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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수가없다> 후기

절규인지 변명인지 모를 그 말

by 조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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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수가없다>는 <올드보이>, <아가씨>, <헤어질 결심> 등 걸출한 작품을 남겨 한국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주목받는 감독, 박찬욱의 12번째 장편영화이다.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고, 황금사자상을 수상할지에 대해 많은 귀추가 주목되었으나 아쉽게도 수상은 하지 못했다. 국내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행 공개되었고, 9월 24일 정식으로 개봉했다. 자, 그러면 영화에 대한 소개는 이쯤하고, 영화를 보면서 필자가 받은 느낌을 한 번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물론 줄거리와 결말에 대한 강력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다.



어쩔 수가 없다, No other cho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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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주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나는 나를 위한 모든 것을 가지고 싶다, 공유(公有)가 아닌 점유(占有)만이 내게 즐거움을 준다. 소유가 나의 목표일진대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그만큼 나의 존재가 커지기 때문에, 나는 점점 더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나는 모든 타인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중)


<어쩔수가없다>의 영문 제목은 'no other choice'이다. 이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말로 풀어 쓸 수 있다. 실제로 작중 인물들은 자신이 하는 행동에 대한 변명으로 이런 뉘앙스의 말을 주로 사용한다. '사과나무까지 심었는데, 집을 팔 수는 없다.', '25년간 이 일을 해왔는데, 이제와서 다른 일을 할 수는 없다.'와 같이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다른 선택지는 없는 걸까. 만수(이병헌 분)이 제지 회사에 취업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지금 집에서 사는 것을 포기했다면,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작금의 현대사회에서 그런 선택을 내리는 건 쉽지 않다. 현대사회에서 소유는 곧 자신의 실체를 정의하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다. 즉, 스스로의 소유물을 포기한다는 건 자기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을 버리는 것이고, 사회의 중심에서 점점 멀어진다는 뜻이다. 결국, 내가 가진 것을 빼앗아가려고 하거나 잃게 만들 수 있는 것들은, 나의 존재에 대한 가장 큰 위협으로 해석된다. 그런 의미에서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은, 나와 내 가족의 지위를 지키려는 자들의 간절한 외침임과 동시에, '내가 소유한 것들을 절대 빼앗길 수 없다'는 탐욕에서 태어난 변명이기도 하다.



기계로 수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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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모두가 자기 밖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사물의 생산이라는 한 가지 전능한 목표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목표, 즉 인격의 완벽한 발달, 인간의 완벽한 탄생과 완벽한 성장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수단을 목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사물의 생산만이 중요한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물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를 생산하고, 점점 더 기계처럼 행동하는 인간을 제작한다. 19세기에 노예가 될 위험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로봇이나 자동인형이 될 위험이 있다.

(에리히 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살인을 거듭하던 만수는 점차 감정을 잃어가는 듯하다. 그는 기계처럼, 그리고 기계적으로 획일화된 변명 ― “어쩔 수가 없다” ― 를 되뇌며 죄책감을 지워낸다. 결국 그는 기계 무리의 꼭대기에 선 존재가 된다.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말한다. 감정과 자아를 하나씩 버려가며 오직 생산만을 목표로 하는 만수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등장하는 벌목 기계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가족은 한 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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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하나의 팀이다. 자녀의 입시를 위해 부모와 자식은 2인 3각을 하듯이 함께 움직여야하고, 가장의 취업을 위해서는 아내와 자식의 내조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모든 가족 구성원이 바라보는 방향이 같을까? 그들은 같은 장소에 있고, 같은 난관에 부딪혀 있음에도 서로 조금씩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동상이몽의 상태는 아니었을까? 그들은 네 변이 같은 사각형, 마름모를 통해 사건을 들여다본다. 네 개의 변이 같은 길이여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그 사각형을 통해, 같은 사건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들 개개인의 생각은 다르다.


만수의 아내와 아들은 그의 비밀을 눈치채지만 묵인한다. 그리고 만수가 경쟁자들을 매장한 토양의 위에서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난다. 이는 만수의 악행을 통해 그의 가족이 다시 부를 누리게 된 상황을 암시한다. 그의 악행은 토양 아래 매장되어 점점 썩어갈테지만, 그 위에 있는 나무는 그 사실을 잊은 채 자라날 것이다.


만수가 재취업한 뒤, 딸 리원은 처음으로 첼로를 제대로 연주한다. 하지만 그녀의 음악은 이어폰을 낀 만수에게 닿지 않는다. 이 장면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아버지가 기계처럼 반복하는 노동을 통해 비로소 아이가 창조적 예술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는 아이러니. 둘째, 리원 역시 암호 같은 악보를 해석하는 또 하나의 ‘기계’에 불과하다는 냉혹한 시선이다. 작품 속에서 만수의 자녀들이 그네에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온다. 그네는 앞이나 뒤, 어느 방향으로도 시원하게 뻗어나가지 못한 채,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이는 만수의 자녀들 또한 언젠가 같은 굴레 속으로 되돌아올 운명을 암시하는 장치가 아니었을까.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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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수가없다>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분명 예술적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으로 보인다. 그러나, 박찬욱이라는 예술가의 손을 거쳐 완성된 작품임을 고려하면, 100% 만족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공동경비구역 JSA>, <올드보이>, <헤어질 결심>때 처럼 한국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클라이맥스를 선보이지도 못했고, <친절한 금자씨>와 <아가씨>때 처럼 오래 기억에 남을 명대사를 탄생시키지도 못했으며, <박쥐>에서처럼 연출의 극단에도 다다르지 못했다. 혹자는 이 작품을 보고 박찬욱의 예술적 감각이 퇴보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 개성적인 캐릭터들, 그리고 작품 곳곳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예술적 장치, 이야기 속에서 피어나는 아이러니 등을 돌아보면, 그의 예술성이 퇴보했다는 평가는 지나친 비약이자 과도한 비판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이유는 분명하다. 박찬욱이라는 이름 앞에 기대하게 되는, 모든 것을 압도하는 ‘강렬한 한 방’이 이번 작품에는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참고문헌

-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이미지 출처 : T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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