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ear Jun 19. 2021

팥빙수와 여름날

사각사각. 어색하게 웃고있는 팬더곰의 머리에 얼음을 넣고 머리위에 있는 손잡이를 세차게 돌려 고운 입자로 갈아낸다. 사르륵 금세 녹아버릴듯한 얼음을 작은 크리스탈 그릇에 담아넣고, 엄마는 한쪽에 팥을, 그리고 한쪽에 빙수용 젤리와 과일과 조그만 찹쌀떡들을 삼등분해서 모양을 맞추어 고명으로 올렸다. 이어서 쫀득한 연유 한 스푼, 우유를 조금 부어 찰박찰박한 국물을 아래 깔아 적당히 촉촉한 빙수를 자그마치 열두 그릇을 뚝딱 만들어 낸 엄마는 커다란 쟁반에 자그마한 빙수들을 가득 담아 조잘거리는 아이들이 가득한 거실로 내어다 주었다. 아이들은 빙수를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해지며 잽싸게 자기 몫의 그릇을 낚아챈다. 나는 괜히 우쭐해진다. 우리집에 빙수도 있다, 하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선심쓰듯 많이 먹어, 먹고 또 더먹어, 라고 말을 보탠다. 아침부터 김밥과 떡볶이, 수박과 자두를 비롯한 각종 과일 그리고 커다란 생일케이크로 어린이의 생일상을 분주히 준비했던 엄마는 별거 아니라는 듯 다시 총총 부엌과 거실을 오가시곤 했다. 여름의 한중간에 위치한 어린이의 생일 풍경은 언제나 팥빙수 가는 소리와 함께였다. 어린이에게는 집에서 엄마와 만들어 먹는 팥빙수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다. 얼음이 녹고 팥국물과 우유가 섞이며 달콤시원한 국물이 되는 순간이 어린이의 입안에 우주를 만들어낸다.


여름방학 중 맞이하는 7월생 어린이의 생일은 동네 친구들과 함께하는 큰 잔치였다. 방학하기 전 초대장을 쓰고 제일 친한 친구들을 초대한다. 같이 놀고 싶은 친구들을 다같이 불러서 맛있는 걸 잔뜩 먹을 수 있는 기회다. 조금 좋아하는 마음이 생긴 남자애에게도 이 핑계로 말을 걸어 보기로 했다. 한 명에게만 보내면 마음을 들킬 것같아 그럭저럭 친하게 지내는 다른 무리도 한번에 초대하는 묘수를 써 본다. 봉투위에 또박또박 이름을 쓰고 건넨다. 그리고 생일 아침이 오면 어린이는 아침 일찍 일어나 생일상을 차리는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며 오늘 생일잔치엔 어떤 음식들이 올라가는지 꼬치꼬치 묻는다. 오늘은 내가 주인공이니까, 뭐든지 내 맘대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들,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음식들. 의기양양 뽐낼 수 있게 만들어준 화룡점정 수제 팥빙수. 호로록 마시던 그 팥 우유맛 여름의 기억. 나에게 생일은 팥빙수였고, 여름의 한복판에서 느낄 수 있는 최정점의 순간이다. 오늘만큼은 모든 순간 나를 위해 존재하기를.


그렇게 살아온 30년 후, 나는 처음으로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의 옆에서 생일을 맞았다.


30살이 되던 날 아침 나는 발리의 리조트에서 눈을 떴다.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던 엄마가 곁에 없는 첫 생일이었다. 특별한 하루를 맞을 것이라고 내심 기대했던 나는, 하루종일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선물은? 내가 좋아하는 건? 뭐가 준비되어 있겠지? 내 옆에서 처음으로 가족이 되어 생일을 함께 보내게 된 사람인걸.


그에게 그날은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냥 외국에서 맞이한 조금 특별한 하루일 뿐. 나에게 여름의 한복판에 정점을 찍는 이날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카드도 선물도 꽃도 케이크도 생일의 주조연이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 아침나절 오늘 내내 아무일도 없을 거란 걸 알게 되었다. 처음엔 괜찮은 줄 알았는데 점점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점심까지 먹고 나니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었다. 오후 4시가 되자 이대로 하루를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침의 미역국으로 시작해 하루종일 나를 생각해주던 엄마가 보고 싶었다. 팥빙수가 너무너무 먹고싶었다.


더 비참하고 슬퍼지기 전에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다. 제일 가보고 싶었던 호텔로 가서 최고급 애프터눈 티 세트를 시켰다. 뭐라도 달콤한것을 먹어야만 했다. 생일이라고 말했더니 종업원은 접시위에 Happy birthday 글씨도 초콜렛으로 정성껏 써서 내왔다. 내 30번째 생일을 제대로 축하해 주는 첫번째 사람이다. 고맙다고 웃었지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애프터눈티 세트를 마시곤 곧장 공항으로 가서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올랐다. 심장이 뾰족한 바늘로 콕콕 찔리는 기분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눈물샘이 터졌다. 내 여름 한복판, 주인공의 순간을 통째로 도둑맞아 버린 것 같다. 내 팥빙수를, 엄마와의 기억을 돌려줘.


기억에서 지우려고 스위치를 끄고 박박 문질러도 자꾸 여름이면 떠오르는, 30세의 생일.






작가의 이전글 송충이 상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