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 서울대 오면 인생이 풀릴 줄 알았다

그렇게 내 삶의 고삐가 풀리고 있었다.

by stillhungry

나는 강원도에서 태어나, 강원도에서 자랐다.
초등학생 땐 축구에 미쳐 살았다.
학교 끝나면 매일같이 축구공을 찼다.
그냥 평범한, 졸업장에 장래희망으로 축구선수를 적던 남자아이였다.


중학생이 되어도 비슷했다.
학교 끝나면 영어, 수학 학원을 가고,
가끔은 학원도 째고 친구들이랑 피시방, 당구장, 노래방에 갔다.
학교에선 시험 나오는 과목만 열심히 듣고,
비교과 수업 시간엔 자거나 딴짓하기 바빴다.

‘약아빠진’ 학생이었다.


그런데 그런 애들이 또 시험은 잘 본다.

중학교는 전교 7등으로 마무리했다.

‘그냥 일반고 가서 공부 열심히 하면 인서울쯤은 가겠지.’

그게 그때 내 생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랑 비슷한 성적대의 친구가 툭 던졌다.
“너 정도면 특목고나 자사고 가야 되는 거 아냐?”

팔랑귀였던 나는 그 말 한마디에 그대로 넘어갔다.
엄마한테 바로 전화했다.
“나 자사고 갈래.”


아무 준비도 없이,
원서 마감 2주 전에 갑자기 시작했다.
그리고… 붙었다.

붙긴 했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중학교 때 심화 문제조차 제대로 풀어본 적 없던 내가
전국에서 모인 공부 잘하는 애들 사이에 던져졌다.

입학시험 성적은 230명 중 171등.
고1 3월 모의고사 전 과목 4등급.
나름 공부 좀 한다는 얘기 들으며 살았는데,
그게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때 1학년 담임 선생님은 좀 독특하신 분이었다.
학생보다 더 열심히 사셨다.
평일 밤 12시까지 교무실, 주말에도 항상 출근.

그리고 매일 같은 말을 반복하셨다.

“한 번뿐인 인생, 죽어라 공부해라.
그렇게 간 대학이 너희 인생을 바꿔줄 거다.”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니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나도 뭐에 홀린 듯 마음을 먹었다.
‘그래, 3년만 미친 듯이 해보자.

좋은 대학 가면 내 인생은 바뀔 거야.’

그렇게 3년 내내 하루에 4시간 반씩 자며 공부했다.


결국 전교 10등으로 졸업했고, 서울대 공대에 합격했다.

그때 나는 진심으로 믿었다.
이제 내 인생은 폈다고.
이제부턴 탄탄대로라고.
“나는 성공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괴물이라 생각했던 애들보다
더 괴물 같은 애들이 여기 있었다.

진짜 천재들이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똑똑할 수 있지?’ 싶은 애들이 수두룩했다.
나는 그런 친구들 틈에서 매일 생각했다.
‘나는 여기 어떻게 온 거지?’


과제는 똑똑한 영재고, 과고 친구들 걸 베껴서 내고,
시험은 ‘쟤넨 원래 다 배우고 와서 그래.
열심히 해도 못 이겨’ 하며 자기합리화하고,
그냥저냥한 성적, 그냥저냥한 생활을 반복했다.

현실은 불편했지만 애써 외면했다.
‘3년 동안 미친 듯이 공부했으니까,
이제 좀 놀아도 되지 않나.’


그 핑계로 술 마시고, 연애하고, 놀면서 2년을 보냈다.

나는 정말 3년 동안 하나의 목표만 보고 달려왔고,
그 목표를 이룬 순간, 내 안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다음 목표가 없으니까,
노력할 이유도, 방향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멈춰 있었다. 아니 어쩌면 뒤로 밀려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 인생의 고삐가 풀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