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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원장 Aug 26. 2024

멘델스존의 편지

mendelssohn, string quartet no.2 모티브

'그 포도원 담장 옆 정자에서 매일 나를 기다렸다는 것이 정말 사실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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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식이 강한 델스존은 가난한 음악가 가문 출신의 작곡가로 안 그래도 예민한 성격인데 짝사랑에 빠져 신경쇠약에 시달리고 있다


[아름다운 스칼렛. 건강히 잘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지난번 숲길에서 마주친 것은 완전히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당신과 한 번 마주치기 위해 포도원 담장을 서성거리며 그 습하고 어두운 곳에서 며칠이고 기다린 것이 전혀 아닙니다. 현명한 당신이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믿을 리도 없겠으나 혹여라도 당황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저 건강을 위해 의원이 추천한 대로 맑은 바깥공기를 쐬기 위해 그곳에 서성거렸던 것에 불과하니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고상하고 아름다운 당신에게 행여나 작은 오점이라도 될까 두려워 편지를 적어 보냅니다. (다시 뵈었을 때 자연스럽게 목례라도 나누는 사이가 되길 희망합니다.)


델스존이. ]


델스존은 이런 종류의 편지를 몇 번이고 쓰고 찢어 버리길 반복하며 밤을 새우고 있었다. '서성거렸다'라는 표현을 읽으며 무언가 중요한 치부를 들킨 사람처럼 부끄러운 마음에 들떠 몇 번이고 고쳐쓰기를 반복하다 결국엔 비슷한 식의 표현을 다시 쓰는 것이었다. '서성대다니. 아 난 내 기다림을 이렇게라도 비열하게 그녀에게 알리고 싶었단 말인가.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자연스러운 목례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식이라면 차라리 모든 것을 고백해 버리고 스칼렛이 거절하여 나를 완전히 파멸로 몰아넣는 것을 기다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결국 델스존은 수차례의 수정과 고뇌 끝에 아래와 같은 편지를 하인을 통해 부쳤다.


[스칼렛 양, 세간의 이상한 소문에 놀라지 말길 바라며 미리 편지를 보냅니다. 지난번 정자에서 당신을 마주친 일을 기억하시는지요. 저는 그저 포도원 산책이나 나갔던 길에 우연히 당신과 마주치고 말았는데 엉뚱한 소문이라도 난 건 아닌지. 그래서 완전히 순결한 (완전히 고상한) 당신께 누추한 제가 조금이라도 해가 된 건 아닌지 깊은 번민의 나날을 보냈습니다.(실제로도 그날 밤에 심장이 두근거려 밤새 깨어 있었습니다) 제가 그 숲길에 서서 이상하게 머뭇거렸던 것은 순전히 우연입니다. 인생은 언제나 우연과 기적이 지배합니다. 지혜롭고 현명한 당신은 마땅히 아실 겁니다. 항상요. 더 높은 존재는, 하늘에 계신 그분은 항상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편이시니 말입니다. 그러니.. 세간의 소문에 신경 쓰지 마시고 다시 뵈었을 때 자연스러운 목례라도 나눌 수 있는 그런 좋은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델스존이]


이 말투가 지나치게 간사하며 장황하고 심지어 무례하여 불쾌하다고까지 델스존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장고 끝에 하인을 시켜 이 편지를 보내어 버리고 말았다. 그는 오랜 기간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판단력이 흐려져 있었다. 아무렇게나 돼라 식의 행동 이면에는 그녀의 자비로움에 모든 기대를 거는 모험적이고 즐겁기까지 한 수가 있었다. 하지만 편지를 보낸 이후 며칠이 지난 후에도 수차례나 광적인 발작을 거듭하며 꿈까지 꾸며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하인에게 반복하여 편지를 전했는지 확실한지 재차 확인하고 오직 편지를 못 읽게 중간에 빼돌리는 길 만이 영혼의 파멸을 막을 유일한 구원책이라고까지 믿어버릴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미 전달해 버린 마당에 편지를 따라잡아 낚아챌 마땅한 수단은 없었다. 마구간 말은 너무 늙었고 다른 말을 빌려 먼 길을 떠날 형편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상상들이 편지지 안의 수사 하나하나에 미친 듯이 들러붙어 마치 아귀처럼 집착할 때도 무기력하게 그냥 둘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럴 수가 '완전히'란 표현을 썼을 줄이야 나란 놈은 그야말로 정신 나간 인간이 아닌가. 도대체 왜 그랬을까. 이런 표현은 그 누구라도 사회생활이 부족하고 세련되지 못한 어설픈 치기의 단어라 비웃을 것이다. 적어도 그런 암시는 피할 수 없다. 내가 너무 과민해진 걸까? 아니다.. 아니야 여성들은 대체로 특유의 오만함과 잔인함으로 나처럼 어리숙한 남자를 비웃고 조롱하는 걸 인생의 가장 큰 특권으로 여기지 않던가 하지만 스칼렛은 다를지도 모른다. 그녀는 평범한 여자들과 완전히 다른 아름다움을 지녔지. 고대 아프로디테 석상 같은 무표정에 아아.. 그 표정도 없이 빛나는 그 사람에게 도대체 무엇을 바라던 것인가. 그런데 그 형언하기 어려운 매력과 아름다움은 어디서 나온 걸까 아.. 무엇을 원해 너무도 어리석게 속마음이 훤히 드러난 편지를 썼던가. 나처럼 비참한 가문의 남자는 오직 품위 만이 썩지 않을 단 하나의 무기이거늘. 과도한 칭찬으로 비굴한 포지션을 자초하지 않았던가. 세간에 대해서는 대체 왜 뭐라도 아는 듯이 적었던가. 그녀가 내 허영심 가득 찬 속내를 다 꿰뚫어 보는 건 아닐까. 아아 너무 굴욕적이어서 상상조차 하기 괴롭다' 델스존은 이런 종류의 광적인 자기 학대로 오랜 시간 고통받았다. 심지어 고열에 시달리며 며칠간 침대에서 섬망 증세를 겪기도 했다. 그녀가 편지를 문자 그대로 믿어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다가도 한편으론 그녀의 자비심과 자신의 속셈을 간파하지 못할 정도의 무관심에 기대를 걸기도 했지만 이내 정반대의 생각에 빠져서 실제로 고열로 앓아눕기까지 했던 것이다.


때때로 신경이 매우 쇠약한 이런 종류의 사람은 하나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황당할 정도로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미 보내버린 이 한 편의 편지에 며칠이나 매달려서 편지가 그리 예의에서 어긋남이 없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사실상 편지 자체는 지나치게 허약하여 품위가 조금 떨어질지언정 크게 선을 넘지 않았던 것이다. 수 백번 반복된 상상의 나래 속에 결국 자신의 숨기고 싶은 광적인 집착과 비열한 감정이 모두 편지에 담겨있고 편지의 유일한 독자가 모든 것을 알아챌 것이라 믿어버리고 만 것이다. 차라리 그런 편지가 도착한 바에야 절벽에서 떨어지는 결투를 하든 (누구 와?) 그나마 숭고한 죽음이라도 맞이하는 편이 그녀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높게 평가할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미쳐있었다. 그는 이런 급박한 심정으로 다음의 편지를 갈겨썼다.



[스칼렛. 지난번 편지는 잊어주길 바라오 아직 펴보지 않았다면 찢어버려주길 바라오. 그런데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불가능하겠지..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없애주면 고맙겠소. 너무나 오만했고 무례했던 거 같소. 다만 건강이 좋지 않아 다소 심약했던 것이니 불쾌해하지 않길 바라오. 하지만 지난번 정자에서 마주쳤던 것은 매일같이 애타는 마음으로 오직 당신만을 기다렸기 때문이오. 이제 당신의 회신만이 진지한 의미로 내 삶에 남은 유일한 희망이오.


친애하는 델스존]


이틀 후에 짧은 답신이 도착했다.


'그 포도원 담장 옆 정자에서 매일 저를 기다렸다는 것이 정말 사실인가요. 다음번의 산책에서 꼭 뵐 수 있길 바래요.


스칼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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