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같은 아들과 거북이딸
새벽에 나오니 훅 차가워진 새벽바람이 분다. 공기에서부터 수능 냄새가 난다. 이상기온이니 뭐니 해도 수능 직전엔 이렇게 추워진다. 롱패딩 꼭꼭 싸매고 엄마가 싸준 수능 도시락 덜렁덜렁 들고 가던 그 날이 생생하다.
나는 살면서 실전에서 긴장하지 않고 잘 본 적이 없다. 실전에 절대로 약한 인간. 그게 바로 나다. 나는 대부분 실전을 말아먹었다. 긴장하면 뇌가 얼고 손가락이 굳는 성격 탓이다. 심지어 실전이 다가오게 되면 스트레스 때문에 소화도 제대로 못하고 잠도 제대로 못자고 원래 갈고닦아온 습관도 엉망진창이 된다. 그래서 시험은 언제나 나에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컨디션에서 치르게 되는 것이었다.
내가 수능을 본 날도 그랬다. 고3 여름이 지나면서부터 제정신으로 지낸 적이 없었다. 그냥 멍하게 일어나서 학교에 가고 기계적으로 문제집을 풀고 멍하게 하교하고 학원갔다가 자습실 갔다가 집에 와서 잤다. 결국 수능 점수는 내가 평소에 받았던 모의고사 점수보다 한참 못 미치는 점수였다.
수시를 넣고, 정시를 넣고 하는 순간 순간 너무나도 우울하고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결국 끝에 끝까지 가서 대학교에 붙었을 때에도 백퍼센트 순수하게 기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좀 더 잘 볼 걸.. 수능 때 긴장을 덜 했으면 몇 문제를 더 맞추지 않았을까. 그럼 이보다 더 잘 보지 않았을까. 1년 더 준비하면 이보다 더 좋은 대학교에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1년 뒤에는 이 긴장과 스트레스를 견디고 더 나은 컨디션을 보여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스트레스에 엄청나게 취약한 인간이구나.
우리 엄마는 평생동안 나에게 단 한 번도 공부하라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어릴 때야 아무 생각 없이 지냈지만, 나중에 크고 난 후에는 나에게 공부로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던 엄마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엄마는 통제욕이 원체 강한 사람으로, 하려면 얼마든지 나를 옥죌 수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나를 압박하지 않음으로써 개복치 같은 나는 오히려 더 끈질기게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인이 된 후에,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는 엄마가 나한테 공부하라 소리 안해서 참 고마운 것 같아. 나 중학교 때만 해도 성적 바닥이었잖아.”
진짜 그랬다. 난 중학교 때 공부를 단 한 순간도 한 적이 없었다. 학교에 가면 오전에 쳐자고, 점심 때 일어나서 수북하게 쌓인 밥을 퍼먹은 다음, 친구들과 복도에서 공 차면서 놀고, 오후가 되면 식곤증으로 또 잤다. 그리고 학교 끝나면 그때부터 또 친구들과 놀았다. 아이돌도 좋아했고, 만화책도 좋아하고 각종 장르 소설 읽는 것도 좋아했다. 그때는 인생에 재미있는 게 너무너무 많았다. 친구들도 다 나같은 애들하고 놀았다. 친구를 만나면 연예인 얘기, 만화 얘기, 소설 이야기만 줄창 했다. 아무도 공부하는 애들이 없었다. 또 중학생이면 친구들 분위기에 잘 휩쓸리는 때였으니까.
한 번은 성적표를 받았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선생님이 반 등수, 전교 등수를 각자에게 비공개로 알려주었다. 나와 친구들은 공부를 못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도 없었기에 다같이 교실 뒤에 모여서 성적을 깠다.
나는 반 전체 35명 중 24등이었다. 내 친구들이 21, 22, 23, 25, 26등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아, 역시 끼리끼리 노는구나. 우리는 다같이 하위권에 옹기종기 줄서 있었다. 그거 보고 웃기다고 깔깔 웃어댔던 그 시절…….
애가 학교에서 그런 성적을 받고오면 엄마로서 화가 날 만도 한데, 우리 엄마는 단 한 번도 나에게 뭐라 한 적이 없었다. 화도 안내고, 공부하라 소리도 안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안하고 끝장나게 놀기만 하면서 중학교 3년을 보내고. 고등학교에 갔다. 그때도 엄마는 공부하라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가서는 그냥 내가 내 밥 빌어먹을 걱정에 공부를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우리 엄마는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공부하라고 혼내지 않았다. 우리 엄마 성격상 속이 뒤집혔을텐데도 한 마디 말을 안 한 것이었다. 어른이 된 후에야 나는 그게 고마운 일이었다는 걸 깨닫고 엄마에게 고마웠다고 말했다. 그러자 엄마가 대답했다.
“아, 그거……. 그냥 네가 돌대가리인줄 알고 공부하라고 안 한 건데.”
“.......?”
엄마 말은 그랬다. 우리 남매가 어렸을 때 오빠가 한글을 한달 만에 뗐다고 했다. 근데 나는 6개월이 걸려서 뗐다고 했다. (아니 근데 한글 떼는 데 6개월이면 평균 정도였다.) 그리고 오빠는 1+1=2인줄 바로 이해했지만, 나는 몇 번을 설명해줘도 그 산수 개념을 이해를 못했다고 했다.
-귤 하나! 사과 하나! 과일 모두 몇개야?
-…. 한 개?
우리 엄마는 그때 직감했다. 아,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딸내미 가게를 내줘야 하는 구나. 그래도 밥벌이는 하고 살게 해줘야지.
그래서 엄마는 애초에 내가 바닥을 기고 있는 성적표를 들고 와도 큰 감흥이 없었던 것이었다. 우리 엄마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애 머리가 나쁜 것도 내 유전자 탓이겠거니,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한 말이 있었다.
“ㅇㅇ야. 너는 거북이야. 토끼와 거북이 알지? 너는 남들이 잘 때도 노력해야 남들 따라갈 수 있단다. 니네 오빠는 토끼야. 그래서 네가 못 따라가는 거야. 넌 머리가 돌이야. 뭐든 새겨야 돼. 새길 정도로 반복해야 돼. 알았지.”
나중에 학교에 가보니, 내가 그정도 돌대가리는 아니었다. 엄마가 이런 말을 할때, 나는 그냥 엄마가 나를 놀리기 위해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근데 엄마는……. 너무나도 진심으로 내가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한참 후에 성인이 되고 엄마에게 “너는 똘때가리라서 뭐라고 잔소리 안한건데?” 라는 말을 듣고서야 그걸 알게되었다.
나를 재촉하지 않은 엄마가 고맙긴 하지만, 그 실체를 알고보니 마냥 고마운……. 느낌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엄마가 오빠에게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하라고 들들 볶고 죽도록 혼내고 집안을 뒤집어 놨던 기억이 났다. 그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나중에 깨달았다. 엄마는 오빠를 기대하고 나를 기대하지 않았구나. 그래서 내가 한 마리의 야생 원숭이처럼 정수리 벅벅 긁고 있어도 허허 웃으면서 뒤로 돈을 모으고 있었던 거구나…….
엄마의 고백을 들은 후 나의 감상은 여러가지가 있었다. 그 중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그럴 줄 알았으면 공부하지 말걸 이라는 생각이었다. 내 인생 망할까봐 고등학교 때 공부하기 시작한 건데, 엄마의 계획이 따로 있는 줄 알았으면 공부 안하고 그냥 엄마 돈으로 자영업할 걸.
두 번째 생각은 자식은 혼내고 잔소리하고 억지로 공부시킨다고 해도 월등하게 나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엄마가 들들 볶은 오빠와 방임한 내가 결국은 비슷한 수준의 대학을 간 걸 보고 깨달았다. 그건 우리 엄마도 똑같이 한 생각이었다. 엄마는 그 이후로 학원 보내고 애 혼내는 부모님들과 만나게 되면 자기 자식들 이야기를 항상 했다. 결국 한 배에서 나오면 머리 수준도 다 비슷하다고.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였다.
마지막 생각? 무슨 일을 하든 역시 부모님 기대는 아예 죽여놓고 시작하는 것이 인생 사는 데 편하다는 점이었다. 내가 재밌게 놀았던 중학교와 대학교 때는 아직도 내 기억 속의 인생의 황금기로 남아있다.
아, 다시 돌아가고 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