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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Oct 10. 2019

불행과의 동거

『이제야 언니에게』 최진영



어떤 읽기는 고통스럽다. 그것은 지독한 현실의 묘사에서 기인할 때도 있고,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깊은 무력감 때문일 때도 있고, 외면하고 묻어둔 기억을 헤집어 스스로의 상처를 마주 보게 하기 때문일 때도 있다. 『이제야 언니에게』의 경우 셋 모두였다. 너무 많은 과거가 엉망으로 헤집어진 채 눈앞으로 끌려 나왔다.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 된 고통은 외면할 수도 없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제야의 고통이 끝나기를 기대하며 책장을 넘기다 새벽 네 시를 훌쩍 넘기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고통을 바라보고 위로하는 그의 방식이 아주 조심스러워서 최진영은 참 다정한 작가구나, 생각했다.






2008년 7월 14일. 제야는 그날로 자꾸만 돌아간다. ‘눈과 귀와 뇌조직이 하나씩 더 생겨서, 그 일을 겪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볼 수는 없게 되었다.’(84p)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이해하려는 무용한 가정법은 비난의 화살을 쉬이 생존자에게 돌린다. 고통과 죄의식 속에서 우리는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의심하고 비난하고 혐오한다. 피해자는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물음에 핑계와 변명으로 변질될 해명을 달아야 한다. 성실히 고통을 마주한다면 ‘진짜’ 피해자의 위치를 위협받을 것이고, 침묵으로 일관하면 켕기는 구석이 있는 거라는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다. 뻔한 결과를 알고 있어도 우리는 선택하고 행동해야만 한다. 그것이 피해를 고발한 자의 의무다.


죽어버리고 싶다는 마음도, 죽여 버리고 싶다는 마음도,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일어난 일을 돌이킬 수는 없다. 모순된 감정과 수많은 의문은 살아있는 모든 날에 끈질기게 소용돌이칠 것이다. 어떤 과거는 화인처럼 남아 생각하지 않아도 의식의 밑바닥에 깔린 채 삶의 일부가 된다. 지나가거나 완료되지 않고 ‘기생충처럼, 병균처럼, 생물처럼’(196p) 끈질기게 살아서 삶에 간섭한다. 그런 기억에 ‘너무 오래’라는 건 없다.


제야는 범죄의 피해자이며,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의심한 가해자이고, 그럼에도 살아남은 생존자다. 제야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그는 강하다. 한없이 연약하면서도 믿을 수 없게 강하다. 제야에겐 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 그는 울고 싶지 않고, 강해지고 싶고, 달리고 싶고, 살아내고 싶다. 자신과 타인을 지키고 싶다. 강해지고 싶은 제야는 얼마나 강한가. 그가 가진 생의 의지는 얼마나 단단한가. 그는 자신을 끊임없이 잡아당기는 과거의 어느 날과 어디에서 누구와 있어도 벗어날 수 없는 두려움을 받아들인다. 잊거나 지우는 대신 똑바로 쳐다보며 자신을 직시한다. 그는 아무도 용서하지 않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 틈에서 자신을 기만하지도 않고, 일어났던 일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나를 견디지 않고,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우리는 때로 여자라서, 어려서, 늙어서, 혹은 한국인이라서 약할 것이고 그럼에도 살아가기 때문에 강할 것이다.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지만 어쨌든 살아남을 것이다. ‘우리’의 불행은 ‘나’의 것보다 무겁고, 그 연대는 필연적으로 고통스럽지만 우리는 삶 속에 남아 애쓰는 사람이 될 것이다. 제야는 왜 강해지고 싶었나, 우리는 왜 강해져야만 하나. 끊임없이 의문하면서 강해지지 않아도 괜찮은 날들로 나아갈 것이다.


작가는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고, 삶은 망가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조심스러운 위로는 그가 걱정했던 바와는 달리 박탈감보다는 안도감과 기대를 줬다. 꼼짝도 할 수 없는 날에 제야를 찾아가 문을 두드릴 누군가가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 어느 누군가의 곁에도 제니나 승호나 이모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


아픈 사람들이 혼자 있지 않으면 좋겠다. 함께 해 줄 사람이 없다면 이 책이라도 꼭 껴안고 자면 좋겠다. 그래서 살아남으면 좋겠다. 피해자이자 생존자로 함께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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