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문자

빈칸을 채운 건 나였다

by 소소

혼자 영화를 보고 나왔다. 일곱시가 조금 안 된 시각, 하늘은 아직 환했다. 혼자서도 예술영화를 즐기며 잘 논다는 뿌듯함에 취한 채로 맥도날드로 들어갔다. 남편과 광고에서 봤던 신메뉴를 먹고 자랑해야지. 코울슬로와 아이스커피 세트로 정크푸드의 죄책감을 덜어내며, 인스타그램과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차라리 유튜브를 켰으면 더 나았을까. 나는 이내 쓸쓸해졌다. 좀전의 뿌듯했던 마음은 다 먹고 난 햄버거 포장지처럼 구깃구깃해졌다. 휴대폰 화면 속에는 이제야 비로소 따뜻해진 봄날을 저마다 친구나 가족과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한 손에 버거를 들고 먹으면서, 아이가 있는 친구들이 다같이 모여 간 한강 피크닉 사진, 팔로우 중인 인플루언서가 역시 인플루언서인 친구들과 참석한 팝업 행사 사진 등을 넘겨 보았다. 화면 속 여럿이 함께 정다운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맥도날드에 혼자 앉아 있는 내 모습이 급속도로 처량하게 느껴졌다. 나의 '친구 없음'이 새삼 쓰라렸다. 옆 테이블에 앉은 친구 둘의 말소리마저 나를 무겁게 누르는 것 같았다.


느슨한 관계는 몇 있다. 하지만 정말 가까운 친구는 없다. 혼자인 익숙함이 편하고 좋다가도, 가끔은 이렇게 조금 우울해진다. 먼저 다가가볼까 하다가 금세 움츠러든다. 애초에 나를 초대하지 않은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 나는 어쩌면 함께 있을 때 그다지 즐겁지 않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오래된 기억이 자리한다.


고등학생 때였다. 수업이 끝나고 학원을 가기까지 시간이 좀 떴다. 같이 학원을 다녔던 친구들과 나는 은지의 집에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은지는 무리 중에서도 내가 유독 좋아하고 친해지고 싶었던 친구였다. 귀여운 외모와 재미있는 성격 덕에 모두가 은지를 좋아했다. 먼저 출발한 나와 은지만 도착해 다른 친구들을 기다렸다. 내심 설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은지와 나는 공통의 주제가 딱히 없었다. 어색하게 대화를 나누다가 은지가 잠시 화장실을 간다고 휴대폰을 두고 자리를 비웠다. 그 사이, 은지의 화면에 문자메시지가 떠올랐다. 일부러 훔쳐 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작은 액정을 가득 채운 "ㅋ"가 궁금해 그만 앞선 메시지를 읽고 말았다.


- 은지: 애들 아직 안와서 지금 둘만 있음ㅋ

- 민아: 모해? 재미써?

- 은지: 알잖아...ㅋㅋㅋㅋ

- 민아: 웅..ㅋㅋㅋㅋㅋㅋㅋㅋ


대략 이런 문자였다.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이 둘은 내가 재미없는 친구라는 이야기를 이전에 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민아는 나와 같은 방송반이었고, 내가 무리에서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였다. 심장이 쿵, 하고 잠시 떨어졌다가, 이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떨리는 손으로 문자를 읽지 않은 상태로 돌려 놓았다. 은지의 16화음 삼성 폴더폰은 그게 가능한 기종이었다.


휴대폰을 원래 자리에 조심스레 놓아두고, 차오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재빨리 찍어 눌렀다. 은지가 언제 화장실에서 돌아올 지 몰랐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잠시 뒤 은지가 돌아왔고, 나는 아무 일 없었던 듯 태연한 연기를 했다. 곧이어 다른 친구들이 도착했다. 다음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후로 나는 무리에서 겉돌았다. 나를 제외한 다른 친구들끼리는 일상적으로 몇 시간씩 통화를 한다는 걸 알고 충격받은 적도 있다. 내게는 문자조차 자주 오지 않았는데. 자연히 나는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 울타리를 세웠다. 나를 그다지 친하게 생각하지 않는 친구들이라면, 나도 그렇게 친하게 여길 필요가 없었다. 그러면 나도 상처받지 않을 테니까. 서로 합의한 거리감이니까.


이러한 태도는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이어졌다. 나는 그것을 그날의 문자 탓으로 돌렸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사실 생각해보면 은지가 실제로 한 말은 '알잖아' 한 마디 뿐이었다. 그 단어와 뒤에 이어진 ㅋ들 사이의 빈칸은 나의 불안으로 채워졌다. 알잖아, 얘 재미없는 거. 알잖아, 우리 별로 안 친한 거. 알잖아, 내가 얘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어쩌면 별 의미 없었을 말 한마디를 곱씹으며 거기에 강력한 힘을 부여한 건 나였던 것 아닐까. 재미없는 사람일까봐 두려운 마음, 그것으로 쌓아올린 벽 안에 나를 가둔 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결국 내가 울타리 바깥으로 손을 뻗지 못하게 만든 건 어린 시절의 상처가 아닌 자기혐오였다는 사실을, 화창한 어느 봄날 맥도날드 안에서 불현듯 깨달았다. 이렇게 좋은 날에 하필 혼자서 영화를 보고 햄버거를 먹기로 한 것도 나의 결정이었다. 인스타그램을 다시 열고 풀밭 위에서 웃고 있는 은지와 친구들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행복해 보였다. 조용히 사진에 하트를 눌렀다. 맥도날드를 나서니 하늘은 여전히 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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