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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와 카레 라면

by 가을산 Mar 03. 2025

 겨울 방학에 결혼해서 멀리 살고 있는 큰언니네 집에 놀러갔다. 중학생 때였다.  큰언니는 나에게 관심이 많았지만 중학교 국어 교사로 학기 중에는 바빴다. 나도 바쁘고. 방학이나 되어야 큰언니가 오든 내가 가서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린 조카와 놀며 지내다가 하루는 언니와 친한 선생님 댁을 방문했다. 언니가 나를 동생이라고 소개하자 그 선생님은 이렇게 어린 동생이 있느냐며 놀라워했다. 


 

    점심 때가 되자 그 분이 우리더러 뭘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말만 하면 뭐든 다 해줄 태세였는데 언니는 얘들 라면 좋아하니 라면 끓여주면 돼, 라고 했다. 아이, 어떻게 라면을, 하는 그 분에게 언니가 한사코 우겨서 라면을 먹기로 결정이 났다. 불청객인 주제에 나는 손님으로 가서 라면을 먹나 싶어 조금 서운했다. 손님 접대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모르던 때다. 


   잠시 후 밥상에 나온 라면은 그냥 라면이 아니었다. 노란 카레가 얹힌 카레 라면이었다. 카레라이스도  그리 많이 먹어보지 않은 터에 카레 라면은 생전 처음 접하는 신문물이었다. 해놓은 카레가 있었는지 즉석에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먹음직스러웠다. 젓가락으로 몇 가닥을 들어 올려 보니 샛노란 카레가 묻은 면이 곱슬곱슬, 퍼지지도 않았다. 걸쭉한 국물도 예쁜 노란 색에 카레맛이었다. 라면도 좋아하고 카레도 좋아해서인지 카레 라면이 내 입맛에 딱 맞았다. 정말 맛있어서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 먹었다. 교양과 품위에 신경 쓰는 큰언니가 눈치 주려고 나를 쳐다보고 있을지 몰라 일부러 언니 쪽을 보지 않았다. 맛있게 잘 먹었다는 포만감과 충족감을 마음껏 누리고 싶었다. 


   그 때 먹었던 카레 라면 맛을 잊을 수 없다. 언제 해먹어 봐야지 해놓고 좀처럼 해먹지 못했다. 라면은 거의 항상 있지만 카레는 항상 있는 게 아니라서인지 모른다. 어찌된 일인지 카레가 있을 때는 라면 생각이 안 나고 라면을 먹을 때만 카레 생각이 났다. 그래서 좀체 먹지 못하다가 마침내 그 날이 왔다. 카레가 있는 날에 라면 생각이 난 날이. 혼자 있던 날,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서 카레를 얹어 먹어보았다. 이내 실망했다. 기대했던 맛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카레 라면은 감칠 맛이 났는데 눈 앞에 있는 건 카레 냄새가 나는 라면일 뿐 무언가가 많이 부족한 맛이었다. 


   기억 속의 맛을 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았다. 끓인 라면만 건져 넉넉한 카레 속에 넣어 섞어보기도 하고, 물을 적게 해서 라면을 끓인 다음 카레를 넣고 볶아보기도 했다. 먹을 만하기는 했지만 내가 반한 그 맛은 아니었다. 그러는 동안 시중에 ‘카레 라면’이라는 이름의 라면이 나왔다. 사 먹어 보았다. 더더욱 아니었다. 그 분은 도대체 어떻게 끓였을까? 카레가 특별한 것이었나? 아니면 음악 선생님이라 카레와 물과 라면의 조율을 기가 막히게 잘 했던가? 할 수 있다면 레시피라도 얻고 싶었다.


   큰언니가 펴낸 수필집의 한 대목에 바로 그 선생님이 나왔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 대번에 그 선생님이 끓여준 카레 라면이 떠올랐다. 입에 침까지 고였다. 큰언니에게 레시피를 부탁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수필집을 내고 일 년도 안 되어 큰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카레를 보면 그 카레 라면이 생각났는데 이제는 카레 라면을 처음 맛보게 해준 큰언니가 생각난다. 레시피는 필요없다. 그 선생님을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그 분이 아니라 우리 큰언니다. 어릴 때는 방학 때나 보았지만 십여 년을 한 동네에 살아 언제든지 볼 수 있었던 큰언니는 이제 어디서도 볼 수가 없다. 

일 주일 뒤면 언니의 기일이다. 나이 차이가 많아 엄마같이 나를 챙겨준 큰언니가 눈물겹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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