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권일
‘능력주의’를 외치며 당의 대변인을 배틀을 통해 선발하고, 공천 희망자들을 대상으로 ‘공직후보자 기초자격평가’라는 객관식 시험을 도입하기도 한 시험만능주의자 정치인이 있죠. 그가 장애인이나 여성을 대하는 걸 보면 시험 결과가 아닌 다른 것을 이유로 사람을 다르게 대하면 큰일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 사회에는 시험을 잘 보는 것이 곧 능력이고, 그에 따른 차별 대우는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정치인 말고도 꽤 많습니다. 박권일의 <한국의 능력주의>는 그런 능력주의의 기원과 특징을 설명하고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능력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정의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시험이라는 것을 통해 과연 능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지는 더 의문이고, 시험 통과 여부가 오로지 개인의 역량에‘만’ 달린 것이고 그에 따라 불평등하게 대하는 게 맞는지, 그게 공정한 것인지는 더더욱 의문입니다.
능력이라는 걸 가지고 있는 것도,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은 것도, 그 능력으로 사회의 인정을 받게 된 것도 모두 운입니다. 개인의 자질, 가정과 주위의 환경 등은 전적으로 우연히 결정됩니다. 누구도 선택할 수 없죠. 그렇게 주어진 조건은 이미 불평등합니다.
그런데 능력주의는 불평등한 대우를 당연하게 여기도록 함으로써 이를 끊임없이 재생산합니다. 이미 출발선부터 다른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한 불평등까지도 온전히 개인의 탓으로 돌려 “네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야”라고 하는 것이죠. 우연에 우연이 겹쳐 얻은 것에 대한 보상은 과도하고, 무언가를 이루지 못한 사람에게는 패배감과 굴욕감을 안깁니다.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개인의 노력을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을 잘 보는 것이든 돈을 많이 버는 것이든, 운이나 주위의 도움 없이 오직 혼자 힘만으로 이룰 수 있는 건 없으니 무언가를 이루었더라도 타인을 아래로 보지 않기를, 설령 이룬 것이 없어 보이더라도 ‘나는 못났다’고 자학하지 않기를 바라는 겁니다.
결과의 평등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공정하다는 착각>을 쓴 마이클 샌델의 말처럼 실제로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부딪치는 그런 장소들이 마련되어 서로를 의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합니다. 얼마를 벌든, 무슨 일을 하든 사회에 대한 서로의 기여를 인정할 때 건강한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