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어딘가로 가야 하는 건 아닐지도 몰라
저녁 여섯 시. 사무실에서 신는 납작한 검정 플랫을 책상 아래 한쪽에 가지런히 벗어 두고 신고 왔던 운동화로 갈아 신는다. 가방을 챙겨 건물을 빠져나와, 살짝 남아 있는 낮의 열기 아래 깔린 차가운 공기 냄새를 맡는다. 걷기 딱 좋은 계절이다. 롯데백화점 앞 관광객 인파를 뚫고 웨스틴 조선 호텔 방향으로 꺾는다. 시청 광장이 눈에 들어오면 비로소 퇴근한 기분이 든다. 새파랗게 깔아 놓은 잔디밭 한가운데를 가로지를 땐 잠시나마 상쾌하다. 대한문을 지나 덕수궁 돌담길로 접어드니 벌써 어둑어둑하다. 확실히 해가 많이 짧아졌다. 따뜻한 조명이 깔린 고즈넉한 돌담길을 지나면 거기서부터는 쭉 재미없는 대로. 아현동 언덕배기에서는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린다. 불 꺼진 한복집, 호프집, 방석집들. 발걸음을 재촉해 이대역에 닿으면 그제야 한 번 가슴을 펴고, 자취방이 있는 신촌으로 계속 나아간다.
그렇게 걸으면 퇴근이 한 시간 반도 더 걸렸다. 그래야 잠을 잘 수 있는 날들이었다. 때로 너무 지쳐 버스를 타고 귀가해 버린 날에는 잠시 쉬다가 밤 열 시, 열한 시에도 옷을 주워 입고 밖으로 향했다. 술집 거리를 지나 큰길로 나가 홍대 방향으로 걸었다. 평일 밤에도 북적이는 홍대의 가득한 인파 속에서 한껏 혼자였다. 그렇게 합정역까지 찍고 올 때도 많았다. 아무 생각 없이 귀에 이어폰을 꽂고 터벅터벅, 큰길가를 따라 지하철역에서 지하철역으로.
첫 회사에서 3년 차가 되던 해의 버릇이었다. 나는 한 해운회사의 지점 고객서비스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주 업무는 고객들의 예약을 처리하고 배를 마감하는 일이었는데 전화응대가 많았다. 숫기도 없고 조용한 편인 내게는 고역이었다. 뿐만 아니라 주말이나 명절 등 쉬는 날 전엔 마감이 몰려있어 늘 야근이었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마감을 쳐내는 와중에 전화까지 백여 통 받고 나면 진이 다 빠졌다. 부산항을 오가는 트럭 기사님들의 욕설 섞인 전화를 받는 것도 일상이었다. 업무 자체는 단순했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본사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긴 했다. 일을 잘 배워서 본사로 가면, 신입사원 연수 때 들은 말처럼 현장 경험을 강점으로 삼아 더 중요한 일들을 할 수 있겠지. 그 생각으로 3년을 버텼다. 하지만 나에게 돌아온 건 진급 누락이었다.
매일 자괴감에 시달렸다. 누군가를 만날 수도 없었다. 고작 회사원이 되는 것이 내 인생의 목적이었나? 그때는 그런 비약밖에 할 수 없었다. 이런 생활을 얼마나 오래 해야 할지. 갑갑했지만 대안도 딱히 없었다. 무의미에 질식해 가던 날들, 그나마 걸을 때면 숨통이 트였다. 맞지 않는 가면을 쓰고 하루의 3분의 1을 보내다 다시 나로 돌아오기 위한 충전의 시간이었다. 복잡한 머리를 비워내며, 적극적으로 혼자이던 시간. 어차피 삶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는, 머리로는 알고 있던 사실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 때까지 몇 해를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나는 네 번째 회사에 다니고 있다. 재미라도 찾아보자 하고 움직인 게 벌써 세 번째다. 별 목적 없는 회사원이기는 지금도 마찬가지. 달라진 건 나의 태도다. "가늘고 길고 재미있게." 언젠가 대화 중 남편이 만들어준 나의 인생 모토다. 옆에서 보니 나는 그런 삶을 추구하는 듯 보인다고 했다. 처음엔 너무 멋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곱씹을수록 정이 간다. 이렇게 정의를 내려 버리니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누군가에게 삶이 목적을 향한 여정이라고 한다면 나에게 삶은 산책 그 자체다. 명동에서 신촌까지 하염없이 걸었던 것처럼, 걷기만 하다 끝나더라도 그것조차 내 인생이다. 걸으면서 소소한 재미를 발견하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도 괜찮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