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 시대 (2)
한식(寒食) : 제환진문으로 일컬어지는 양대 패자 중 한 사람인 진 문공은 파란만장한 삶을 산 대기만성형의 표본이다. 진 문공의 아버지인 진 헌공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태자인 맏아들 신생과 나중에 진 문공이 되는 중이, 그리고 막내인 이오가 그들이었다. 진 헌공은 늘그막에 여융족이라는 오랑캐를 토벌하면서 여희라는 미녀를 얻게 되는데 그녀를 총애하여 해제라는 아들을 또 낳았다. 여희의 꼬드김에 빠진 진 헌공은 해제를 태자로 세우기 위해 세 아들을 핍박하였다. 효심이 깊었던 신생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 자결했지만 중이와 이오는 아버지를 거역하고 진나라를 탈출했다. 기원전 651년, 제 환공이 주도한 규구(葵丘)의 회맹에 참가하려 했던 진 헌공이 중도에 돌아오다가 병사하면서 진나라에서는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궁정 내 반란세력에 의해 해제와 여희가 살해된 후 이오가 매형인 진(秦)나라 목공(穆公)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진압하고 즉위(진 혜공)하였다. 진 혜공은 눈 앞의 이(利)를 위해서는 의(義)를 돌보지 않았던 인물로 덕망이 높은 형 중이의 존재를 부담스럽게 생각해 자객을 보내 암살하려 했다. 현상범 신세가 된 중이는 아버지인 진 헌공에 이어 동생인 진 혜공까지 2대에 걸친 암살 시도를 피해 1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국외를 떠돌면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 기원전 637년, 진 혜공이 병사하자 마침내 기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중이는 진나라로 돌아가 기원전 636년, 62세의 나이로 진 문공으로 즉위하였다. 진 문공은 망명생활 중 풍찬노숙하면서 고락을 함께 했던 측근들을 중용해 푸짐한 포상으로 이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진 문공이 굶주렸을 때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먹여가면서까지 주군을 보살핀 개자추라는 충신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찬밥 신세가 된 개자추는 주위에 서운하다는 말 한 마디 남기지 않고 자신의 노모를 모시고 면산이라는 곳으로 은거해 버렸다. 뒤늦게 개자추의 존재를 기억해 낸 진 문공이 개자추를 찾기 위해 면산을 샅샅이 뒤졌으나 종적을 알 수 없었다. 산에 불을 지르면 나오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라 생각한 진 문공은 사람을 시켜 불을 놓았다. 하지만 개자추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산이 다 타버린 뒤에야 노모를 업은 채 나무를 붙들고 불에 타 숨진 그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존심 강한 개자추의 성정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한 진 문공은 개자추를 기리기 위하여 이 날 하루는 불을 사용하여 데운 음식을 먹지 못하도록 하였다. 중국과 한국에 공동의 명절인 한식(寒食)의 유래이다.
송양지인(宋襄之仁) : 제 환공이 사망한 기원전 643년 이후 제나라 조정은 후계자 싸움으로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이면서 제 환공의 장례식조차 치르지 못하는 혼란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 때 제 환공의 의뢰로 제나라 태자를 맡아 교육하고 있던 곳이 주 왕실이 은나라의 후예들에게 봉한 송나라였다. 제 환공의 사망 당시 송나라의 국군(國君)이었던 송 양공은 다른 제후들과 함께 제나라의 내전에 주도적으로 개입하여 태자를 도와 제 효공으로 즉위하게 하였다. 여기서 자신을 얻은 송 양공은 제 환공에 이은 패자가 되고자 회맹을 시도하였으나, 회맹에 참가했던 또 다른 강자인 초나라 성왕과의 말다툼 끝에 포로로 잡혀 버리는 볼썽 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제후들 간 합의에 의해 풀려나긴 했지만 앙금이 남은 송 양공은 재위 13년인 기원전 638년, 초나라와의 국경 부근인 홍수(泓水)에서 초나라와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초나라의 대군이 선제적으로 공세를 취해 강 건너에 있는 송나라 군대를 치기 위해 도강을 시도하였다. 송나라의 재상이었던 목이는 이 때가 기회라고 보고 송 양공에게 초나라 군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릴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 때 중원을 지배하였던 은나라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던 송 양공은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목이는 도강 이후 전열을 정비하느라 어수선한 상태에 있는 초나라 군에 대한 공격을 다시 요청하였으나, 송 양공은 대열을 이루지 않은 군대에 대한 공격 명령은 인의에 어긋난다며 반대했다. 두번의 공격 기회를 놓친 송나라 군은 마침내 대오를 정비한 초나라 군과의 정면 승부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송 양공 역시 홍수의 전쟁에서 입은 상처가 원인이 되어 죽고 말았는데 사람들은 송 양공의 이런 어리석은 태도를 송 양공의 인의(宋襄之仁)라며 비웃었다. 송양지인은 전란의 시대에 걸맞지 않은 어리석음의 대명사이지만 한편으로는 상대의 약점을 이용하지 않겠다는 우직함으로도 읽을 수 있다. 훗날 맹자 역시 송 양공을 어진 이의 표상이라 칭송하며 춘추오패의 하나로 꼽았다.
불비불명(不飛不鳴) : 초나라 장왕은 제환진문과 함께 춘추오패의 하나로 꼽는데 이견이 없는 인물로 할아버지인 초 성왕, 아버지인 초 목왕의 뒤를 이은 적극적 확장전략으로 초나라 중원 진출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었다. 기원전 614년, 초 목왕의 급서로 어린 나이에 즉위한 초 장왕이 즉위 후 3년 동안 정사는 돌보지 않고 사냥과 주연에만 빠져 충신들은 물리치고 간신배들만 가까이하자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신하들이 늘어났다. 보다 못한 신하 중 한 명이 초 장왕에게 “궁궐 안에 새가 한 마리 있는데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습니다(不飛不鳴). 이 새는 무슨 새입니까?”라고 물었다. 초 장왕이 대답하기를 “그 새는 3년을 날지 않았으나 일단 날개를 펴면 하늘 높이 오를 것이요, 3년을 울지 않았으나 한번 울면 천하를 뒤흔들 것”이라 하였다. 어린 나이에 즉위해 날개에 힘이 붙지 않아 날 수 없는 새와 같았던 초 장왕이 울지도 않고 때를 기다린 것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비로소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초 장왕은 조정의 간신배들을 일거에 척결한 후 현명한 신하들을 중용하여 국정을 일신하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패권국가로서 초나라의 지위를 굳건히 하였다. 초 장왕의 이러한 고사에서 유래한 불비불명이라는 말은 큰 일을 도모하기 위하여 조용히 때를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구정의 무게를 묻다(問鼎) : ‘구정(九鼎)’이라는 솥은 하나라 우왕 때 아홉 지방의 청동을 모아 만든 아홉 개의 솥으로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올릴 때 사용되어 제왕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하나라와 은나라를 거쳐 구정을 넘겨 받은 주나라에서도 구정을 국보로 관리하였다. 주 정왕 원년인 기원전 606년, 또 다른 패자로 등장한 초 장왕이 군사를 이끌고 주나라 도성 인근에 육박하였다. 주 왕실의 친족이자 중신인 왕손만이 초 장왕의 속셈을 알아보기 위하여 찾아가자 초 장왕은 구정을 초나라로 옮기고자 하는데 무게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楚王問鼎). 놀란 왕손만은 구정은 경중과 상관없이 덕이 있어야만 옮길 수 있으나, 아직은 천명이 바뀌지 않았으니 정의 경중을 묻지 말라고 답했다. 이에 초 장왕은 너털웃음과 함께 초나라의 부러진 창 끝만 모아도 구정을 만드는데 어려움이 없으리라는 말을 남기고 철수하였다. 후세에 왕좌를 위협받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구정의 무게를 묻다 또는 문정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곤 하였다.
양두구육(羊頭狗肉) : 춘추 시대는 공자나 맹자를 비롯, 노자 등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친 위대한 사상가들의 시대인 동시에 관중이나 자산(子産 : 춘추 시대 정나라의 재상으로 고대 중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민주적 질서를 옹호한 정치가였다. 청동솥에 형법을 새긴 ‘주형정(鑄刑鼎)’을 제조하여 중국 최초의 성문법을 만든 이로 평가받는다.)과 숙향(叔向 : 진(晉)나라의 재상이며 자산과 거의 동시대의 인물로 자산이 주형정을 제조하자 덕에 의한 다스림이 아니라 법률로 백성을 규제하려 하면 결국에는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충고를 했다.) 등 현명한 재상들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이들과 함께 명재상으로 꼽히는 인물 중 하나로 제나라의 안영(晏嬰)을 들 수 있다. 사마천은 사기 열전에서 관중과 안영의 이야기를 백이와 숙제에 이어 두번째에 배치할 정도로 비중 있게 다뤘다. 열전의 주인공들에 대한 신랄한 비평(사마천은 인물 중심의 사서인 사기의 각 편을 ‘태사공은 말한다(太史公曰).’로 시작하는 자신의 해당 인물에 대한 비평으로 마무리했다.)이 특기인 사마천이 안영에 대해서는 만약 안영이 살아 있다면 그를 위해 채찍을 드는 마부가 되어도 좋으리라고 하면서 드물게 존경의 마음을 드러냈다. 안영은 제나라의 영공과 경공, 장공에 이르기까지 3명의 국군을 섬기면서 검소한 생활태도와 몸을 사리지 않는 직간으로 주위의 존경을 받았다. 기원전 555년, 제 영공이 노나라를 침략하자 진(晉)나라가 노나라를 돕기 위해 송나라 등과 연합하여 제나라 수도 임치로 쳐들어왔다. 중과부적이라 느낀 제 영공이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려 하자 안영이 나서 군주로서 용기가 없음을 직언해 제 영공의 몽진(蒙塵)을 막았다. 때마침 초나라가 연합군의 일원인 정나라를 공격하는 바람에 진나라가 물러나면서 제나라는 임치를 지킬 수 있었다. 제 영공은 평소 시녀들에게 남장을 시켜 놓고 이를 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제 영공의 이런 취미가 밖으로 알려져 제나라의 여인들 사이에 남장이 유행하게 되었다. 제 영공은 이를 듣고 여인들의 남장을 금한다는 명령을 내렸으나 효과가 없었다. 영이 서지 않아 답답해진 제 영공이 안영에게 해결책을 묻자 안영이 대답하였다. “군주께서는 궐내의 여인들에게는 남장을 허용하면서 궐 밖의 여인들에게만 남장을 금하고 계십니다. 이는 곧 소머리를 걸어 놓고 말고기를 파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뜨끔해진 제 영공이 안영의 충고에 따라 궐내에서도 남장을 금하자 여인들의 남장 풍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없어졌다. 안영의 말에서 소머리와 말고기가 양머리(羊頭)와 개고기(狗肉)로 바뀐 것이 양두구육의 유래이다. 겉치레는 멀쩡한데 알고 보면 알맹이는 형편없음을 의미하는 말이 양두구육인데 ‘빛 좋은 개살구’라는 우리 속담과 일맥상통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