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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우리에게 일머리란 무엇인가

저물어가는 성실의 시대

우리의 지식 노동을 수행하도록 최적화된 AI 에이전트 서비스가 연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코딩부터 글쓰기, 데이터 분석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이 점차 넓어지고 있죠. 이와 관련해서 287개의 미국 직업군을 대표하는 5개 핵심 직무 스킬(데이터 분석, 엔지니어링, 계산·행정, 글쓰기, 디자인)을 두고 48명의 인간 작업자와 4개의 대표 AI 에이전트를 비교 분석한 연구자료가 있어 소개합니다. 비록 표본의 크기가 제한적이라는 한계는 있으나, 던지는 메시지는 묵직합니다.


결과가 흥미롭습니다. 인간의 개입을 배제한 채 진행된 AI 전체 자동화는 AI의 프로그래밍 중심 접근 방식과 품질 저하 문제로 인해 오히려 17.7%의 생산성 저하를 초래했습니다. 반면, 명확한 단계는 AI에게 위임하고 모호한 작업은 인간이 맡는 인간-AI 협업 모델은 품질 저하 없이 24.3%의 효율성 증대를 달성했습니다.

말 그대로 이젠 머리싸움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숫자는 +24.3%입니다. 이는 AI 기술로 얻어낸 수치가 아니죠. 전체 업무의 흐름을 꿰뚫어 보고, AI가 잘하는 일과 인간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구분해 낸 인간의 판단력이 거둔 성과입니다. 이는 AI 시대의 핵심 가치가 도구의 성능이 아니라, 그 도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프로세스를 재설계하는 인간의 고차원적 능력에 있음을 시사합니다.


마냥 성실해선 곤란한 시대가 왔습니다.




AI 에이전트에게 일머리를 심어줄 수 있을까

AI 에이전트의 시연 영상은 화려합니다. 클릭 몇 번으로 복잡한 리서치 보고서를 뚝딱 만들어내고, 전문 개발자처럼 코드를 짜냅니다. 하지만 이 기술을 실제 내 업무 현장에 가져오면, 우리는 결이 다른 당혹감과 마주합니다. 결과물은 조악하기 짝이 없고, 빈번하게 발생하는 오류를 수정하느라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됩니다.


맥킨지는 이 문제의 본질을 지적합니다. 많은 기업이 에이전트의 기능 구현에만 매몰된 나머지, 정작 그 기능이 녹아들어야 할 '사람 - 프로세스 - 기술'이라는 전체 흐름을 간과한다고요. 이는 앞선 연구에서 관찰된 -17.7%의 생산성 저하와도 맞닿는 지점입니다. "문제는 에이전트가 아니라 워크플로우다(It’s not about the agent; it’s about the workflow)". 100% 맞는 얘깁니다.

"바보야. 문제는 일하는 과정이라구"


필드에서 AI가 실패하는 양상을 보면 일머리의 부재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AI는 인간보다 88.3% 빠르고 비용은 90% 이상 저렴하지만, 결과물의 품질이 낮다 보니 필연적으로 인간의 검증과 수정 비용을 유발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무능을 감추기 위해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미지 속의 청구서 숫자를 읽지 못하자, 오류보고 대신 임의의 숫자를 만들어내 엑셀 시트를 채워버리기도 하니까요. 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프로세스 전체를 오염시키는 치명적인 위험 요소입니다.


이러한 기술적 한계를 인지한 Claude 개발사 앤트로픽(Anthropic)조차 자율적 에이전트보다 사전 정의된 워크플로우의 단순성이 낫다고 말합니다. 금융 거래나 의료 진단처럼 위험도가 높은 분야에서는 완전한 자율성보다 인간의 개입이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기술이 고도화되면 언젠가 AI에게도 일머리가 생길지 모르지만, 적어도 아직은 아닙니다.



'일머리'의 재정의 와 필연적 양극화

AI가 할 수 있는 일(프로그래밍 가능한 작업)과 할 수 없는 일(모호하고 예외적인 작업)이 명확해짐에 따라, 일머리의 기준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유능함이 주어진 일을 성실하고 빠르게 수행하는 능력이었다면, 이제는 업의 전체 흐름을 조망하고 AI와 인간의 역할을 재조합하는 설계 능력으로 그 가치가 이동했습니다. 인간을 압도하는 속도와 효율성을 갖춘 AI 앞에서, 더 이상 손의 빠르기만으로는 경쟁력을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새로운 일머리는 단순한 AI 리터러시(AI Literacy) 수준을 넘어섭니다. 단순한 도구 사용법을 넘어 복잡한 다단계 프로세스에 AI를 원활하게 통합하는 능력, 우린 이를 AI 유창성(AI Fluency)이라 부릅니다. 얼마 전에 갤럽이 AI 시대의 성공 전략으로 '수행해야 할 업무 프로세스 중에서 AI에게 떼줄 건 과감히 떼주되, 인간은 창의성, 복잡한 문제 해결, 대인 커뮤니케이션, 미묘한 의사 결정 같은 영역을 맡아라'라고 꼽았는데 사실 이게 AI 유창성의 핵심입니다.


어차피 AI 리터러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누구나 갖추니 차별성을 가지기가 어렵거든요.

그렇다. 과감히 열어줘야 한다


일머리의 정의가 수행에서 설계로 이동하면서, 지식 노동 시장의 양극화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연구에 따르면, AI는 구조화된 인지 작업(과거의 일머리) 직무의 노동 수요는 감소시키는 반면, 인간-AI 협업(새로운 일머리) 직무의 수요와 기술 복잡성은 오히려 증가시킵니다.


시카고 대학의 연구는 이를 '작업자 - 해결사' 모델로 설명합니다. AI와 경쟁하며 루틴한 업무를 처리하는 작업자의 설 자리는 좁아지지만, AI를 활용해 루틴을 자동화하고 시스템 설계와 예외 처리에 집중하는 해결사의 가치는 폭등합니다.


이 양극화의 메커니즘은 잔인할 정도로 명확합니다. NBER(전미경제연구소)의 연구 결과처럼, AI는 신입 및 저성과자의 생산성을 폭발적으로 향상해 기술 격차를 평준화합니다. 이는 곧 고객 지원처럼 구조화된 직무의 가치는 하락하고, 전통적 의미의 숙련 인력은 남아도는 상태가 됨을 의미합니다.


이 판에서 살아남는 진정한 해결사는 AI의 도움을 받아 상담을 더 빨리 처리하는 직원이 아니라, 부서 전체의 워크플로우를 AI 에이전트와 결합하여 재설계하는 관리자가 됩니다. 그런 관리자는 품귀 현상을 빚겠죠.


과잉과 결핍이 공존하는 노동 시장에서 더 높은 가치가 어디로 향할지는 자명합니다.



지금 여기 우리에게 일머리란 무엇인가

다만, 앞서 언급한 연구의 +24.3% 효율성 증대는 업무의 범위와 책임(R&R)이 명확히 분리된 미국형 업무 환경을 전제로 합니다. 조직과 개인 차원 모두에서 명확한 업무 분할이 선행되어야 AI에게 단계별 위임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업무 환경은 사뭇 다릅니다. 여전히 업무 프로세스는 암묵적이고, 판단 기준은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며, 데이터는 비구조화된 채 흩어져 있습니다. 관계 중심의 문화와 강력한 동적 집단주의 속에서, 일은 공식적인 매뉴얼보다 눈치와 맥락이라는 비공식적인 경로로 처리되곤 합니다. 각자의 업무 영역이 고립된 채 파편적인 효율성 개선에 머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미국과 아주 많이 다른 우리의 업무환경


미국과 다른 환경에서 지금, 여기, 우리에게 필요한 일머리는 AI 적용을 위한 전처리 작업 그 자체가 됩니다. 이미 AI는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고 +24.3%는 끌어내야 하니까요. 아마도 개인 차원에선 눈에 보이지 않는 워크플로우를 가시화하고,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를 풀어내어 업무 단위를 분리하며, 이를 표준화하여 AI가 알아들을 수 있는 형태로 재조립하는 능력으로 정의가 되겠죠.


조직 차원이라면 앞서 말한 개인차원의 정의에 파편화된 데이터와 단절된 시스템을 연결해 부서 간 지능까지 도모하는 것으로 확장될 겁니다. 미국형 해결사보다 한 차원 더 높은 난이도를 요구합니다.


이 복잡한 실타래를 풀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귀하고 비싼 일머리가 아닐까요.


지금, 여기에서 일을 잘해야 하는 이유

IMD(국제경영개발원)는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Copilot 라이선스를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AI 역량을 중심으로 비즈니스 프로세스를 조용히 재구축하는 기업에서 나온다"라고 지적했습니다. 보험금 청구 비용을 40% 절감하거나 신약 개발 일정을 획기적으로 단축한 기업들처럼, 문제를 해결하고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프로세스를 재설계하는 과정이 미래 경쟁력 확보에 필수적이라는 얘기죠.


지금, 여기에서 일을 잘해야 하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술이 먼저냐 지식과 경험이 먼저냐 하는 논쟁보다 '내 업의 본질과 전체 흐름을 꿰뚫고 있는가'를 먼저 봐야죠. 아무래도 기술 전문가가 도메인을 배우는 것보다, 도메인 전문가가 AI 기술을 습득하여 자신의 프로세스를 재설계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고 강력한 접근법이기도 하니까요.


성실함의 시대는 저물고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질문해 볼 시간이죠.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가'가 아니라 '내 일의 프로세스를 어떻게 재설계하고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기술이 아닌 통찰로, 수행이 아닌 설계로 업의 가치를 재산정하는 것. 그것이 지금, 여기, 우리에게 필요한 일머리입니다.


그러니 일단, 지금 여기에서, 일을 잘하고 볼 일입니다.




참고자료)

3 critical actions for when the AI bubble bursts

One year of agentic AI: Six lessons from the people doing the work

How Do AI Agents Do Human Work? Comparing AI and Human Workflows Across Diverse Occupations

Play the Long Game With Human-AI Collaboration

Displacement or Complementarity? The Labor Market Impact of Generative AI

Artificial Intelligence in the Knowledge Economy

AI’s new dual workforce challenge: Balancing overcapacity and talent short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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