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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Jan 01. 2020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은 없다

『자동 피아노』 천희란


아무 데도 발 딛지 못하고 허공을 마구 내지르는 듯한 혼란스럽고 절박한 첫 번째 장을 읽고 나서 예감했다. 이 책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있으리라는 걸.


누구의 것도 아닌 목소리로 쓰인 말들은 죽음에의 갈망과 삶을 향한 애원으로 가득 차 있다. 죽음과 삶을 어떻게 동시에 열망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결코 이 책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더 많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면 좋겠다고, 작가는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닿을 때까지 닿을 수 없는 시커먼 갈망과 산 육체 사이의 괴리에 끝없이 빠져드는 경험은, 뱃속에서부터 숨을 움켜쥐는 죽음보다 더 죽음 같은 감정의 요동은 모르는 편이 낫다. 삶에는 경험하지 않으면 더 좋은 것들이 있다.


'나'는 부정하고 거부하고 외면하고 도망치면서도 죽음의 상념에 발을 얽고 있다. 스스로의 모순을 견디고 있다. 너무 많은 고통에 자신을 길들이면서, 말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 없는 욕구를 누적하고 압축하며 없는 얼굴로 살아가고 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무엇도 신뢰하지 않는 그에게 '참고 있어서 참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하는' 삶은 지긋지긋할 뿐이다.


정신없이 아름다운 죽음이 여기 있다. 그러나 죽음을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한순간 방심하면 홀린 듯 매료되어 버릴 죽음은 애써 외면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순간에 죽음을 생각하면서,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워 그것에서 고개를 돌린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딘다'.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읊조리던 말이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낸다면 그것은 견딜 수 있는 것이 되는가. 하지만 언제고 견딜 수 없어질 것 같은데. 견디고 있던 것이 견딜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은 아주 찰나의 일일 텐데. 견딜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은데.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나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나의 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런 나는 나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의 죽음 또한 나의 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나의 것이 아닌 나의 죽음은 두렵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하는 나는 두렵다. 두려운 것과 두렵지 않은 것이 제멋대로 섞여 무엇도 분간할 수 없게 된다. 모든 것이 두렵다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진다.


지난 어느 날의 일기장을 들춰보는 것 같다고 자주 생각했다. 오랫동안 끊임없이 도망쳤다. 삶으로부터, 그리하여 죽음으로부터. 삶으로부터 도망쳐야 살 수 있었다. 삶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이어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도망친 곳에 삶이 있을까. 또 다른 곳으로의 도망, 도망, 도망이 이어질 뿐이었다. 그러면서 살아있음을 감각하기 위해 끝없이 고통으로, 고립으로 나를 몰았다. 그런 날들을 입 밖에 꺼낸 적은 없다. 그런 건 이해할 수 없는 것이거나 부담스러운 것, 당황스러운 것,  나약한 것, 혹은 의심스러운 것일 터였다. 이미 최대치를 견디고 있었으므로 그런 반응을 더할 수는 없었다. 존재하는 삶은 말해지지 않아서 없는 삶이 되고, 없는 채로 존재했다. 존재하는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준 작가의 용기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이것이 얼마나 큰 부담이었을지, 이야기를 내어놓기가 얼마나 두려웠을지 짐작도 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가 용기를 내어준 덕분에 나의 목소리가 나만의 목소리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듯(착각인지도 모르지만) 나의 이야기도 누군가에겐 이해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꾹꾹 눌러온 말과 압축된 고통을 인적 드문 들판에 풀어놓고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가 보아도 좋고, 아무도 못 보아도 좋다. 아무래도 좋았다.


언젠가부터 삶의 바닥 같았던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나를 발견했다. 그것이 언제부터였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삶의 감각이 달라졌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 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낸 후에 삶은 견디지 않아도 되는 것이 되었다. 발목을 얽고 끌어당기는 죽음을 향한 음험한 중얼거림은 지난날을 돌아보는 일과도 같아서 괴로웠지만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도 생각한다. 아무래도 일기를 들여다볼 용기는 없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을 핑계로 그 시절을 돌아볼 수 있었다. 이젠 돌아보고 싶지 않다. 나는 도망치지 않고, 살아가야 하니까. 대신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존재가 필요할 때는 그가 넘겨준 플레이리스트를 들어보려고 한다. '생생한 연주의 현장은 바로 그 상실의 과정을 목격하는 장소'이고, 상실의 과정은 곧 삶이 된다. 나는 내 안의 모순과 일그러진 갈망의 상실을 목격할 것이다.


작가는  '평생 변하지 않는대도 괜찮다. 그러나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말을 남겼다.

그래,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것도 변한다. 이제는 안다. 그러나 변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도 말할 수 없던 것을 말함으로써 누군가에게 괜찮다는 말을 건네고 싶다. 수없이 스스로에게 건넸던 말을 타인에게서 듣게 되다니, 아주 희망찬 상실을 목격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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