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운 감독의 누아르 영화인 <달콤한 인생>에서 주인공 선우는 조폭 무리의 행동대장으로 두목인 강 사장의 신임을 받다가 뜻하지 않게 그의 심기를 거슬러 살해당할 위협에 놓인다. 강 사장을 위해 '개처럼 일해온' 선우는 그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부하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마침내 그 앞에 선다. 그리고 묻는다. "저한테 왜 그랬어요?" 강 사장은 이렇게 답한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그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선우는 그를 총으로 쏴 죽인다.
시국이 흉흉하다. 대기를 가득 채운 먼지처럼 위험하고 위태로운 생각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한 대통령, 반국가 세력으로부터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법원을 공격한 폭도, 법치를 회복하기 위해 대통령에 대한 수사와 탄핵을 방해하는 여당 정치인.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그들에게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으면 강 사장처럼 대답할 것만 같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다고. 선우가 강 사장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듯 민주주의자는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상대방이 말하는 언어가 난생처음 듣는 외국어처럼 들리는 상황은 사회적 관계의 파탄을 의미한다.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나의 의견과 다른 지점을 찾고, 그 간극을 좁히려고 노력할 때 상충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할 수 있다. 이 모든 행위가 불가능할 경우 남는 것은 이해받지 못한 데서 오는 모욕감뿐이다. 이때부터 사회적 관계는 이판사판이 된다.
지금 정세가 그렇다. 대통령 세력이 공격하는 것은 사실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 규칙을 준수하는 사람들, 즉 민주주의자다. 민주주의자 없이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어떤 규칙을 준수하는 행위가 존재하고, 준수하지 않는 자를 처벌함으로써 규칙을 준수하게 하는 행위가 존재해야지만 그 규칙이 작동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점은 대통령 세력의 반민주적 행위는 '민주주의 규칙'이라는 추상적 대상을 공격한 게 아니라 '그 규칙을 준수하는 사람들'이라는 구체적 대상을 공격한 행위라는 것이다. 2024년 12월 3일을 기점으로 대통령 세력은 민주주의자를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
이와 같은 비상 상황에서는 '왜 한국 정치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라는 질문은 실천적으로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오직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하는 데 온 힘을 다해야 한다. 계엄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는 한국 정치의 퇴행 원인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마련하는 일이 유의미했다. 한국 민주주의는 두 가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첫째, 민주적 가치의 위기다. 이태원참사 진상 규명 방해, 채 상병 사망 사건 조사 훼방, 김건희 여사 명품가방 수수 및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혐의 뭉개기, 야당 세력을 겨냥한 검찰권 남용 등은 윤석열 정부가 공권력을 얼마나 엉망으로 행사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둘째, 민주적 제도의 위기다. 윤석열 정부에 의해 민주적 가치가 망가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민주당은 윤석열 정부를 겨냥한 특검법을 연달아 추진하고, 이재명 대표에 대한 검찰과 법원의 결정을 비난하며, 살아 있는 권력에 무딘 언론을 성토했다. 이러한 행위의 동기가 민주적 가치의 훼손을 막기 위한 것이었음에도 민주당이 애초 의도한 바를 달성하지 못하고 정치적 갈등을 격화하는 효과만 낼 뿐이라면, 이는 민주적 제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으로 비판받을 소지가 있었다. 그러나 계엄 사태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민주주의의 적이 또렷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자의 도시와 반민주주의자의 도시로 나뉘었다. 사방에서 뉴스가 쏟아지지만 두 도시의 언어는 조금도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제각기 덩어리를 만든다. 하나의 말이 자기와 가까운 또 다른 말과 연결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말의 덩어리는 점점 커져 거기에 말을 보탠 사람의 눈에는 장엄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의 눈에는 괴이한 구조물이 된다. 상대방의 도시는 자기 앞에 괴이하게 서 있는 낯선 도시다. 반민주주의자는 민주주의자가 대통령의 결정에 굳건하게 반대하는 만큼 그 결정이 옳다고 확신한다. 확신과 확신 사이에 회색지대는 없다. 끝 모를 심연만이 두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다. 따라서 접점을 찾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우리는 물리적 존재로서 가까이 있고, 사회적 존재로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 자기와 다른 도시에 사는 타인을 마주칠 때마다 각자는 서로를 나누는 심연을 대면해야 한다. 대체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한단 말인가? 나를 도저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는 사람과 어울려 살 수밖에 없는 이 상황 말이다.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문제가 개인 취향과 관련된 것이라면 심각해질 이유가 없을 테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인 장애물은 '정치적 문제'다. 정치적 문제의 핵심은 자신의 의지를 상대방에게 강제하는 데 있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를 비판하는 민주주의자는 대통령이 강력히 처벌돼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대통령 지지자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지다. 그는 대통령이 복귀해야 하며, 더 나아가 다시 계엄을 실시해 반국가 세력으로부터 국가를 구해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둘 중 한쪽의 의지가 실현되면 자동적으로 다른 쪽의 의지는 좌절된다. 모든 정치적 문제가 이 지경에 이르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불행하게도 거기에 도달했다. 지금 사태는 힘과 힘이 충돌하고 있는 형국이라서 승패가 선명하게 결정되는 형태로 종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언제 싸워야 할지 아는 일은 중요하다.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 순간이다. 싸워야 할 때는 싸워야 한다. 이 상황에서 타협 또는 숙의를 논하는 것은 순진하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정견을 달리 하는 타자를 시민으로서 적대시하는 행위가 그를 인간으로서 적대시하는 행위로 발전할 가능성이다. 대통령 탄핵에 반대해 분신한 어떤 사람이 끝내 죽었다. 자신의 몸에 견디기 힘든 고통을 끼얹게 만들 정도로 그의 분노는 강력했을 것이다. 그 분노는 그를 필멸적 존재로서 타인이 연민하기 마련인 한 명의 인간이 아닌 극성스러운 대통령 지지자로 죽게 만들었다. 그는 그의 가족에게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었겠지만 민주주의자는 과연 민주주의를 공격하기 위해 죽은 그를 얼마나 진심으로 애도할 수 있는가? 쉽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살기등등한 상태로 법원을 휘저으며 구속영장을 발부한 판사를 찾던 폭도의 마음도 그렇게 차가웠으리라.
한국은 자기가 어떤 의미에서 타인을 모욕했는지 알지 못한 채 모욕을 주는 자와 엄청난 모욕감에 치를 떠는 자로 분열된 사회가 됐다. 카를 슈미트의 말을 빌리면 '적'과 '동지'로 분리된 사회가 된 것이다. 양자가 함께 설 수 있는 규범적 토대가 무너졌다. 현 사태가 일단락된 뒤에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은 오래 지속될 것이다. 인간의 가슴을 잃지 않고 이 지난한 싸움에 지치지 않아야 하는 어려운 과제가 민주주의자 어깨 위에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