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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칼럼] 서울에서 만나는 작은 교토 - 산로

유성엽 셰프의 '산로'

by 미식에 진심


전통 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쉬는 일본의 옛 수도, 교토. 천 년이 넘는 황실의 역사가 머물었던 곳이기에, 기품 있는 미식 문화가 도시 전체에 스며 있다. 히 일본 전통 요리의 정점이라는 가이세키 요리(会席料理)명점들과 유수의 셰프들이 모여 있는 도시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최고의 가이세키 리 명점로 손꼽히는 교토의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 기쿠노이 혼텐(菊乃井本店)에서, 무라타 요시히로 오너셰프를 6년 동안 사사하며 부주방장까지 역임했던 최초의 한국인 셰프가 있다.


유성엽 셰프.


그가 2023년 가을 청담동 화랑거리 인근에 와쇼쿠 레스토랑 <산로>를 오픈했다.


역시는 역시. 오픈 전부터 간의 화제를 모으더니 오픈 6개월 만에 바로 '2025 미쉐린 가이드 선공개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고, 오픈 1년 만에 프랑스 관광청이 주관하는 '2025 라 리스트 1000'에서 '장인정신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현재 국내외 미식 씬에서 큰 주목을 받는 중이다.



교토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매장 입구.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면에 스승인 무라타 요시히로 셰프의 친필 족자 '三露'가 걸려 있다. 그리고 '산로(三露): 세 개의 이슬'이라는 의미를 연상케 하는 박선기 작가의 비즈 작품 - 'An aggregation' 시리즈와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 시리즈에 이어, 오랜 시간을 기다려 공수해온 토 장인의 기물들, 유성엽 셰프가 교토 전역에서 컬렉팅했다는 오브제들이 통일감 있는 흐름으로 눈에 들어온다.


아, 여기는 단순히 식사만 하는 곳이 아니라 예술적인 미식 여정을 향유할 수 있는 곳이겠구나.



코스 1. 쿠젠슈*


자리에 앉으면 환영의 의미로 제피 잎을 곁들인 누룩 아마자케*(甘酒)를 내어준다. 도가 높아 걸쭉하고, 자연스럽고 은은한 단 맛이 돌면서 향긋하다.


*쇼쿠젠슈(しょくぜんしゅ, 食前酒) : 식전주.

*마자케(甘酒, あまざけ, Amazake) : 甘(달다)+酒(술)=직역하면 단 이지만, 사실 술지게미가 아닌 누룩으로 만든 아마자케에는 알콜이 전혀 없다. 미네랄이 풍부해 피로회복에 좋은 감미 음료다.



코스 2. 완무시


보리새우살을 넣은 연근볼과 끄러운 순채를 곁들인 차완무시. 층층이 겹쳐 쌓은 맛과 식감의 아름다운 레이어가 마치 한 폭의 유화 같다. 그저 부드럽고 따뜻하게 혹은 시원하게 코스의 시작을 알리는 용도 정도로만 여겼던 차완무시가 이토록 운치 있고 여운이 다니.



코스 3. 사키즈케*


교토 스미소를 사용한 호타루이까 누타아에*, 다진 오크라 튀김, 씨앗 튀김을 하귤 위에 올렸다. 다채로운 맛, 향, 식감, 색감의 조합이 본격적인 식사를 위한 오감을 자극하기에 할 나위 없다.

입 안에 침이 고이게 하는 산미가 매력적이여서 사케 뿐 아니라 샴페인이나 화이트와인과의 마리아주도 훌륭할 듯.


*사키즈케(先付, さきづけ, Sakizuke): 본격적인 식사 전에 식욕을 돋우는 용도로 먹는 작은 요리.

*누타아에(ぬた和え, ぬたあえ, Nuta-ae): 해산물, 채소 등을 초된장에 무친 요리. 새콤달콤한 감칠맛이 특징.



코스 4. 츠쿠리*


정교하게 호네기리한 하모를 달궈진 숯에 올려 훈연향을 살짝 입힌 , 청량한 스다치와 샬롯을 곁들였다. 탱글하고 쫄깃한 식감의 보리새우 함께. 다시 간장 곁들인 노랑부추와 우메보시 소스는 취향 껏 곁들이면 된다.

접시 위의 리 뿐 아니라, 무림의 고수처럼 우아하면서도 정확하게 호네기리하는 동작, 허리를 숙이고 집중해서 그릇에 담는 섬세한 모습, 교토의 오랜 장인이 만든 소메츠케*까지 모든 공감각적 요소들이 조화웠다. 오감을 모두 만족시키는 종합예술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오츠쿠리(お造り, おつくり, Otsukuri): 사시미의 정중한 표현. 섬세한 손질법이 특징.

*소메츠케(染付, そめつけ, Sometsuke): 청화백자.



코스 5. 이자카나*


긴 시간 졸인 전복, 소면처럼 가고 길게 채 썬 후 살짝만 데쳐 아스파라거스, 북해도산 무라사키 우니, 시소꽃.

동의 연속이였던 요리. 먼저 전복의 완벽한 익힘 정도와 야들야들하면서 부드러운 식감에 감동했고, 입 안에서 씹는 동안 전복향이 비강을 뚫고 으로 뿜어 나올 정도로 진하게 응축된 향미에 다시 한 번 감동했다. 아삭한 스파라거스와의 색다른 조합도 감동이였고.


*시이자카나(強肴, しいざかな, Shiizakana) : 술과 함께 먹기 좋은 강한 풍미의 일품요리. ‘強(しい, 시이)’는 ‘강한’, ‘肴(さかな, 사카나)’는 ‘안주’를 뜻한다.



코스6. 하치자카나*


직화로 겉면만 익혀 부드러우면서 고소한 제주산 벤자리돔, 새콤한 폰즈, 바삭한 마늘칩, 갓 볶아 고소한 내음이 진동하는 깨, 향긋한 루꼴라와 적시소.

꼬치에 끼운 생선을 손으로 무심한 듯 시크하게 직화로 쓱쓱 구웠 뿐인데, 익힘 정도가 랍도록 섬하고 정교했다.


*하치자카나(鉢肴,はちざかな, Hachizakana) : '鉢(はち, 하치)'는 큰 그릇, '肴(さかな, 사카나)'는 안주 또는 반찬. 통상 생선구이, 육류 요리 등 주요리를 말한다.



코스7. 완모노*


완두콩 스리가나시*에 담백한 백옥돔 튀김, 파 소스, 바삭한 생 토란대를 곁들였다. 인공적이거나 직관적인 감칠맛을 완전히 배제하고, 식재료 본연의 맛과 향을 한껏 끌어올려 층층이 쌓은 스타일이다. 자연스럽고 은은한 향미에 부드러운 식감과 적절한 온도감까지 더해지니, 먹으면서 속이 점점 더 편안하게 풀어지는 느낌. 이런 음식을 매일 먹으면 건강해질 것만 다.


*완모노(椀物,わんもの, Wanmono) : 뚜껑이 있는 그릇(椀)에 담은 국물 요리.

*스리나가시(擂り流し,すりながし, Surinagashi) : 채소나 해산물을 갈아 만든 일본식 국물 요리.



코스8. 야키모노*


직화로 구운 장어와 영콘. 장어엔 머위대를 곁들였다.


*야키모노(燒物, 焼き物, やきもの, Yakimono) : 그릴이나 직화 운 요리.



코스9. 스리나가시


클렌저 개념의 양파수프. 은은하면서도 여운이 깊은 풍미와 공기층을 한껏 머금은 부드러운 질감이 척 근사했다. 위에 살짝 뿌린 애플민트와 후추 외에는 감칠맛이나 점도를 위한 부재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양파와 소금 단 두 가지 재료만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 정도다.

'Simple is the best'.



코스10. 시이자카나


충북 음성산 미경산 한우, 제피꽃, 제피열매, 우엉채.



코스11. 쿠지*


사쿠라에비 솥밥은 마른 관자와 새우를 삶은 물로 밥을 지은 후, 야마자키 12년산 위스키를 뿌려 향을 더했다. 켜켜이 쌓여 있는 다채로운 향들이 요롭고 풍성하다. 백옥돔 달걀탕과 찬(샐러리, 버섯, 콩, 멸치, 벳다라즈께 등)도 보기엔 심플해보이지만 완성도와 깊이가 상당하다.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손길과 내공이 느껴지는, 은하고 고급스러운 맛이다.


*쇼쿠지(食事, しょくじ, Shokuji) : 식사



코스12. 후식


제주 망고 레를 곁들인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과 교토 반차. '물'에 진심인 이라 차 맛도 남다르다.


* '물'에 진심인 유성엽 셰프 : 와쇼쿠 요리의 기본인 다시를 위해, 오픈 전 미츠비시 케미칼에 '교토의 물과 비슷하게 바꿔주는 연수기 필터'부터 특별 주문 제작했을 정도. 다시 뿐 아니라 차와 커피와 물의 상관 관계도 끊임 없이 연구 중이다.



교토의 숨결과 계절의 흐름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곳, 산로.


최상의 제철 식재료를 선별하여 원물 자체의 맛과 향을 예술적으로 끌어올린 산로의 요리들은 매력을 한껏 품고 있으면서도 과하게 드러내지 않다. 래서 더욱 더 깊고 긴 여운을 남긴다.





[주변 문화공간]
•글래드스톤 갤러리 @gladstone.gallery
•엘리제레 갤러리 @eligeregallery



▪︎인스타그램 : 미식에 진심, 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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