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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프로 선수처럼 하라는데

뭐, 되면 합니다. 안 한다는 건 아니고요

윗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직원들이 좀 더 열정적으로, 프로의식을 갖고 일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접합니다. 겉으로는 '열정'이나 '프로의식'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단순한 성실함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시즌에 지옥 훈련으로 몸을 만들어 시즌 때 모든 걸 쏟아붓는 프로 선수처럼, 퇴근 후에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자기 계발을 해서 성과를 가져다주길 바라는 것이죠. 회사가 마치 프로 구단처럼 굴러가길 바라는 마음이 엿보입니다.

보통의 성실함을 말하는 단어가 아니다


하지만 윗선(?)의 바람과 달리 직원들은 하루를 버텨내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주 업무와 잡무가 뒤엉킨 데다 날아오는 업무 폭탄을 쳐내느라 세계 최고 수준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립니다. 이미 마음은 조용한 퇴사 상태이거나 번아웃 직전까지 몰려있죠. 매일 연장전에 끝장승부까지 치르느라 하얗게 불태운 사람에게 '집에 가서 스윙 돌리고 자라'하면 좋은 반응을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자기 계발이라는 단어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비극의 시작입니다.




나는 왜 책상 앞에만 앉으면 왜 이렇게 작아지는가

대한민국 직장인이면 누구나 성장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저 역시도 그렇습니다. 도태에 대한 공포와 성취에 대한 욕망이 DNA에 박혀 있으니까요. 하지만 막상 퇴근 후 책상 앞에 앉은 현실의 나는 온몸으로 자기 계발을 거부합니다. 사둔 책을 펴는 게 그렇게 힘듭니다. 대체 왜 그럴까요. 내가 책을 펴지 못하는, 아니 펴기 싫어하는 이유는 자기 계발을 하려 하면 할수록 스스로가 초라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초라해 보이는 걸 아는 거죠.


일단 막막합니다. 예전엔 엑셀이나 영어만 하면 괜찮았는데 지금은 어림도 없습니다. 데이터 분석, AI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협업과 커뮤니케이션 스킬, 인문학적 소양... 배워야 할 것이 산더미라 당장의 업무에 무엇이 필요한지 조차 알 수 없는 멘붕에 빠집니다. 자고 나면 또 듣도보도 못한 게 나와있죠. 맥킨지에서 말하는 '기술의 변화 속도가 너무 빨라, 무엇을 먼저 채워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너무 빨라서 따라잡기조차 쉽지 않다


과정도 사람을 갉아먹습니다. 전문 서적이나 영상은 외계어처럼 낯설고, 뇌세포는 이미 지쳐있습니다. 모르는 게 생기면 그걸 파고들어야 실력이 되는데 지쳤으니 대충 파다 넘어가버립니다.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지식을 억지로 집어넣다 보면 별별 생각이 다 들죠. '잘하고 싶은데 왜 이렇게 안 되냐', '남들은 다 한다는데, 나는 왜 이것도 이해를 못 할까' 등등. 어려운 내용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겪는 이해도의 저하는 좌절감을 유발하고 이는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으로 이어집니다.


어찌어찌 시작을 했어도 하다 보면 그간 내가 얼마나 무식했는지 깨닫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모르는 게 많다 보니 진도가 안 나가거든요. '지금까지 운 좋게 버텨왔구나'라는 생각도 듭니다. 현재의 성과가 운에 기인했다는 불안감, 가면증후군도 생기죠. 이 불편하고 끈적거리는 패배감은 책을 덮어버리면 거짓말처럼 사라집니다. 그리고 타협하죠. '딱 중간만 가자. 욕먹지 않을 정도로만.'


이걸 잘못이라 보긴 그렇습니다. 자기 계발도 어느 정도 자존감이 있어야 하는 거니까요.


아무리 자극을 받아도 실천이 안 됩니다

많은 경영자나 자기 계발 전문가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핑계 대지 마라. 환경을 탓하지 마라. 의지 문제다.'


이 노오력의 구조 안에서는 무슨 얘길 해도 변명이 되어버립니다. ‘공부에 재능이 없다’ 그러면 1만 시간의 법칙을, ‘기술이나 지식의 벽이 너무 두텁다’ 그러면 고졸 출신 임원 사례를, ‘육아와 통근이 힘들다’ 그러면 새벽 4시에 일어나는 워킹맘이나 워킹대디를 들이대니까요. 성공 신화 자체가 생존 편향의 결과물이지만 그 모든 원인이 나의 약한 의지력으로 귀결되어야 하니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세련된 폭력이죠.

교육 성과에서 노오력이 미치는 영향은 고작 4%


행동경제학의 '결핍의 경제학'이란 책에선 인지 대역폭과 터널링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우리의 뇌가 처리할 수 있는 인지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시간이나 돈, 마음의 여유가 부족한 결핍 상태에 빠지면, 뇌는 당장의 결핍을 해결하는 데 모든 리소스를 쏟아붓습니다. 마치 터널 안에 들어선 것처럼 시야가 좁아져 시급한 문제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죠.


직장인들의 일상을 살펴봅시다. 쏟아지는 메일에 업무 알림, 복잡한 인간관계, 늘 마뜩잖은 잔고 등이 기본으로 세팅되어 있습니다. 여유가 있는 직장인들이 많지 않습니다. PC로 치면 갖가지 브라우저에 엑셀, 메신저, 동영상 편집툴 등을 한꺼번에 띄워놓은 상태죠. 여기에 VScode 같은 코딩 프로그램이나 3D 모델링까지 주문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시스템이 수시로 셧다운 될 겁니다.


주변에서 자기 계발하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개인의 정신력이 남다르기도 하지만 장기적인 미래를 도모할 인지적 여유 공간이 확보된 경우가 많습니다. 가족의 배려나 회사의 지원 같은 환경의 변화로 메모리가 늘고 감당할 수 있는 시스템 리소스가 커진거죠. 마냥 비교하기 전에 구분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득 찬 엘리베이터에 왜 올라타지 않느냐고 화를 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면 병원을 데려가야죠. 이미 가득 찬 공간에 '네가 맘이 약해서 그래, 더 강하게 누르면 태울 수 있어' 채근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공간을 확보해 줄지 고민하는 게 먼저입니다.


이건 핑계도 환경 탓도, 의지 문제도 아닙니다. 그냥 현실이 그렇다는 겁니다.




프로의 길, 되면 합니다

제 이야기가 이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자기 계발도 엄연히 에너지가 소모되는 고된 정신노동이라는 점입니다. 멍석 한 장 깔아주지 않고 "프로답게 일하라", "야망을 가져라"라고 외치는 건 예의가 아니란 거죠.


직원의 성장이 회사의 성과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을 어떻게 더 낫게 만드는지에 대해 얘길 나눠야 합니다. 아예 대놓고 물어보세요. '요새 일하면서 뭐가 제일 답답해?', '뭘 배우면 너의 삶과 회사 성과에 좋은 영향을 미칠까?', '그래서 내가 뭘 도와주면 되나?'. 그렇게 엘리베이터 안의 공간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래야 직원들도 '나도 한 번 성장이란 걸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대놓고 물어보세요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는 자기 결정성 이론에서 '사람은 보상보다도 스스로 선택했다는 느낌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게 나한테 의미가 있다는 느낌이 들 때 비로소 움직인다'라고 했었죠. 지금부터라도 성장을 위한 환경과 자율성을 먼저 점검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무턱대고 압박하는 건 되려 반감만 살 뿐입니다.


프로의 길, 되면 합니다. 안 한다는 게 아니니까요.



(참고자료)

Deliberate Practice and Performance in Music, Games, Sports, Education, and Professions: A Meta-Analysis

https://www.mckinsey.com/capabilities/people-and-organizational-performance/our-insights/we-are-all-techies-now-digital-skill-building-for-the-future

Deci, E. L., & Ryan, R. M. (1985). Intrinsic motivation and self-determination in human behavior. New York: Plenum.

Scarcity: Why Having Too Little Means So Much (Full S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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