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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일탈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by 어니스트 정

중1인 딸이 며칠째 잠을 못 잔다. 학교에서 본 무서운 영상 때문인지 혼자 잠드는 것을 힘들어한다. 곁에 있어 달라고 한다. 그렇게 딸의 방바닥에 누워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처음엔 그저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딸이 잠들 때까지의 긴 정적.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시간이 나만의 은밀한 휴식처가 되었다. 이어폰을 끼고 태블릿 PC 화면을 들여다보며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를 틀었다. 4시간짜리 완전판. 며칠에 나누어 보다가 오늘 밤엔 마지막 2시간을 모두 끝냈다.


어둠 속에서 펼쳐지는 슈퍼히어로들의 서사에 빠져들었다. 6개월 만에 제대로 보는 영화였다. 일상에 치여 잊고 있던 몰입의 쾌감이 되살아났다. 딸의 고른 숨소리가 배경음악처럼 들리는 가운데, 나는 완전히 다른 세계 속으로 도망쳤다.


그 맛을 알고 나니 멈출 수가 없었다. 빈 디젤의 블러드샷, 라스트 위치 헌터까지 연달아 봤다. 예전 미드에 빠져 새벽까지 버티던 그 시절의 중독성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모든 가족이 잠든 고요한 시간, 누구의 시선도 요구도 없는 완전한 나만의 시간. 오랜만에 느끼는 자유로움이었다.


새벽 1시, 딸이 깼다. 무서운 꿈을 꿨나 보다. 옆에서 조용히 기다려주니 다시 잠들었다. 그 후에도 영화는 계속되었다. 어쩐지 이 시간이 아까웠다. 딸을 지켜주는 일과 내 욕구를 채우는 일이 기묘하게 병행되는 순간들. 죄책감과 만족감이 뒤섞였지만, 그래도 화면을 끄지 못했다. 새벽 4시 30분까지.


10시에 깨어났을 때 현실이 돌아왔다. 아내의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 "옛날 버릇 또 도졌네. 아이들이 아빠 닮아서 영상만 보잖아." 거침없는 잔소리가 쏟아졌다. 휴가 마지막 날을 핑계 삼아 변명해 봤지만, 나 역시 잘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든다. 언제나 누군가의 아빠, 누군가의 남편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과연 건강한 일일까. 가끔은 그냥 나 자신으로 돌아가하고 싶은 일에 빠져드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딸이 무서워할 때 곁에 있어주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그 시간마저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건 욕심일까.


책임감과 일탈 사이에서 흔들리는 마음. 완벽한 부모가 되려는 압박감 속에서도 가끔은 그냥 한 명의 사람으로 숨 쉬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것이 새벽까지 영화를 보는 소소한 반항이었을지라도 말이다.


딸의 불안이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곁을 지키는 시간들이 나에겐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어주었다. 죄책감 섞인 작은 일탈이지만, 그래도 이런 순간들이 나를 지탱해 주는 것 같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가끔은 나 자신에게도 관대해져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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