었다. 어촌계와 해녀들을 비롯한 마을 어른들의 걱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부 어른들은 해리네 집을 찾아와 어떻게 된 일인지,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지를 물으며 빨리 잘 해결하라고 한마디씩 하셨다. 해리 엄마는 연신 죄송하다며 머리를 조아려 사죄드렸다. 해리와 라산은 너무 죄송해서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바닷속을 확인하고 돌아온 아빠는 생각보다 더 깊은 곳까지 바닷물이 굳어있었다고 했다. 바다 속에 있는 생물들은 일시적으로 젤리에 갇힌 상태가 되어 있기 때문에 빠른 시간 내에 바닷물을 되돌려 놓지 않으면 생물들이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특히 바닷속 동물들이 더 위험해서 굳어진 바닷물을 한시라도 빨리 풀어야 한다며 가루약품 실험에 집중하셨다.


  해리가 생각하기에 무척 힘든 상태는 바닷물이 서서히 굳어지면서 생물체의 일부가 움직일 수 없게 된 상태일 것 같았다. 해리는 자신의 몸 반쪽이 마비된 것과 같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프고 먹먹했다.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속상했다.


  해안으로 돌아오는 배들에게도 문제가 발생했다. 간밤에 바닷물에 갇힌 배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무사히 마을로 돌아왔으나 다른 배들은 굳어진 바닷물로 인하여 선착장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인근 다른 포구로 이동을 해야 했다. 마을 사람들과 어부들은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해서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에 새벽부터 온종일 선착장과 포구 근처를 서성거리며 배가 언제 다시 바다로 나갈 수 있을지 걱정했다.


  누가 제보를 했는지 굳어진 바닷가 사진이 뉴스에 보도가 되고 경찰서장 브리핑이 오전, 오후로 이루어졌다. 취재진이 마을로 찾아왔다. 해외언론에도 해외토픽으로 방송이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굳어진 바닷가를 보기 위해 법환포구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법환마을에는 유례없이 북적이는 관광객들과 폴리스라인을 지키는 경찰들과 세계 곳곳에서 온 취재진들로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간밤에 바닷물을 밟고 걸어 나온 작은 어선의 어부 아저씨는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에 벌써 인터넷에서는 스타가 된 것 같았다. 취재진은 해리 아빠, 해리와 라산을 취재하기 위해 아침부터 해리네 집에 찾아왔으나 해리와 라산은 뭔가 일이 점점 커져가는 것 같아 무서워 꼼짝하지 않고 해리의 연구실에 숨어 있었다.


  온종일 집 안에 숨어 있던 해리와 라산은 깜깜한 밤이 되자 조용히 집을 빠져나와 상황을 알아보기로 했다. 언제 따라 나왔는지 토리가 뒤를 쫓아왔다. 북적거리던 낮과 달리 밤은 차분히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단지 지난밤과 달리 오늘 밤은 낮 동안의 열기가 더해져서인지 공기가 식지 않아 후덥지근했다. 어찌 된 것인지 바닷바람도 불지 않아 무척이나 더운 여름밤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아직까지는 초여름 아니 늦은 봄이라 한밤에는 춥기도 한데 오늘은 덥고 습한 기운이 가득하게 느껴졌다. ‘아~ 바닷물이 굳어서 바람이 없는 걸까?’ 생각하며 선착장 근처에 왔을 때 해리는 어둠 속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컴컴한 바다 위에 고양이들이 모여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뭔가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라산아, 저기 좀 봐! 길냥이들이 이상하지 않아?”

  “어디? 그러게! 땅을 파고 있는 것 같은데!”

  “야! 저긴 바다야! 좀 가까이 가보자!”     

  폴리스라인에 바짝 다가가 유심히 살펴보니 대여섯 마리 정도 되어 보이는 고양이들이 굳어진 바다 위를 긁어내며 바닷물에 갇힌 생선들을 잡고 있었다. 해리와 라산은 큰 소리는 내지 못하겠고 어떻게든 고양이들을 말리고 싶은데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바로 그때 토리가 고양이 무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순간 놀란 고양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토리는 어떤 고양이 한 마리를 추격했다. 해리가 돌아오라고 숨죽이고 소리쳤지만 토리는 듣지 못했다. 해리와 라산이 동시에 어? 하고 바라본 것은 그로부터 채 10초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토리와 토리가 추격하던 고양이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라산아, 토리가 바다에 빠진 것 같아!”

  “바닷물이 모두 굳어있는 거 아냐?”

  “글쎄! 그건 알 수 없잖아. 어쨌든 나 저기 가봐야 하겠어.”

  “안 돼! 위험해. 그리고 여기 들어가지 말라고 했잖아.”     

  다급해진 마음에 해리는 라산이 하는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폴리스라인 안으로 들어갔다. 선착장 가장자리는 생각보다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다. 해리는 토리가 갔던 위치를 생각하며 뒤꿈치를 올려 앞발로 뛰었고, 라산도 해리를 돕기 위해 뒤따라 선착장 바다 위로 뛰어내렸다.     

  “해리야, 같이 가.”

  “라산아, 앞이 잘 안 보여. 어쨌든 내가 토리를 구하면 넌 토리를 얼른 집으로 데리고 가. 알았지?”

  “아~ 저기인가 보다! 라산아, 저기 웅덩이!”


  해리가 바닷물 웅덩이를 가리키려던 순간 발을 헛디뎌 앞으로 넘어지면서 쭈욱 미끄러져 갔다. 라산이 어떻게 할 새도 없이 해리는 해리가 웅덩이라고 말한 그 웅덩이 속으로 푹 빠지고 말았다. 라산은 신발을 벗어 던지고 해리가 빠진 곳까지 달렸다. 웅덩이 가까이로 갈수록 바닷물이 물컹거렸다. 해리와 토리가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라산은 입고 있던 웃옷을 벗고 해리한테 잡으라고 했다. 해리가 라산의 옷을 잡자 라산은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겼다. 그러나 디디고 있는 바닷물이 물컹거려 라산 자신도 빠질 것만 같았다. 라산은 바닥에 엎드려서 옷을 잡아당겼다. 해리가 올라오려고 하면 옷이 닿아 있는 물컹거리는 바닷물이 무너지려 했다. 라산은 있는 힘을 다해 뒤로 이동하면서 옷을 잡아당겼다. 겨우겨우 해리가 바다 위로 끌려 올라왔다. 라산은 해리를 좀 더 끌어당겨 단단한 바다 위에 눕혀 놓고 다시 가서 바닷물 속에 들어가 토리를 왼쪽 팔로 감싸 안았다. 바닷물이 약간 되직한 느낌이라 풍덩 빠지지 않아서 바닷물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올라오는 것은 힘들었다. 바다 표면이 물컹거려서 쉽게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좀 더 단단한 표면을 찾아 잡고 토리를 위로 올려놓은 뒤 가까스로 기어 올라왔다. 바다 위로 올라온 라산은 해리 옆에 다가가서 풀썩 쓰러졌다.


  바로 그때 ‘아이쿠!’하는 소리와 함께 바다에 철퍼덕 빠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정신 차릴 여유도 없이 해리와 라산은 서로의 귀를 의심하며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약간 멀기는 했어도 분명 할아버지 목소리 같았다. 해리는 토리를 선착장 근처에 데리고 가서 기다리게 하고 라산과 같이 소리가 들렸던 방향으로 서둘러 찾아갔다.


  바다 표면이 미끄러워 해리도 신발을 벗어 던져놓고 작은 어선들이 정박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미 어둠에 익숙해진 상태라 해리와 라산은 여러 척의 배들이 정박하고 있는 곳을 단번에 찾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범섬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며 유심히 살펴보던 라산이 뭔가 바다 표면이 이상한 곳을 감지했다.

  “해리야, 저~기 좀 봐봐. 바다 표면이 좀 이상한 거 같지 않아?”

  “어, 그러네. 가보자! 근데 아까 할아버지 목소리 맞지?”

  “응, 할아버지 목소리 같았어.”


  라산이 가리킨 곳은 배들이 있는 곳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바다 위였는데 어느 정도의 거리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다만 아무것도 없는 바다 표면이 아까 빠졌던 웅덩이처럼 그 부분에서 뭉개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해리와 라산이 가까이 다가가니 허우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더 가까이 다가가면 바닷물이 뭉그러져 빠질 것 같았다. 라산이 “할아버지~”하고 부르니 웅덩이에서 손을 들어 사람이 있음을 알려줬다. 해리와 라산은 바다 위에 엎드려 바닷물 웅덩이 근처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라산이 할아버지를 발견하고 양손으로 할아버지의 한쪽 팔목을 잡았고 해리는 무릎 꿇고 엎드려서 라산의 발목을 잡아끌었다. 해리가 뒷걸음질치려고 한쪽 무릎을 뒤로 빼려는데 할아버지 팔이 다시 바닷물에 빠지면서 해리와 라산은 쪼르르 미끄러지며 바닷물에 풀썩 빠지고 말았다.


  ‘우리나라 속담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정신 차리자!’ 이런 생각을 하며 해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정신이 없었을 때는 몰랐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닷물 속이 생각보다 위험한 것 같지가 않았다.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이 빠지는 것 같기는 하나 바닷물이 되직한 상태라 바닷속으로 깊게 빠지지는 않았다. 발버둥치지 않고 침착하게 움직인다면 이 바닷속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리와 라산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이내 곧 라산이 조심스레 고개를 바다 위로 내밀었다. 그리고 해리도 따라 내밀었다.

  “해리야, 할아버지가 정신을 잃으신 것 같아. 우리가 양쪽에서 부축하고 걸어보자.”

  “그래, 서두르자!”

  해리와 라산이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바닷속을 걸어가기 시작하자 발이 바닷물을 으깨는 것 같았다. 푹푹 빠지듯 하면서도 그들은 포구 쪽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말없이 어느 정도 간 것 같은데 해리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아악! 라산아, 나 뭔가를 건드린 것 같아. 발이 너무 아파. 움직일 수가 없어.”

  “해리야, 무슨 일이야? 괜찮아? 걸을 수 있겠어? 혹시 해파리한테 쏘였나?”

  “응, 그런 것 같아. 라산아, 할아버지랑 너 먼저 가. 나 천천히 가볼게.”

  “해리야, 내가 할아버지 얼른 포구에 모셔 놓고 금방 다시 올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라산은 급한 마음에 있는 힘을 다해 할아버지를 오른팔로 껴안고 반은 걷고 반은 헤엄치듯 포구 쪽으로 향했다. 그사이 해리는 다리를 추스르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가만 생각해 보니 좀 전에 뭔가 서늘한 것이 발목 윗부분에 스친 것 같았는데 해파리의 촉수였을 지도 모르겠다고 해리는 생각했다. ‘해파리가 다행히 살아있구나!’ 그런데 자꾸만 힘이 빠지고 있다. 해리는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몸은 너무도 무겁게 느껴졌다. 머리가 점점 바닷속에 잠기고 있었다. 바닷속에서 눈을 뜨니 안개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리고 뭔가 건드려지는 것이 물고기 같기도 하다. ‘물고기도 움직이기가 힘들어서 멈춰있을 거야.’ 이런저런 생각들이 해리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팔을 뻗어 앞쪽을 파헤치자 이번에는 손에 미끄덩거리는 나뭇가지 같은 것이 잡혔다. ‘이런! 여긴 바다잖아. 나무가 있을 리 없지.’ 해리는 점점 의식을 잃어갔다.


5. 가루통의 행방


  해리와 라산이 열심히 쇳덩어리 주변을 파헤치고 있을 때 올레길 7코스를 따라 여행하던 젊은 여자 한 분이 몽돌해변을 지나다가 바위 위에 미니 양동이처럼 보이는 작은 통 두 개가 덩그라니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 아이 두 명이 놀고 있기는 하나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보니 소꿉놀이하다 버려진 통이라 생각했다.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그 여행자는 통을 주워 바닷물 근처에 다가가 통속에 있던 가루를 바닷물에 탈탈 털면서 쏟아버리고 통들을 바닷물에 깨끗하게 씻은 뒤 자잘한 몽돌이 있는 곳을 찾아 통에 작은 몽돌을 가득 담고 몽돌해변을 떠났다. 해돌이와 토리가 여행자를 보고 짖어대며 해리를 불렀지만 쇳덩어리를 빼내려고 온 정신을 쏟고 있었던 해리와 라산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젊은 여행자가 법환포구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있을 때 마침 어촌계를 방문했던 해경 두 분도 저녁 식사를 하려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해경 한 분이 건너편 식탁 위에 놓인 미니 양동이 두 통 가득 몽돌이 담겨있는 것을 보았다. 해경은 곧바로 식사 중인 여행자한테 다가가 몽돌에 대해서 물었고, 여행자는 몽돌해변에서 미니 양동이를 주워 작은 몽돌들을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해경은 몽돌은 채취 금지이며 몽돌해변에 ‘몽돌 채취 금지’ 표지판을 보지 못했는지 확인했다. 젊은 여행자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표지판을 보지 못했다며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식사를 마치고 해양경찰서 복귀하기 전 해경은 몽돌을 갖다 놓으려 몽돌해변으로 갔으나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바닷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가루통의 행방이 밝혀진 것은 해리 아빠가 바닷물을 풀 수 있는 농도를 알아냈을 때였다. 해리 아빠는 바닷물이 어디까지 굳어져 있는지 확인하고 돌아와서 꼬박 밤을 새우고도 한나절이 지났을 무렵이 되어서야 해결책을 알아냈다. 해양경찰서에 해결책을 찾았다고 연락한 후 해리 아빠는 서둘러 해양경찰서로 향했다. 넓은 바다에 가루약을 투입하기 위해서 헬기를 타야 해서였다. 경찰서에 도착한 해리 아빠가 해결 방안을 설명하다가 탁자 위에 놓인 빈 가루통을 발견했다. 가루통 두 개가 포개져 있기는 했으나 한눈에 봐도 가루약이 들어 있었던 통임을 알 수 있었다.


6. 지금의 바다가 좋아!


  해리 엄마가 해리와 라산이 집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이웃집 할머니가 한밤중에 찾아와서 “혹시 할아버지 봤느냐?”고 물을 때였다. 할아버지는 포구에 있는 배가 걱정이 되어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저녁을 드시고 나서 포구로 갔다. 그런데 네다섯 시간이 지나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이집 저집 수소문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긴급한 일이라 판단한 해리 엄마는 아이들에게도 물어보려고 아이들을 찾았으나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해리 엄마는 해양경찰서에 도움을 요청하고 주변 몇몇 어른들에게 연락을 했다.


  어른들은 팀을 나눠 법환포구, 몽돌해변, 마을 안쪽을 찾기로 했다. 해리 엄마는 할머니와 함께 법환포구 쪽으로 향했다. 할아버지와 아이들을 부르며 선착장 근처에 왔을 때 엄마를 따라왔던 해돌이가 짖어대자 토리가 야옹거리며 달려왔다. 이윽고 해돌이는 해리의 신발을 찾았다. 해리 엄마와 어른들은 포구 안쪽 선박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구석구석 손전등을 비추다 해리 엄마는 선박에 기대어 축 늘어져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내 헉헉거리며 지친 모습으로 해리를 업고서 기어오고 있는 라산을 발견했다. 때마침 경찰 아저씨와 구급차가 도착했고, 할아버지와 아이들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아득하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해리는 눈을 떴다. 엄마가 보였다. 정신이 번쩍 돌아온 해리는 엄마를 보자마자 라산을 찾았다. 엄마 눈빛을 따라 옆을 보니 라산이 옆 침대에 누워 있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병실이었다.     

  “엄마, 할아버지와 토리는?”

  “걱정마! 모두 무사해!”

  “라산이 우리를 구해줬어요!”     

  엄마는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는 의식을 회복했고, 그리고 아빠가 바닷물을 풀 수 있는 농도를 알아내서 바닷물이 거의 풀어졌다고 했다. 해리는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이번에는 취재진이 병원을 찾아왔다. 해리와 할아버지를 구한 라산을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 라산의 인터뷰 방송은 실시간 검색 1위를 하더니 이내 100만뷰를 돌파했다.     

  “좋아하는 여자 친구를 위해서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덕분에 학교에서는 또다시 놀림의 대상이 되겠지만 해리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하루만 더 있다가 퇴원하라고 했으나 해리와 라산은 빨리 바다가 보고 싶었다. 집에 들어가기도 전에 해리와 라산은 포구로 달려갔다. 싱그러운 바람에 비릿한 해초 냄새가 실려 왔다. 눈부시게 반짝거리며 일렁이는 물결이 보였다. 해안가로 파도가 밀려오다 부딪혀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모습도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야호! 만세! 바다가 돌아왔다! 지금의 바다가 좋아!”

  해리와 라산은 소리를 지르며 다시 돌아온 바다를 반겼다.     

  “그런데 라산아, 할아버지는 어떻게 되신 거야?”

  “아~ 할아버지가 배를 점검하고 나오다가 손전등을 떨어뜨렸는데 손전등 줍다가 할아버지 빠졌던 그 웅덩이... 거기만 이상하게 보여서 거기에 가셨다가 빠지신 거지.”

  “아~, 그랬구나! 그래도 빨리 회복해서 다행이다! 그리고 또 이상한 게 하나 더 있어. 그 고양이... 어디로 갔을까?”

  “고양이? 어떤 고양이? 아! 토리가 쫓아갔던 고양이! 그러게. 그 고양이는 어디로 갔지?”

  “웅덩이에는 없었는데, 암튼 잘 살아 있으면 좋겠다!”

  “살아있을 거야. 참, 해리야! 그 쇳덩어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 맞다! 우리 내일 몽돌해변에 가보자.”

  “그래!”     

  해리와 라산에게는 해결되지 않은 숙제가 있었다. 내일 다시 그 숙제를 시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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