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1월 5일은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이면 늘 하는 루틴대로, 느지막히 일어나 <출발 비디오 여행>을 보며 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카톡이 왔다. 안녕하세요, 연락처 받은 OOO입니다. 일요일인데 뭐하고 계신가요? 선배 언니를 통해 금요일에 번호를 전달했던 소개팅남이었다. 토요일에 연락을 하고 다음주 정도로 약속을 잡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무 소식이 없길래 다음주에 연락하려나보다 하던 참이었다. 어차피 다음주에 보게 될 텐데 왜 이렇게 일찍 연락했담.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별 생각 없이 솔직하게 <출발 비디오 여행>을 보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자기도 맨날 챙겨보는 프로그램이라며 반가워 하더니, 오늘의 일정을 물었다. 아, 저는 책을 반납할 게 있어서 시청 서울도서관에 가려고요. 몇시쯤에요? 한 네시쯤? 그랬더니 그는 대뜸 그때 시청 앞에서 보자고 했다.
사실 낯을 가리고 마음의 문을 여는 데 오래 걸리는 내게 소개팅이 잘 맞는 방식은 아니었다. 몇십 번쯤 하고 나서야 그나마 요령이 생겨 애프터를 받아낼 수는 있게 되었지만, 실제 인연으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았다. 이번에도 기대는 없었다. 어차피 대체로 주말에 계획이 없으니 사람이라도 만나면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주선자가 제안했을 때,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겠다고 했다. 왠지 어울릴 것 같다는 그 언니의 감만 믿고서.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만나자고 하다니, 뭐 이렇게 당일에 만나자는 사람이 다 있지? 수십 번 소개팅 경력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황당했지만 조금 재미있기도 했다. 어차피 질질 끈다고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빨리 해치워서 나쁠 것도 없지. 꾸밀 겨를도 없이 티에 청바지, 코트를 대강 걸쳐입고 나갔다.
이름만 알고 나갔는데 만나고 보니 그는 나보다 7살이나 많았다. 아, 이번에도 잘되긴 어렵겠구나 싶으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옷도 편하게 입었겠다, 그냥 인생 선배 얘기나 듣다 가야지 생각했다. 갑자기 만나자고 한 것도 웃겼는데 이 사람은 목적지도 없었다. 시청에서 덕수궁 지나 흥국생명 건물 앞까지, 한겨울의 거리를 그냥 얘기하면서 걸었다. 그러다 어딘가는 가야하지 않겠냐 하며 버스를 타고 신촌으로 갔고, 현대백화점 앞에서 내려서 또 산울림 소극장을 거쳐 합정 근방까지 걸어갔다. 정처없이 걷다가 어떤 골목에 이르러서야 그는 나에게 물었다. 이거(백반) 먹을까요, 저거(퓨전 아시안 푸드) 먹을까요? 그의 표정을 보니 전자를 먹고 싶어하는 게 분명했다. 그쯤되니 나도 아무렴 어떠냐 싶었다. 우리는 결국 백반집에 들어갔고, 나는 고등어자반을, 그는 부대찌개를 시켰다.
엄청 춥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겨울은 겨울이었다. 롱부츠를 신은 발이 피곤했다. 나는 이미 잘되고자 하는 마음을 놓은지 오래였고, 대화는 대부분 그가 주도했다. 억지로 성격을 꾸며 노력하지 않으니 마음이 편안했다. 오래 걸은 데다 약간은 겉도는 이야기를 듣고 반응하느라 나의 체력과 사회성 배터리가 슬슬 바닥날 때쯤, 주문한 고등어자반이 나왔다. 달군 철판 위에서 지글거리는 고등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을 우선 한 술 떠넣었다. 당이 퍼지는 걸 느끼며, 윤기 나는 껍질과 함께 생선살을 한 점 집어 먹었다. 기름기를 가득 머금은 고등어의 고소함이 입안에 퍼졌다. 진짜 맛있었다. 너무 맛있어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맛있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나는 주로 들었다. 무슨 이야기들을 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나를 나답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다짐했다는 이야기 하나가 와닿았다. 나를 통제하고 바꾸려 들었던 옛 남자친구가 떠올라, 김 서린 식당 창문에 그가 그림까지 그려가며 하는 설명에 깊이 공감했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의 소개팅에서도 나는 늘 나답지 않게 노력하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보일지를 의식하며, 평소의 나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로 즐거움을 가장했다. 그러나 그런 연기는 오래 유지하기 힘들어서 애프터에서 실패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처음으로 상대 앞에서 꾸미지 않은 나로서 앉아 있었다. 그저 밥이 맛있었고, 인생 선배같은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게 재미있었다.
마음이 편해진 덕이었을까. 예상치 못하게 그가 2차를 권해왔을 때 내심 싫지 않았다. 우리는 근처 칵테일 바로 이동해 다음날 출근은 생각지도 않고 새벽 한 시까지 술을 마셨다. 술값은 내가 내려 했는데 그만 9만 원이 나와 버려 술도 얻어 먹었다. 수십 번 해 본 소개팅 중 가장 기이하고,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을 소개팅이었다. 그렇게 헤어진 후 화요일 밤, 그가 우리 집 앞으로 찾아왔고, 그로부터 1년 반 뒤, 나는 그 일곱 살 많은 남자와 결혼을 했다.
사귀게 된 후에 그에게 물었다. 그때 뭘 보고 내가 마음에 들었냐고. 그는 사실 처음엔 내가 그저 그랬다고 했다. 뚱하니 말도 별로 없고, 도대체 왜 나왔나 생각했다고. 그런데 그러던 애가 고등어 자반을 먹고서 환하게 웃는데, 저 웃음은 한 번 더 봐야겠다 싶더란다. 그래서 조금 더 보기로 마음먹고 2차를 가자고 했다고. 그날 만약에 우리가 퓨전 아시안 푸드를 먹으러 갔다면, 그래서 팟타이나 나시고렝 같은 걸 먹었더라면 결혼까지 할 수 있었을까? 나의 가면을 벗기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게 한 건 어쩌면 그 소박한 고등어자반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고등어 자반에게 감사한다. 어느덧 올해로 10년차 부부가 된 우리. 놀랍게도 그때 그 식당은 아직도 영업 중이다. 올해 결혼 기념일에는 그때 그 고등어 자반을 먹으러 다시 합정을 방문해볼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