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스킬을 가지고 있어도 연봉은 제자리
맨큐의 경제학 4장엔 수요공급의 법칙이 나옵니다. 특정 재화의 가격은 그 재화에 대한 수요량과 공급량이 결정한다는 거죠. 'AI에 대한 수요가 점차 늘고 있다 - AI 기술을 가진 인재는 극히 일부다 - AI 인재의 가격이 오른다.' 공급이 부족한 재화니 가격이 오르는 건 당연합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흐름이죠.
하지만 한국 노동시장은 이 당연한 흐름을 아주 괴이한 방식으로 배신하고 있습니다.
2024년 기준으로 한국에서 AI 기술을 보유한 근로자가 누리는 임금 프리미엄은 6%입니다. 통계적으로는 유의미한 양의 상관관계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현실에선 말이 안 되는 수치입니다. 이 수치가 얼마나 터무니없느냐. 전 세계 AI 열풍을 주도하는 미국의 경우엔 AI 기술을 보유한 근로자에게 약 25%의 임금 프리미엄을 부여합니다. 똑같은 코드를 짜고 똑같은 모델을 돌리는데, 국적만 바뀌면 내가 가진 기술의 가치가 4배 이상 뛴다는 얘깁니다.
더 기가 막힌 건 고작 6%를 더 받기 위해 들여야 하는 시간과 비용입니다. 국내 AI 인력의 58%가 석·박사 학위를 가진 고학력자들입니다. 젊은 날의 5~6년을 연구실에서 햇빛도 못 봐가며 학위를 땄는데, 노동시장이 매긴 가치가 고작 +6%입니다.
사실 영어만 어느 정도 되면... 그렇습니다. 해외를 고려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거죠
진짜 이래가꼬 AI 하겠나
6%도 기가 차는데 속을 보면 그 안에서도 갈립니다. 딥러닝이나 머신러닝 같은 AI의 핵심 기술 분야나 제가 관심을 갖고 공부한 NLP 같은 기술은 이 프리미엄이 거의 0에 수렴하거나, 평균을 밑돌고 있거든요. 반면, 이미 성숙된 기술이나 특정 산업 응용 분야인 패턴 인식(17.9%), 뇌과학(15.8%), 신호 처리(11.8%) 등이 상대적으로 높은 프리미엄을 받습니다. 이는 한국의 산업 생태계가 여전히 제조업 하드웨어 중심의 공정 개선이나 품질 관리에 AI를 활용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음을 뜻합니다.
시장은 정직합니다. + 6%, 이 수치는 한국 기업들이 AI를 핵심 경쟁력이라 하면서도, 정작 그 기술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가치를 지불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설문조사에선 기업들이 숙련 인재 부족을 호소하면서도 높은 급여 기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하던데, 사실 제 눈엔 제대로 된 대가를 지불할 생각은 없으면서 고성능의 결과물만 바라는 모순적인 태도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낮은 보상은 인재 유출을 부릅니다. 한국의 AI 인력 중 해외에서 근무하는 비중은 약 16%로, 일반 근로자에 비해 6%나 높으며 특히 AI 기술을 보유했을 때 해외 취업 확률은 무려 27%가 상승합니다. AI 인력은 해외에서도 귀하거든요. 특히 딥러닝과 같이 국내 임금 프리미엄이 낮은 기술을 보유한 인력일수록 해외 취업 확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는 결과는, 우리가 인재를 못 구하는 것이 아니라 되려 떠밀고 있다는 얘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기업들의 지갑은 왜 열리지 않나
왜 한국 기업들은 AI 인재에게 지갑을 여는 데 인색할까요. 그 원인은 기업들이 AI 인력을 바라보는 관점과 채용 방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많은 기업이 AX를 외치지만, 실상은 기존의 업무 프로세스에 AI 도구를 얹는 수준에 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디자인 업무 + AI Tool 활용 가능자', '데이터 관리 + 생성형 AI 가능자'. 이러한 형태의 직무 기술은 AI를 통해 일하는 방식 자체를 혁신하려는 의지와는 거리가 멉니다.
AX는 업무의 처음부터 끝(End-to-End)을 뜯어고쳐 AI와 인간이 협업하는 새로운 프로세스를 설계하는 게 목표입니다. 예를 들어, 채용 업무라면 스펙 거르기나 이력서 판별에 AI를 쓰는 것이 아니라, 채용 인력의 필요 역량 정의부터 정제, 면접 일정 조율까지 AI가 제안하고 인간은 이를 검토해서 질문과 정성적 판단에 집중하는 형태로 역할을 재구성하는 것이죠.
이에 대해 BCG는 AI 도입의 성공 요인을 '10-20-70' 법칙으로 설명합니다. 알고리즘(10%)과 기술(20%)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 조직, 프로세스의 변화(70%)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다수 한국 기업들은 이 70%를 무시합니다. 대신 '기존 업무 + AI 활용 가능자'를 찾죠. 조직의 미래 기능을 먼저 설계하고 그에 맞는 구체적인 AI 직무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직무의 앞단에 (AI 활용)만 끼워 넣는 식입니다. 직무 정의가 불명확하니 창출할 부가가치도 산정되지 않고, 결국 연봉도 기존 테이블에서 찔끔 더 얹어주는 식으로 결정됩니다. 기술은 샀는데 성과는 없고, 기대에 부풀어 입사한 인재는 실망하여 떠나는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사둔 기술을 마냥 놀릴 순 없으니 남은 사람들에게 'AI 활용' 미션이 더해집니다.
흔히 보는 광경입니다. 프로세스를 바꿀 생각은 없으니까요.
어떻게든 갈아 넣으면 된다는 믿음
가장 걱정되는 지점은 이러한 구조적 무능이 한국 특유의 가성비 문화와 결합할 때입니다. 한국의 IT, 게임, R&D 분야는 개인의 절대적인 시간 투입과 희생을 통해 성과를 짜내는 방식이 소위 국룰입니다. 다른 분야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런 방식에 익숙하죠. 한국 산업 생태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 낡은 방식을 창의성과 고도의 지적 노동이 요구되는 AI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하려 든다는 점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AI 시대에는 기술 기반의 정교한 인력 계획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실제 현장은 정교함과 거리가 멉니다. 최소 3~4명의 전문가가 붙어야 할 'E2E 모델링', '데이터 파이프라인 구축', '내부인력 AI 역량 향상', '서비스 기획'을 'AI 혁신 리더 모십니다'라는 공고 하나로 퉁치려 하거든요. 한 사람에게 전사의 혁신을 맡긴단 얘긴데 볼 때마다 '이게 혼자 가능한 일인가' 싶습니다.
앞서 언급한 설문조사 결과는 기업의 속내를 더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기업들은 채용의 가장 큰 애로사항으로 '숙련 인재 부족'(27.4%)과 '높은 급여 기대'(25.3%)를 동시에 꼽았습니다. 달리 말하면 '고숙련 인력이 필요한데, 돈은 많이 못 줘'입니다. 일은 몰리고 급여는 많지 않습니다. 남아있을 고숙련 인력이 있을리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이 인력 투자 대신 갈아 넣기를 선택하는 이유는 그래도 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에선 사람이 제일 싸니까요. GPU 서버 비용이나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 구독료는 꼬박꼬박 내면서도, 그 시스템을 움직이는 핵심 두뇌인 사람에게 주는 돈은 아까워하는 모습을 보면 생각이 많아집니다. 이게 아닌데.
조직을 바꾸고 시스템에 투자하는 선택지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듭니다. 그래서 제일 싼 인건비를 선택하고 개인의 헌신으로 단기간에 시스템의 공백을 메우려 들죠.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통할까요.
사람 밖에 없는데 사람에게 투자를 안 하시면
어릴 때부터 지겹게 듣던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자원은 오직 사람뿐이라고. 이젠 그마저도 초저출산과 고령화로 줄어들 일만 남았죠. 여기에 불어닥친 AI 열풍, 얼마 남지 않을 노동 인구의 질적 향상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멋들어진 사옥이나 최신형 서버가 기업의 미래를 담보해주지 않습니다. 혁신은 결국 사람의 머리와 손 끝에서 나옵니다. AI 시대일수록 역설적으로 사람의 가치는 더욱 높아집니다. AI를 만든 주체도, AI를 부려 새로운 세상을 여는 주체도 결국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밖에 없는 나라, 사람에게 투자합시다.
(참고자료)
AI 전문인력 현황과 수급 불균형: 규모, 임금, 이동성 분석
AI 에이전트 시대의 HR 혁신: 투트랙 운영 모델과 전환 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