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천상병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 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느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
이 시를 읽으며 우리는 시인의 놀라운 선언에 멈칫하게 된다.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 라니!
이 엄청난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세계에서 제일 행복하다’는 말은
객관적일 수도, 논리적일 수도 없지 않은가.
백발의 노인이 된 시인의 언어는 인생 전체를 통과해 온
한 인간의 확신이자 자유의 선언이다.
그가 행복을 정의하는 방식은 놀랍도록 소박하다.
행복을 사회적 성취나 경제적 풍요에서 찾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소박한 일상—
곁에 있는 아내, 이해와 애정을 나누는 동무들, 그리고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자연의 풍경—에서 행복을 발견했다.
그에게 행복이란 외부의 거대한 축적물이 아니라,
이미 내 손안에 있는 사소한 것들을 알아보는 능력이었다.
생활의 걱정이 없고, 배움이 부족하지 않으며,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있고, 아이가 없어 훗날의 걱정이 없고 술 한잔이 늘 함께하고, 무엇보다 ‘하느님이 나의 ‘빽’이라는 믿음이 그를 든든히 지탱한다.
행복을 ‘더 많은 것’에서 찾으려 하는 우리네와 사뭇 다르다.
시인은 삶의 조건들을 줄이고 줄인 끝에,
남은 것을 긍정함으로써 가장 풍성한 행복을 얻었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의 ‘행복의 역설’을 마주하게 된다.
행복이란 결핍을 메우는 데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결핍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삶의 사소한 조건들이 반짝이며 충만해진다.
그렇게 시인은 현대 사회의 무한 경쟁 속에서 끊임없이
‘부족’을 채우려 애쓰는 우리에게 반문하고 있다.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행복이란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천상병의 시는 이 오래된 지혜를 한국적 일상 언어로 풀어낸 증언이다.
그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는 다소 엉뚱한 표현을 통해 가장 심오한 진리를 전하고 있다.
우리는 삶의 사소한 조건들을 ‘행복의 증거’로 불러낼 수
있을까?
불평 대신 고마움으로, 결핍 대신 충만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행복은 거창한 성공이나 타인의 평가가 아니라,
지금 내가 가진 것에 기꺼이 머무를 줄 아는 마음의 태도라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을까?
아! 나도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