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월 일기
01
대학교를 다닐 때 존경하는 두 교수님께 들은 이야기가 있다.
한 가지는 “너는 뒤에서 따라갈 애는 아니다.”라는 것이었고
두 가지는 “수현이 너는 참 생생하게 살고 있구나”는 말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내가 열심히 살고 있기에 격려의 말을 실어주신 걸까?
멋모르고 좋아했던 것 같다. 통찰 후 정제된 단어들이 뭔가 멋져 보였다.
첫 번째 교수님은 워커홀릭이었고 대단했고 위세를 부리지 않아도 말과 뜻에 권위가 있었다. 나는 그를 따라 살고 싶었다.
두 번째 교수님은 대게 조언해 주시기보다는 내가 세상을 듣고 보고 느낀 것에 대해서 재미나게 잘 들어주셨다.
그리고 너네가 생각한걸 세상에 적용해 보라며 반걸음 등 떠밀어주셨다.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을 보고 파악했을 그들은 무엇을 보고 그런 말을 해주신 걸까?
첫 번째 말은 얼추 이해가 갔다.
줄곧 팀플과 동아리에서 리더의 역할을 해오고 끝내 스튜디오 사장을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아리송했다. 생생하다는 게 뭐지?
잊고 지낼 때도 많았지만 살면서 한 번씩 생각나는 말이었다.
02
안전함에 대해서 또 생각한다. 잘 들어맞는 틀 안에 사는 것이 안전을 보장해 줄까?
동물원은 안전할까? 네모난 상자에 갇힌 사과는 안전할까? 냉장고는 안전할까?
어쩌면 갇힌 것이 안전할지도 모른다. 최소한의 먹이가 보장되고 위협이 제한되니까.
닫힌 병 안에서도 이끼와 식물은 자란다. 제 스스로 습도를 유지하고 새로운 생태계를 만든다.
인간은 밖과 안의 경계를 두고 들락거린다. 집에 안과 밖이 훤히 보이는 창문을 만든다.
우리는 지구라는 행성 안에 갇혀있나 살아있나?
무엇이 안이고 무엇이 바깥인지를 어떻게 정하냐에 따라서 세계의 생김새는 달라진다.
얼마 전 유아매트를 판매하는 사람의 인터뷰를 봤다.
매트의 본질은 뭘까 안전 아닌가?
사실 안전함만을 바란다면 아이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 된다.
그럼 안전이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있나?
그는 “우리는 아이가 잘 넘어질 수 있도록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도와주면서
모험심 있고 세상친화적인 아이로 기르려는 것 같다 “고 말했다.
00
교수님은 아마 나를 그 매트 위 아이라고 본 것 같다.
자꾸 넘어지고 제 스스로 일어나 보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주변의 격려와 도움 그리고 적당한 모험심을 가지고 탐구하려는 생생함
아이를 보면서 느끼는 활기.
그 활기가 보기 좋고 응원하고 싶은 맘에 말해주셨던 것 같다.
집의 목적은 안전이 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옹벽을 짓고 안이 절대 보이지 않도록 창문을 만들지 않으면 된다.
집은 지하로 깊게 토끼굴처럼 파고들면 된다.
터전의 목적은 ‘살아가게 함’이다.
쉼을 도와주고 계절의 지나감을 안전하게 도와주는 것.
그래서 내가 쉬고 나면 밖으로 나갈 힘을 주는 것. 자주성을 부여해 주는 것.
안전함은 가두고 멈춰서 만들어지지 않고, 삶의 충격을 흡수해 주는 것에서 온다.
이전에는 남들보다 뛰어나고 특이하고 유달라야지만 생생하다고 느껴졌다.
내가 나를 멋지다고 느끼는 점과 감도가 너무 높았다.
타인과 반등하는 지점에서만 나를 느꼈다.
“너로 존재해도 괜찮아”라는 말이 상투적으로 느껴졌다.
“아니 그것도 증거가 있어야지 가능하지 “라고 투덜댔다.
그러다가 점점 남들 하는 고민, 남들 가는 직장이라는 주제에 삶이 걸리면서
다들 달리는 트랙에 나 또한 낄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매일 드는 고민도 특별하지 않았고
아이디어라는 것도 결국엔 레퍼런스 버무림처럼 보였다.
이 세상에 아무도 점유하지 않은 땅이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날마다 내가 희미해져 가는 것 같아서 무서웠다.
잡지를 만들면서 그 부분이 참 혼란스러웠다.
결국에는 또 특별한 나만 인정되는 건가?
‘남’에게 휘둘리는 허세 아닌가.
꼭 잡지를 만들어서가 아니라 나는 그 과정을 겪으며 느낀다.
우리들의 집, 상자, 매트는 ‘인정’이라는 것.
그렇구나. 그런 성질이 있구나.
난 여기서 삶을 느끼는구나.
목련이 활짝 피었다. 굿뉴스라는 카페이름에 잘 어울리는 소식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