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극 예찬

feat. 새뮤얼 베케트 <최악을 향하여>

by 김지향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아! 이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혹은,

“이렇게 되리란 걸 진작에 알았더라면….”

인생은 리허설 없는 연극과도 같다.

그래서 늘 후회와 아쉬움이 남는가 보다.

그것이 우리 존재의 숙명일까.


나는 그 아쉬움을 달래려고 연극을 찾는다.

고독이 스멀스멀 기어 올 때,

마음에 구멍이 난 듯 허전할 때, 나는 극장으로 향한다.

극장에 들어서면 공기부터 다르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이 주는 강도가 있다.

그 강도는 화면으로는 결코 재현되지 않는다.


연극은 대면을 요구한다.

배우와 관객이 같은 공기를 호흡한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결과를 만든다.

배우의 숨결이 관객의 가슴에 닿는 순간,

관객의 가슴도 배우의 호흡과 얽힌다.

그 얽힘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비춘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공감과, 신경과학자들이 주목하는

거울뉴런의 반응 같은 것들이 극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연극은 타인의 마음을 우리 몸에 ‘시연(試演)’하게 하는

장치 인지 모른다.


나는 대학에서 학생들과 희곡을 읽고 캐릭터를 연구한 적이 있다. 한 학기 동안 대본을 붙잡고, 몇 달을 함께 고민한 끝에 무대에 올린 날의 기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울고 웃을 때, 객석의 공기가 일제히 흔들렸다. 순간 나는 연극이 단지 오락이 아니라, 공동체적 치유의 방식임을 실감했다.

이후 내가 번역한 작품들이 대학로의 소극장과

명동의 예술회관에서 배우들의 손을 거쳐 무대화되었을 때, 그 환희는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고대 그리스어 극장‘theatron(θεατρον)‘은 ‘보다’라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즉 ‘보는 자리’라는 뜻이다.

그 자리는 처음부터 관객과 함께였다.

연극은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함’의 예술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비극의 카타르시스도 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관객은 타인의 비극을 보며 자기 안의 정서를 정화한다.

울음과 서걱거리는 숨소리 사이로 마음의 무게가 덜어진다.


오늘날 우리는 영상의 홍수 속에 산다.

알고리즘은 내 취향을 예측하고, 화면은 나의 주의를 붙든다. 편리함 뒤에는 고독이 숨어 있다.

메타버스의 반짝임은 실제의 체온을 대체하지 못한다.

그럴 때 연극은 우리에게 불편한 선물을 준다.

직접 마주하라고. 서로의 눈을 피하지 말라고.

말은 때로 거칠고, 시선은 때로 부담스럽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둔해진 감각을 깨운다.

연극은 의식을 깨우는 경종이다.


셰익스피어가 “All the world’s a stage, And all the men and women merely players (세상은 무대이며 사람들은 잠시 연기하는 배우일 뿐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인생을 연극에 비유하곤 한다.

인생은 무대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연기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관객이다.

다른 이의 연기에 눈물을 흘리고, 다른 이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는다. 연극은 우리로 하여금 타인의 삶을 잠깐 빌려 살아보게 한다. 그 경험이 때로는 삶의 방향을 바꾼다.


여행자 오디세우스의 방랑이 그에게 세계를 가르쳤듯이,

무대 위의 방랑은 우리에게 인간다움을 가르친다.

프로스페로의 폭풍처럼 연극은 삶의 폭풍을 재현한다.

폭풍을 직면하고, 서로의 손을 잡는 장면을 함께 보면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위안을 받는다.

때로는 막이 내려갈 때 관객들이 보내는 박수가 그 무엇보다 진정성을 띨 때가 있다. 박수는 위로의 얼굴일 때가 있다.


연극이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

결코 극적인 기적을 불러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좋은 연극은 북극성처럼 길잡이가 된다.

길을 잃었을 때, 무대에서 본 어떤 얼굴, 들은 어떤 대사가

삶의 방향을 다시 일깨워 준다.

그것은 이성의 설득이 아니라 감정의 작은 두드림이다.

그 충격은 때로 매우 오래간다.


사람들은 흔히 묻는다.

“이 바쁜 세상에 연극을 본다고 무슨 소용이 있나?”

그러나 연극은 우리가 잃어가는 것을 일러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함께 숨 쉬는 것의 중요성,

얼굴을 마주했을 때 생겨나는 연대감을 일러준다.

그것이 오늘을 사는 데 필요한 가장 오래된 기술 아닐까.


삶은 리허설 없는 연극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아쉽다.

그러나 그 아쉬움은 때로 우리를 연극으로 이끈다.

극장에 가면 깨우치게 된다.

서툴러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사소한 연습이 쌓여 결국에는 삶의 중심이 된다는 것을.


아일랜드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산문

<최악을 향하여(1983)>를 떠 올려 본다.


“Ever tried. Ever failed. No matter.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 Samuel Beckett, Worstward Ho (1983)

“언제나 시도했다. 언제나 실패했다. 괜찮다. 다시 시도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나은 방식으로 실패하라.”


이 문장은 연극의 정신이자,

삶을 버티는 우리의 태도와도 닮아 있다.

무대 위에서처럼, 우리는 매일 흔들리지만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나은 방식으로 실패하며,

조금 더 깊어진 사람이 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음악 예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