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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세상으로 귀환하다

by 김지향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인생을 세 편의 연극으로 본다면,

첫번째 막은 부모의 보호와 교육으로 채워진다.

그 시절의 우리는 아직 완전한 자아를 갖추지 못한 채,

누군가의 울타리 안에서 지켜지고 길러진다.


두 번째 막은 결혼과 가정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배우자가 되고, 아이들의 부모가 된다.

그 순간부터 나의 삶은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한 헌신’으로 불려진다.

아이의 잠든 얼굴을 보며 희생이란 단어조차 의미를

잃어버리는 시간, 그것이 인생의 두 번째 무대이다.


그러나 모든 연극에는 전환점이 있듯, 인생의 세 번째 막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미지의 빛깔을 띤다.

중년에 이르러 자녀들은 제 길을 찾아 떠나고,

나의 손을 필요로 하던 시간은 점차 줄면서 오롯이 ‘나’

자신으로 남는 순간이 찾아온다. 비로소 묻게 된다.

“나는 진정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칼 융은 “인생의 정오에 이르면 더 이상 태양을 따라가려

하지 말고, 저녁의 빛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말이다.

젊은 날의 빛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회적 성취를 위해 흘렀다면, 이제 저녁의 빛은 내면을 향해 고요히 스며든다. 더 이상 비교나 경쟁이 아닌, ‘온전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진정한 발견이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

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제 세 번째 인생은 외부의 풍경보다 내 마음의 풍경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잊고 지냈던 감각을

되찾는다. 오랫동안 아이와 가족을 위해 미뤄두었던 꿈,

내 안에서 조용히 빛나던 열망이 다시 목소리를 낸다.


빈 둥지의 고요 속에서 느껴지는 상실감, 또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듯한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할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인생의 3막을 시작할 수 있는

진짜 나를 찾는 여정이 아닐까?

상실은 새로운 자유를 낳고, 고독은 창조의 공간을 열어준다.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누군가의 아들·딸, 누군가의 부모라는 이름이 아닌 오직 ‘나 자신’으로 귀향하는 인생.

그것이야말로 세 번째 무대가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큰 선물이다. 인생의 피날레는 거창한 성취가 아니라, ‘온전하게 내 세상’을 살아냈다는 고백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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