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집이라니… 왠지 낯설고 어색하다.
아이들이 떠난 자리에는, 이상할 만큼 묵직하고,
다른 한편으론 깃털처럼 가벼운 공기가 동시에 흐르고 있다.
마치 새가 날개를 펼치듯 동쪽과 서쪽, 캘리포니아와
플로리다에서 두 아들은 대학 야구장 마운드 위에 서 있다. 텍사스 우리 집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남아 있다. 남편과 나.
큰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우리는 캐나다로 건너왔다.
아이는 작은 글러브를 끼고 리틀 리그의 마른 흙 위를 달렸다. 야구공이 흙먼지를 가르며 굴러갈 때마다 아이의 웃음은
더 멀리 튀어 오르는 듯했다.
11살이 된 큰아이와 9살이 된 작은아이가 본격적으로 야구를 하겠다고 했을 때, 우리는 다시 짐을 싸 들고 야구의 본고장, 미국 텍사스로 이주했다.
그렇게 흘러온 시간이 10년이다.
그때는 단지 어린아이의 취미였을 뿐이었는데, 그 취미가 곧 삶의 방향이 되고 우리 가족의 여정을 이끌 줄은 미처 몰랐다. 이제 두 아들은 대학 야구 선수로 각자의 길을 걷고,
나는 마침내 이 ‘빈집’의 낯선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아이들이 떠난 집은 한쪽 벽의 그림을 치운 듯 허전하지만
그 허전함은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이기도 하다.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인생의 전환기는 상실과 해방을 동시에 품고 있다”고 말했던가.
자녀의 독립은 부모에게는 상실이자 해방이다.
이제 ‘오직 두 사람’이 다시 하얀 도화지를 마주하고 있다.
흔히들 이 시기를 ‘제2의 신혼’이라 일컫는다. 물론, 지난
시간을 보상받는 달콤한 시간이 아니라, 다시금 서로를 발견해야 하는 시기라는 말이다.
지난 20여 년을 부모로서의 역할에 몰두했다.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고, 경기장으로 아이들을 데려가고,
그들의 성적과 미래를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채웠다.
부모로 살아온 세월은 길고도 강렬했지만,
그 속에서 부부의 존재는 종종 희미해졌다.
결국, 시간이 마치 시간 여행을 한 듯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또렷하게 마주하게 되었다.
자녀를 길러낸 후, 남은 삶을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가는
오롯이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아이들이 채워주던 집의 웃음소리를 잃은 자리에,
우리는 무엇으로 그 공백을 메울 것인가.
아이들의 부재는 결핍만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한 권의 두꺼운 책을 다 읽고 난 뒤,
책갈피를 덮으며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순간과도 같다.
심리학자 다니엘 레빈슨은 인생을 여러 계절로 구분하며,
중년 이후의 삶을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가는 시기’라고 했다. 아이들을 기르느라 멈춰두었던 나의 시간과 나의 열정들이 이제 서서히 깨어나는 듯하다.
집 안이 텅 빈 듯 고요해진 저녁,
남편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신다.
창밖으로 붉게 떨어지는 석양이 천천히 벽을 물들이고,
그 빛 속에서 우리는 두 사람의 그림자를 본다.
오직 두 사람.
이제 집은 텅 빈 공간이 아니라, 우리 부부가 새롭게
채워나가야 할 무대가 되었다. 오직 두 사람으로 남은
이 시간은 결핍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여백이다.
이제부터의 삶을 어떻게 그려나가야 할지 무척 설렌다.
아이들이 마운드에서 새로운 경기의 트랙을 만들어가듯,
우리도 우리 둘만의 새로운 이닝을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설렘이기도 하고 두려움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든 도전은 우리를 더 풍성한 삶으로 이끌어갈 것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