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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은 듬성듬성 그리세요

멀티 AI 에이전트 구축기_EP2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데이터분석가입니다. 지난 회차에서 AI를 굴릴 공간, 로컬 인프라를 구축하는 기초공사를 마쳤습니다. 이제 가장 흥미롭고 창의적이지만 까다로운 단계죠. '기획'의 영역으로 들어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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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합니다. 이제 배관따고 공구리치셨어요


우리에게 익숙한 '기획'

아마 많은 분들이 '기획'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그런 그림을 떠올리실 겁니다. 새로운 상품이나 서비스를 출시하기 위해 모인 회의실, 화이트보드에 적잖이 붙어있는 포스트잇, 그리고 곱게 그려진 플로우 차트 같은 것들 말이죠.


통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품/서비스 기획은 매우 체계적이고 목표 지향적인 프로세스를 따릅니다. 고객의 페인 포인트(Pain point)를 찾거나 , 시장 조사를 통해 팔릴 만한 아이템을 발굴하죠. 일단 방향이 정해지면,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성공 확률을 높이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됩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는 핵심 성과 지표(KPI)입니다. '출시 후 3개월 내 월간 활성 사용자(MAU) 10만 명 달성', '초기 이탈률 20% 미만 유지'와 같이 구체적이고(Specific), 측정 가능하며(Measurable), 달성 가능하고(Achievable), 현실적이며(Realistic), 기한이 정해진(Time-bound) 목표를 설정합니다. 그리고 설정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상품이나 서비스의 기능 명세서는 최대한 상세하게 정의되고, 개발 일정과 투입될 자원은 그에 맞춰서 계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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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우리에게 기획이란 무엇일까


모든 단계가 정해진 목표를 향해 정렬되고, 변수는 최대한 통제되며, 최종 결과물은 기획서에 명시된 대로 출력되어야 합니다. 예측 가능한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이 곧 '기획'인거죠. 이는 지난 수십 년간 제조업 기반의 압축 성장을 경험하며 효율과 속도를 중시해 온 한국의 기업 환경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해 온 방식이기도 합니다.



불확실성의 활용과 구조화 : 왜 멀티 AI 에이전트 기획은 달라야 하나

하지만 우리가 만드는 멀티 AI 에이전트 기획은 그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전통적인 기획이 정교하게 계산된 설계도를 따라 건물을 만드는 과정이라면, 멀티 AI 에이전트 기획은 숲을 만드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특정나무를 간격을 두고 심는다' 같은 틀은 따르지만 성장의 방향이나 서식하는 동식물의 종류까지 제한하진 않는 거죠.


이유는 우리가 얻어야 할 결과물의 형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기획이 눈에 보이는 '유형의 가치(서비스, 상품)'를 목표로 한다면, 멀티 AI 에이전트 기획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가치', 즉 '통찰력(Insight)'을 얻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우리에겐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더 나은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돕는 AI 팀이 필요하니까요.


이러한 차이는 기획의 정의를 완전히 바꿔 놓습니다. 전통적인 기획이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멀티 AI 에이전트 기획은 '불확실성을 활용하고 구조화'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멀티 AI 에이전트의 진정한 가치는 우리가 예측하고 통제한 결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전문성을 가진 에이전트들의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서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창발적 행동(Emergent Behaviors)'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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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했지?' = 설계의 핵심


따라서 멀티 AI에이전트의 기획자는 자신의 '사고방식'을 논리적으로 설계해야 합니다. 특정 도메인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사고의 흐름, 즉 '현상에 대한 분석과 그에 관련된 정보를 찾아보고(거시), 분석 결과와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특정한 시각에서 재분석 혹은 의미를 재구성하며(중간), 현재 고려해야 할 변수를 어떻게 적용시켜 결론을 내릴 것인가(미시)' 하는 일련의 과정을 외부로 끄집어내어, 각 단계를 수행할 AI 에이전트들의 역할과 협력 방식으로 풀어내야 합니다.


쓰고 보니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 우리가 매일 수행하는 두뇌 활동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차세대 리더의 핵심 역량을 어떻게 배양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졌다고 합시다. 아마 우리는 아래와 같은 사고 흐름을 설계할 수 있을 겁니다.


(거시) 외부 환경 분석 : 전 세계 경영학술지와 산업 보고서를 분석해서 '리더의 핵심 역량' 정의를 추출하고 세부 구성요소와 관련된 데이터를 광범위하게 수집합니다.

(중간) 내부 역량 진단 : 지난 5년간의 사내 고성과자 데이터를 분석해, 실제 우리 조직에서 바라는 성과와 연결된 역량이 무엇인지 식별합니다.

(미시) 종합 및 제안 : 외부 자료와 내부 자료를 종합하고, 두 분석 결과의 교집합과 차집합을 비교하여 우리 조직에 특화된 차세대 리더십 모델의 초안을 작성합니다. 그 근거도 정리해 둡니다.


우리의 두뇌는 체계적으로 단계를 밟으면서 답을 찾습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다양한 관점과 역할을 가진 에이전트들의 상호작용으로 구현하여, 썩 괜찮은 통찰을 이끌어내면 됩니다. 그러려면 순서와 역할은 제어하되 에이전트들이 뿜어낼 아이디어는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가야겠죠. 이것이 '불확실성의 활용과 구조화'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얻을 것인가: '통찰'의 재정의

그럼 불확실성의 활용과 구조화로 생성할 통찰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흩어져 있는 정보들을 의미 있는 맥락으로 종합하여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패턴이나 인과관계, 혹은 미래의 가능성까지 찾아내는 과정을 통찰이라 정의합니다. 단순히 데이터를 요약하거나 보고서를 작성하는 수준보다는 더 깊고 다양한 역할을 기대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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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바라는 수준은 그 정도의 답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사내 대화 데이터를 분석하던 에이전트가 특정 부서와 다른 부서 간의 정보 교류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합시다. 발견된 사실에 대해 보고로 끝나면 아쉽겠죠. 다른 에이전트는 협업 프로젝트의 성공률과 연계시켜 검토할 테고 또 다른 에이전트는 정보 교류 확대 외에 추가적으로 덧댈 조치에 대해 기안을 작성해 올리겠죠. 결과물을 취합하는 에이전트가 최종적으로 검토 후 정리해서 가져다 줄 겁니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떠올라야 하는 고민은 통찰의 질을 어떻게 확보하는가에 대한 부분입니다. 이를 바꿔 말하면 '시스템 수준에서 성찰 패턴, 즉 구조화된 토론과 비판을 어떻게 구현하냐'라는 질문이 되겠죠. 저는 의도적으로 다른 에이전트들이 도출한 결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잠재적 편향을 지적하며, 반대 논리를 제시하는 '레드팀(Red Team Agent)' 또는 '비판가(Critique Agent)'라는 에이전트를 넣는 방안을 고려해 봤습니다. LLM 자체가 어떻게든 말을 만들어 내는 녀석이니 어떻게든 태클을 걸어서 한 번은 결론을 재검증하고, 다양한 반론을 고려하게 만들어 주는 거죠.


누구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역할 설정과 협업 설계

고민이 끝났으면 '누가(어떤 에이전트가)', '어떻게(어떤 구조로)' 협력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정의해야 합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도메인 주도 설계(Domain-Driven Design, DDD), 즉 내가 실제로 수행할 비즈니스 영역에서의 '역할'을 중심으로 접근하는 방식입니다. 에이전트의 목표와 역할, 보유 도구를 현실 세계의 비즈니스 역량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죠.

Gemini_Generated_Image_ye1clyye1clyye1c.png 내 분야에서 '이런 일을 해 줬으면' 하는 걸 연결


'직원들이 온전하게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는 비즈니스 목표가 설정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에이전트의 목표는 이를 반영해 "직원들의 몰입도를 높이거나 저해하는 핵심 요인을 식별하는 것"으로 설정합니다. 정체성 역시 "직원들의 정서와 동기 부여 요인을 분석하는 데 특화된 HR 분석가"라는 구체적인 역할로 정의됩니다. 그리고 이 역할에 맞는 구체적인 도구들, 즉 연차별 만족도 조사 데이터나 퇴사자 인터뷰 기록, 사내 메신저 API 등에 대한 접근 권한을 부여해 주는 겁니다. 필드의 목표가 분명하다면 그에 맞게 차례로 설정해 주면 됩니다.


역할 설정이 끝났다면 얘들이 어떻게 함께 일할지도 결정해야 합니다. 이걸 고상한 말로 '협업 아키텍처' 또는 '오케스트레이션 패턴'이라고 부릅니다. 일할 방식을 정해주는 거죠. 크게 보면 아래와 같이 세 종류 정도로 나뉘는 거 같습니다. 더 나은 방식에 대한 고민도 해보면 좋겠지만 여기선 우리의 목표인 '통찰력 생성'에 가장 적합한 프로젝트 방식을 차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조립식 (파이프라인 패턴) : 공장의 조립 라인 같은 형태입니다. 에이전트들이 정해진 순서대로 작업을 처리하니 빠르고 효율적이지만 유연성이 떨어져 복잡하고 동적인 문제 해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서류 처리처럼 예측 가능하고 순차적인 업무에 적합합니다.

브레인스토밍식 (협업/그룹 채팅 패턴) : 아이디어 환기 차원의 브레인스토밍 회의랑 비슷합니다. 여러 에이전트가 공유된 대화 공간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합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는데 유용할 수 있지만, 명확한 규칙이 없으면 논의가 산만해지거나 비효율적으로 흐를 위험이 큽니다.

프로젝트식 (관리자-기획가 패턴) : 중앙에 프로젝트 관리자를 두는 방식입니다. '관리자' 또는 '기획가' 에이전트가 복잡한 문제를 하위 과업으로 분해하고, 각 과업에 적합한 에이전트에게 업무를 위임한 뒤, 최종적으로 그 결과물들을 종합해서 보고서를 완성합니다. '관리자'의 역량에 따라 결과물의 질이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밑그림은 듬성듬성 그리세요

이제 불확실성을 활용하고 구조화한다는 큰 틀에서 통찰력을 얻기 위해 누구를 어떻게 굴릴지에 대한 밑그림을 그렸습니다. 밑그림이 정교하면 실수가 줄어들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직접 시스템을 구성하고 운영하다 보면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 또 생기기 마련이거든요. 그러니 완벽한 계획을 세우겠다며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쓰지 않으시길 권합니다. 듬성듬성 그리세요.


우리가 설계할 멀티 AI 에이전트 시스템은 우리를 참 많이 닮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함께 일할 '생각하는 AI 팀'을 만들고, 운영하고, 개선하다 보면 결과물은 나아질 테고, 그 과정에서 우리 역시 성장할 테니까요. 물론 앞으로 코드 실수부터 시스템 불안정, 논리의 오류, 워크플로우의 문제까지 다양한 어려움이 따를 테니, 일정 부분 마음의 여백을 두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는 얘기를 돌려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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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그렇다는 것, 너무 겁먹진 마시라

이제 '기획'이 끝났습니다.

그럼 다음 회차에 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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