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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읕 Sep 28. 2021

무쓸모의 쓸모

김현 <사라짐, 맺힘>

<아이디어 한 문장>
 
비능률적이며 낭비같이 보이는 것들 속에
사람의 삶을 풍요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는 것
(중략)
걸어 다니는 즐거움은
도시의 크기에 압도되어 거의 사라졌으며,
빈둥거리며 게으르게 세계를 바라보는 즐거움은
인위적인 삶의 리듬에 밀려 없어져가고 있다
 
(문학과지성사, 55p)


누구나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하지요.

하지만 모두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지는 못합니다. 


거기에는 개인의 노력이 부족했거나 운이 좋지 않았거나 여러 이유가 있을 텐데요. 그럼에도 저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대개 그 ‘쓸모있음’을 판단하는 잣대를 자신이 아닌 타자에게서 찾으려 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 유명한 E.H.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한 사회의 이념은 그 사회의 지배계급의 이념”이라고 이야기하지요. 지배계급이 재단한 이념이라고 얘기하면 좀 거창한 면이 없지 않지만, 돌이켜보면 저 역시도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길 직간접적으로 강요 받으며 자라왔어요. 저를 포함한 또래 대다수가 어릴 때부터 학원 뺑뺑이를 돌다가 고3이 되면 대학 입시에 올인하고 종국에는 대기업에 들어가려고 애를 쓰거나 공무원 공부에 목을 매었습니다. 친구나 회사 동료들을 둘러봐도 진폭의 차이만 있을 뿐 대개가 엇비슷한 절차를 밟아왔지요. 사회가 원하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말이에요. 


김현의 한 줄은 그래서 더욱 큰 울림을 주는 게 아닐까요? 특히나 요즘처럼 본인의 쓸모를 증명해야 생존할 수 있는 사회에서 김현의 말은 큰 위안이면서도 한편으론 따끔한 질타이기도 합니다. 회사에서 효율성을 앞세우며 쓸모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애면글면하는 제 모습을 문득 발견할 때면 이게 정녕 풍요로운 삶인가, 잘 살고 있는 건가 반성하게 되거든요. 김현의 이 문장을 한 번씩 들춰볼 때마다, 역설적이지만, 저의 행복을 위해서 가끔은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 보자고 다짐하곤 해요.


예전 소련에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라는 20세기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가 있었어요. 젊었을 때 그의 작풍은 꽤나 급진적이었다고 하더군요. 1906년에 상테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소비에트 연방에서 활동한 그에게 이런 급진적인 성향은 미덕이 아니라 도려내야만 하는 반동 기질일 뿐이었죠. 소비에트 입장에서 그의 음악은 부르주아들의 비뚤어진 취향을 만족시켜주는 불온하고 비정치적이며 반인민주의적인 ‘쓸모 없는’ 음악이었던 셈입니다. 


쓸모 있는 음악가로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시대의 강압적 요구에 결국 그는 마지 못해 공산당에 입당하고 말지요. 그가 공산당 입당의 압박을 받으며 1960년에 완성한 <현악 4중주 제8번>의 부제는 ‘파시즘과 전쟁 희생자들을 위해’인데, 여기서의 희생자는 전체주의에 피해를 입은 모든 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실상 본인을 뜻하기도 한다고 해요. 만약 체제가 원하는 ‘쓸모’ 있는 음악이 아니라 본인이 원하는 음악을 자유롭게 이어나갔다면 그의 작품 세계는 얼마나 달랐을지 궁금하면서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 외에도 마라톤 마니아로도 유명해요. 대개 대작가들은 엉덩이로 글을 쓴다고 하는데 그런 면에서 하루키가 글은 안 쓰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달리기를 한다는 건 언뜻 비능률적인데다 낭비로 보이는 구석도 있지요. 그럼에도 하루키는 이 ‘쓸모 없는’ 달리기를 통해 많은 것을 얻었어요. 특히 “아무 것도 생각하기 않”을 권리와 “공백을 획득하기 위”한 시간을 얻었다고 <달리기를 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밝혔지요. 


하루키의 달리기 같이 본업과 다른 일견 시간 낭비처럼 보이는 일이 오히려 삶의 풍요를 선사할 때가 많아요. 아이디어를 뽑아내는 일도 마찬가지에요. 쓸모 있는 아이디어를 뽑으려고 골머리를 싸매기 보다 김현의 말처럼 “비능률적이며 낭비 같이 보이는” 짓들을 할 때, 하루키처럼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일들을 하다 보면 반짝반짝한 아이디어들이 내 머릿속을 똑똑하고 노크할 때가 많았지요.


그래서 저는 자주 이런 생각들을 해요. 그리고 실천해요.


쓸모 없어져 보자.

시를 쓰자. 이걸로 순댓국 한 그릇,

아메리카노   사먹을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그냥 써보자.

졸라맨이면 어떤가, 그림을 그려보자.

친구에게 전화해 아재 개그를 던져보자.

미친놈 소리를 듣더라도 스마트폰을 켜보자.

가나다라마바사 글씨를 반듯하게 써보자.

아무 책이나 펼쳐서 시옷이 들어간 글자를 찾아보자.

창밖에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헤아려 보자.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숨을 참아보자.

무작정 동네 한 바퀴 걸어보자.

쓸모 없는 일을 해보자!


어쩌면 이런 쓸모 없는 짓하기가 쓸모 있는 인간을 원하는 이 시대에서 진짜 쓸모 있게 살아가는 방법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영감 충전 지수(오점만점) : ★★★★
김현의 글은 사유할 거리를 많이 던져줍니다.
보약 먹듯이 꾸준히 들춰보면 어느새 아이디어 체력이 올라가 있는 걸 느끼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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