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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iley Sep 18. 2022

《강요배: 카네이션-마음이 몸이 될 때》展을 열며

대구미술관 제21회 이인성미술상 수상자전 전시 기획글 

2020년 9월, 제21회 이인성미술상 수상자로 강요배 작가가 선정이 되었다. 소식을 전하기 위해 처음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던 그때의 전화너머 목소리가 기억난다. 사실 연락이 단번에 닿지 않아 살짝은 조바심이 나고 긴장을 하고 있던 나는 며칠 뒤 주말이 되어서야 다시 걸려온 작가님의 전화를 다급히 받았다. 얼른 이 기쁜 소식을 자세히 전해드리고 싶어 전화를 받자마자 자초지종을 이래저래 설명했으나 선생님의 대답은 "허허, 아이고, 전혀 예상을 못했는데, 거 참 감사합니다."가 전부였다. 이런 저런 질문들을 하실 법 한데 그저 조금 놀란 듯한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 뒤에는 설렘과 기쁨이 분명히 전해져 전화를 끊고 나서도 오랫동안 남았던 여운이 생각난다.

  그로부터 몇 주 후, 강요배 선생님을 처음 작업실에서 뵈었을 때, 그의 마르고 검은 피부와 강렬한 눈빛을 잊을 수 없다. 말이 없음 가운데 읽어 내려가는 생각들이 눈빛에서 반짝였다. 그제서야 처음의 전화통화에서 선생님의 짧았지만 긴 여운을 남겼던 대답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이번 개인전 《강요배: 카네이션-마음이 몸이 될 때》 展은 또 한 번 '강요배'라는 한권의 책 안에서 새로운 챕터를 펼치는 전시이다. 작가는 이인성미술상 수상 이후 주어진 약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본 전시를 위해 지금까지 쌓아온 개념들을 정리하고 발전시키면서도 대부분의 신작을 통해 새로운 변화들을 시도했다.     

    "이런 저런 설명들도 좋지만 처음 느낀 그 느낌들, 그것을 잘 기억하시고 간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작가에게 이번 전시를 관람하는 관람객에게 전하고 싶은 한마디를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다. 2016년 제주도립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했을 당시 작가는 인터뷰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작업의 변천과정에서 그의 그림을 더 해체하고 그럼으로써 음악과 춤, 리듬 같은 것만 남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의 이미지만 차용할 뿐 말이 많지 않은 그림, 담대하고 에센스만 남긴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때부터 염두 해오던 화풍의 변화와 경계의 확장들을 이번 전시에 풀었다.         

 

소리-풍경 Sound-Landscape     

  ‘동백꽃 화가’, ‘바람의 화가’로 불리기도 했던 작가는 이제 바람의 소리를 듣고 담는다. 약 16미터에 달하는 화폭에 광활한 대자연을 그린 작품 <수풍교향(水風交響)>(2021)은 자연의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담은 한 폭의 파노라마 회화이다. 한 눈에 담을 수 없는 작품을 직접 걸음을 옮기며 좌에서 우로 흩어보고 있자면 우리의 공감각을 자극하여 마치 물과 바람의 소리를 들려주는 듯하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품이라 할 만한 본 작품은 500호 캔버스 8개가 모여 하나를 이루었다. 각 8개의 캔버스들은 저마다의 색과 표정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기는 압도적인 사이즈(333x1583cm)의 작품을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게 되면 눈앞에서는 거의 올오버 페인팅(all over painting)에 가까운 형상을 띤다. 특히 <보라 보라 보라>(2017), <쳐라 쳐라>(2021)와 같은 작품들은 더욱이 그렇다. 사다리를 사용하여 대형의 캔버스위에 물감을 휘던지는 작가의 작업 모습을 보면 본인 신체 중 발 끝에서부터 손 끝 까지 최대한의 길이를 활용하여 운동한다. 화폭 위에서 파도치고 바람 부는 대자연의 풍경과 거칠게 만들어내는 붓질의 쉭쉭 소리, 그리고 마치 격렬한 음악을 지휘하는 지휘자의 몸짓을 연상케 하는 작가 온 몸의 움직임이 한 데 어우러져 한곡의 교향곡(symphony)을 완성한다.     

  강요배의 소리, 사운드에 대한 관심은 그의 영상작업 <강요배의 소리풍경>(2021)으로 이어진다. 바람 부는 섬 제주에 살며 작업하는 작가는 작업실 주변의 소소한 나비의 날갯짓부터 태풍 속에서 사정없이 부서지는 바다의 파도까지 사계절의 다채로운 자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의 영상들은 불특정 시공간에서 자연이 주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는 전혀 의도되지 않은 자연 날것의 모습이며 의도 할 수도 없는 모습들인 것이다.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소재로 하는 많은 회화작업들의 배경이 되는 이 풍경들은 정지된 캔버스의 화폭에서 벗어나 이제는 시간성을 가지며 소리와 움직임을 포함한다. 작가가 명명한 작품의 제목인 <강요배의 소리풍경>, 즉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는 소리와 풍경의 합성어로, 음향학이나 건축학에 주로 쓰이며 환경에 의해 변화하는 소리나 환경과 소리의 관계에 대한 개념이다. 하지만 작가의 영상작업은 이보다 조금 더 본질적이고 직설적인 언어로서 사운드와 랜드스케이프의 교합이다. 말 그대로 ‘소리’를 가진 ‘풍경’인 것이다.

  작가는 자연의 소리에 온전히 귀 기울이고 몸의 움직임에 의한 소리에 집중했다. 움직임으로서 소리를 발현하는 그 몸은 자연과 우리네 역사를 마음깊이 가지고 체화된 몸이다. 역사성을 마음속 기저로 하면서 체화된 몸으로 발현될 때의 공감각, 순간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몸의 움직임으로 춤추듯 만들어지는 회화작품에서도 시대의 목소리, 자연의 속삭임,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래서 점차 비정형으로 흘러가는 가운데서도 그의 풍경회화에는 서사적 깊이감을 가지고 있다.       

   

서사에서 형식으로형식에서 내면의 체화로더 나아가 몸으로의 발현     

  제주의 시대발언을 리얼리즘으로 표현했던 민중예술가, 제주의 자연풍광을 본인만의 필체로 표상하는 제주화가. 작가는 이번 개인전을 통해 왜 ‘몸’을 강조할까?

  전시의 부제인 ‘마음이 몸이 될 때’를 들었을 때 자연스레 프랑스의 현상학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몸’개념이 떠올랐다. 퐁티는 기본적으로 몸과 정신은 분리될 수 없으며, 신체를 통해 정신에 이를 수 있고 우리의 의식은 몸속에 들어있는 것으로 본다. 몸은 단순히 정신의 지시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감각력을 지닌 대상이라는 것이다. 철학, 인문학, 언어학 등 다방면으로 학문적 수학을 게을리 하지 않는 작가가 소리와 춤, 기운과 에너지를 언급하며 새로운 작업들에 대해 설명할 때, 이러한 철학적 논의들을 읽으셨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었다.

  작가는 평소 작업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작업실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몇 주, 혹은 며칠 사이에 대형 작업들이 새로이 완성되어 있어 놀랐던 적이 있었다. 이런 경험들을 빌어보면 작가는 연구하고 고민하며 많은 시간을 쏟더라도 상대적으로 캔버스 앞에서 보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순간의 역동적인 기운으로 작업한다는 작가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점차 형상 보다는 기운과 소리에 집중하여 운동감 있는 회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물론 긴 세월 작업해온 강요배의 작업들이 단순히 비정형으로 추상화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작가의 작업들은 시대의 사건들을 사실적 역사화로 서술하기도 하고 자연의 표정들을 회화에, 혹은 산수화를 연상케 하는 형식에 풍경들을 담아내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광범위하게 아우르며 변주한다. 다채롭게 변주하는 작품들에서 일관되게 보이는 것은 어떠한 형상을 띄던 ‘강요배’라는 몸을 통해 발현되었다는 점이다. 특정한 장소와 상황을 표현하지만 형상에만 집중하지 않고 작가의 내면에서 체화 후 발현된 자연풍경은 항상 바람에 흔들리는 리듬감을 가지고 있다. 퐁티가 말하는 회화는 고유한 인식과 관련한 신체를 요청하는 표현적인 공간이다. 그가 세잔에 대해 반추하듯, 신체라는 수단을 통한 수출작업, 즉 회화예술의 힘을 강요배의 작품에서 힘껏 느낄 수 있었다. 작가가 강조하는 ‘체화’, 혹은 ‘육화’를 통해 더 추상적이면서도 풍부한 표현 형식을 지니게 되며 신체를 통해 경험의 주요소들이 현시되는 것이다.     

  특히 작가의 자소상 <섬>(2021)은 시대 위에 자립하여 존재하는 육화, 체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선큰 가든 아래 역사적 함의를 가진 설치작업들 가운데 칠십 년의 세월을 말해주는 굽은 척추와 주름들을 가진 몸이 홀로 기립해 있다. 지금껏 처음으로 작업한 조소라고는 믿기 힘든 작가의 관찰력과 표현은 자아의 실존에 대한 관심을 환기한다. 등신대 크기의 신체를 제작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관찰과 고민을 거듭했을까. 그 관찰은 신체의 모양과 표면의 피부만이 아니라 자아, 스스로의 내면과 마음을 거듭 살펴보고 고민하고 체화하여 우러나온다. 작가와의 대화에서 강요배는 여러 번 자기 존중(self-respect)을 언급했다. 자신을 진정으로 존중하기 위해서는 관심과 관찰을 거듭하여 나를 공감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몸’으로 시간 위에 존재하는 우리는 자기 내면과 모습, 즉 모양과 상태를 가지고 있는 형상학적 몸이며 각자의 서사를 가지고 있다.          

동백꽃에서 카네이션으로     

  전시 제목인 <카네이션>은 인카네이션(incarnation), 즉 성육신의 어원에서 시작되었다. 몸으로, 피와 살로 우리를 낳아주신 부모님에게 카네이션 꽃을 선물하듯 작가의 몸으로, 육신으로 ‘체화’되어 완성된 작업들이다. 이러한 카네이션 이전에 동백꽃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강요배라는 화가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빨간 동백꽃을 떠올릴 것이다. 민중미술 작가로서 강요배는 80년대 <현실과 발언>의 동인으로 활동하였고 고려시대부터 제주 4·3까지 제주지역의 민중 항쟁사를 그린 연작 <민중항쟁사>를 선보이며 리얼리즘 역사화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역사적 인식을 고취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형식의 변화를 추구하지만 줄곧 민중의식의 기반 위에 서 있는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동백꽃이 진 자리에 카네이션을 피웠다.     

  사실 필자는 과거를 잘 알지 못한다. 1980년대의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를 깊이 실감하지 못하고 책으로만 어렴풋 보고 읽은 것이 전부이다. “배고파 못살겠다. 쌀을 달라!” 1964년 10월 1일 오전 10시 반경, 대구부청 앞에서는 여성과 어린이가 중심이 된 시민 1천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빈민들의 식량 요구로 시작된 이 시위는 오후가 되자 삽시간에 숫자가 3~4천명으로 증가했다. 파업노동자들, 학생들, 청년들, 시민 연합이 합세한 것이다. 시위대를 막기 위해 경찰이 발포한 사격으로 인해 최소 24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여기에서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신작 <어느 가을날>과 <산곡(山谷)에서>는 이번 이인성미술상 수상자전을 기념하여 故이인성 화백의 <가을 어느 날>(1934)과 <경주의 산곡에서>(1935) 두 작품을 오마주한 것이다. 작업실을 세 번 째 방문했을 당시, 어느샌가 완성된 두 작품과 함께 책상 위 김상숙의 <10월 항쟁>이라는 책을 펼쳐 도판 하나를 보여주었다. 그 도판은 대구항쟁의 모습들이 담긴 사진기록물로, 당시의 대구부청과 경북도청의 모습이었다. 다양한 사회적 계층들이 민주항쟁에 참여했지만 작가는 특히 대구항쟁의 시작점이 된 빈민의 어린아이와 여인네들에 주목했다. 그들은 어떠한 정치적, 사상적 문제점을 소리치러 나온 것이 아니다. 배가 골아 당장에라도 죽겠다 싶어 어린 아이를 들쳐 업고 거리로 나온 것이다. 이후 작가가 보여준 책을 구매해 바로 펼쳐보며 다른 도판들도 찬찬히 살펴보았다. 24개의 숫자가 붙은 시신들을 보자니 동네에서 뛰놀았을 어린아이들의 얼굴이 선명했다.

  강요배는 이인성 화백의 작품을 오마주하면서 일제통치하에 급격하게 몰려든 근대화의 물살 속에서 서양미술 사조를 마주했던 식민지 예술가 이인성의 비극적인 시대적 상황을 떠올렸을 것이다. 정치적·사회적 혼란의 시대 속에서 고유의 향토색을 추구했던 이인성의 작품을 빌어 고뇌하는 작가 본인의 모습과 함께 대구지역과 우리의 민족주의와 민중의식을 고취시킨다.     

  작가의 지역 역사성에 대한 관심은 선큰 가든에 설치되는 작품들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작가는 경산의 ‘코발트광산 학살사건’을 모티브로 아사천에 푸른 색의 코발트 안료를 사용했다. 이는 ‘코발트(Cobalt)’의 어원에서 나온 ‘혼령’이라는 의미와 함께 대구경북 지역의 장소적 역사성을 연구한 것이다. 또한 작가는 직접 상주 지역의 비단을 사용해 염색 기법을 새로이 연구하여 푸른 쪽빛의 <처음소리-하나ᆞ>, <처음소리-가므> 설치작업을 제작했다.

  그가 작업 안에서 요소를 선택하는 기준 중 하나는 지리적 역사성이다. 다시 한 번 메를로 퐁티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몸이 거주하고 있는 이 세계는 몸이 직접 경험하는 공간이다. 우리의 모든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세계, 즉 사회의 역사성은 나라는 존재가 구성하는 지각장 내에서 체화된 삶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지역과 시대 안에서 두발을 딛고 존재하듯, 강요배의 작품 <코발트>와 비단 설치 작품들, 그 정가운데에는 작가가 오롯이 하나의 섬처럼 서있다.

  작가는 어느 인터뷰 중 민중미술 1세대 작가로서 최근의 민중미술 재조명 분위기에 대한 질문에 대해 “민중미술을 너무 협의로 생각하면 프로파간다, 즉 정치미술이라고 볼 수 있다. 광의로 생각하면 일반 사람들과 이웃들의 삶의 정서, 그들이 살아온 터전을 다루는 것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이 대목은 필자로 하여금 강요배와 메를로 퐁티 개념의 교차점을 떠올리게 했으며 넓은 의미의 민중미술가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속에서 역사적, 시대적 현상학적 시각을 가지고 현실에서 우리의 터전을 일구어 가는 것이다. 강요배는 이러한 현상적 사건들 위에 실존적 주체로서 바로 서있는 ‘자아’를 세우는 힘을 전달한다.  

        

바람부는 섬,     

     “제주에서 산다는 것은 바람 속에 들어서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항상 섬이다 보니 바람이 그치지 않고, 어떤 풍경을 만나더라도 그 바람에 의한 변화, 흔들림, 기세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것들이 그림 속에서 형태만이 아니라 흔들림, 리듬, 그런 음악적인, 소리로 가득 찬 풍경이 되었으면 하는 그런 마음으로 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작가의 인터뷰 중 한 구절이다. 제주라는 섬에서 거주하며 작업하는 화가 강요배는 사람을 모은다. 사람을 끈다는 말이 더 적절하겠다. 넓은 시각으로, 깨어있는 시원한 머리로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는 누구와도 어떠한 주제이든 의견을 주고받으며 대화했다. 마치 무게와 형상이 없지만 부드럽게도 강력하게도 불어오는 바람 같았다. 처음 작업실에서 마주한 대형의 회화작업 앞에서 선뜻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한참을 멀찍이서 바라만 보다 슬금슬금 다가가 감상했던 기억이 난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움직임과 교향을 작가의 말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서라도 특히 소위 말하는 요즘사람들이 강요배 화백을 애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머릿속에 내내 가지고 있었다. 이 글을 써 내려가는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으로는 작가의 진심,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깊은 울림들, 그리고 빠르게 스캔되어 지나치는 넘쳐나는 이미지들 가운데 마음을 확 끄는 진정한 ‘작품’한 점, 이것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네 사람들이 목말라하고 갈구했던 한 숟가락의 단물, 비온 뒤의 소슬바람이지 않았나한다.


대구미술관 학예연구사 이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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