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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나를 왜 낳았을까

당신의 최애 아이돌

by 라파

부모는 나를 왜 낳았을까?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내내 내가 했던 고민이었다. 중2병보다 심하다는 대1병에 시달리던 때였다. 대학 입시도 끝나고 정신 없는 첫 학기를 보낸 후 맞이한 긴 여름방학이었다. 학기 중이고 방학 중이고 할 것 없이 한 번도 쉬지 못했던 고등학교와는 달리, 아무도 나를 터치하지 않는 첫 휴식이었다. 그때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 쳐박혀 있던 나에겐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렇게 두달 반을 보내고 깨달았다. 아, 나는 오래 쉬면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구나. 그래서 나는 그 다음 방학부터는 계절학기를 듣고 영어학원에 다녔다. 방학 중에 아무 스케쥴이 없는 기간은 2주 내외로 줄여버렸다.


그렇게 두달 반동안 고민했지만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그 당시에는 찾지 못했다. 그저 쓸데 없는 고민이다, 하고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을 뿐이었다.


몇 년이 흐른 후에야 나는 자연스럽게 그 해답을 찾았다. 사실은 그랬다.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처음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새롭다. 숨쉬는 것도 먹는 것도, 눈앞에서 빙글빙글 도는 모빌도, 단순한 모양의 나무 블럭도. 그런 것들에 지루해질 때 쯤이면 나처럼 다른 작은 인간들이 있는 곳으로 떠난다. 상냥한 보호자가 돌봐주는 환경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먹고 놀고 자고 다시 먹고 놀고 자고. 그게 지루해질 때쯤이면 학교라는 곳으로 이동한다. 또 새로운 환경. 바짝 긴장한 채로 몇년을 지낸다. 거기서 적응할 때쯤 되면 또 새로운 상위 학교로 진학한다. 또 새로운 환경. 몇 번 진학하다보면 성인이 되고. 어느 때가 되면 취업을 하게된다. 그때는 진짜 사회라는 곳에 내던지게 되는 것이다. 그 새로운 환경에서 또 몇년. 적응이라는 걸 하게 된다. 인간은 결국 적응을 했다. 어떤 새로운 환경에라도.


그 때쯤 되면 스스로 깨달았다. 이제는 더 이상 삶에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을. 일어나서 회사가고 일하고 밥먹고 퇴근하고 집에 와서 쉬거나, 아니면 친구 만나서 놀고. 그리고 자고. 일어나고. 회사가고. 일하고. 밥먹고. 퇴근하고. 자고.


이제는 이 세상이라는 곳에서 수십 년이 지나 나름 사는 방법도 구축하고 슬슬 고인물이 되어가는 것이었다. 사는 것에 더 힘든 것도 없고 새로운 자극도 없었다. 기계적으로 일하고 아는 사람 만나고.


하지만 인간은 지루한 것을 절대로 못 참는 존재다.


내가 좋아하는 심리실험이 있다. 버지니아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의 심리학자들이 진행한 실험이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한 명씩 방에 넣는다. 방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고 의자만 하나, 그리고 버튼 하나가 있다. 심리학자는 피실험자를 책도 핸드폰도 없이 맨 몸으로 집어넣고, 안에서 시간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버튼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 “이 버튼은 아무런 기능도 없지만, 누르면 그 손가락에 전기충격이 오면서 약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결과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 안에 가만히 앉아있다가 지루함을 못 참고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전기 충격을 당한다.


놀라운 것은 한 번이 아니고 여러 번 누르는 사람들도 나온다는 점이다. 지루함을 참지 못해 몇 번이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 버튼을 누르는 것이다. 인간은 애초에 생겨먹기를, 지루함보다는 차라리 아픈것을 선택하게끔 만들어졌다.


내가 지켜본 바로는, 인생에 즐거운 취미가 적은 사람들이 결혼을 빨리 한다. 애도 빨리 낳는다. 왜 그럴까? 아기를 낳으면 그 아이를 통해서 세상을 새로 만나는 것 같은 대리 경험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게임을 오래 한 고인물들이 가장 좋아하는 컨텐츠가 뉴비(게임을 새로 시작한 초보자)를 키우는 일인 것처럼. 게임회사는 게으르고, 새로운 컨텐츠는 가뭄에 콩나듯 업데이트된다. 그럼 게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했던 컨텐츠를 반복하는 것밖에 없는데, 올드비들은 뉴비를 통해 그 지루함을 이겨내는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극을 추구한다. 하지만 인간이 한 삼십 년쯤 이 세상에서 살다보면 인생에 새로운 것이 없어진다. 그래서 개고생 할 것을 명백하게 알면서도 그 전기충격 버튼을 누르고 마는 것이다. 뉴비 생성이라는 버튼을.


결론은, 부모는 심심해서 나를 낳았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쉽다. 부모님과 오래 사는 방법? 부모님을 심심하지 않게 만들어주면 됐다. 매일매일 부모님에게 광대짓을 할 필요는 없었다. 기쁘고 즐거운 것도 “심심하지 않게”의 범위에 들어가지만, 꼭 그것만 “심심하지 않게”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부모님의 “성장형 아이돌”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일반적으로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나면 아이들이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육아가 끝나며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부모님에게 끊임없이 나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 어필했다. 대학에 가는 것은 하나의 과정일 뿐. 나는 이 이후에 엄청난 진로 계획이 있다. 대학에 가서는 이렇게 할거고, 방학 때는 어떻게 할거고, 졸업 후에는 어떻게 하고, 취업은 어떻게…


그걸 부모님에게 조금씩 흘렸다. 고등학교 때부터 약 십년 가까운 시간동안 이 난리를 쳤다. 그때는 내 스스로 자신감도 많이 떨어지고 자기 확신이 없었던 때였다. 그래서 난 불안함을 잠재우고자 엄마 아빠를 앉혀놓고 맨날 내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다. 매일매일 말해놓으니 엄마아빠가 스스로 내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


실제로 그게 실행가능성이 있느냐는 크게 상관없다. 부모님에게 그럴듯하게 들리기만 하면 된다. 생판 모르는 아이돌에게도 돈을 쓰고 시간 쓰고 마음을 쓰는데, 하물며 부모님이 나에게 그 정도를 쓰게 하는 건 매우 쉽다. 사람들이 처음엔 별 볼 일 없는 성장형 아이돌의 팬이 되는 이유는, 그 아이돌의 성취를 자신의 성취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돌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모님을 내 팬으로 만들기는 아주 쉬웠다.


물론 그렇게 받아먹으면서 매일 변화 없이 살면 안 되었다. 아주 사소한 발전이라도 보여줘야 팬들이 보람을 느낀다. 저번에 토익 점수보다 이번에 100점이 더 올랐어. 이 정도의 사소한 발전이어도 괜찮다. 부모도 사람인데, 자기가 번 돈을 허공에 흩뿌리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면 안 된다. 봉황을 말해놓고 실제로는 닭벼슬만 그려서 보여줘도 되었다.


발전이 없다면 그로 인한 나의 슬픔이라도 공유해야했다. 나는 내가 지금 매일 그날에 그 식이라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우울한지 그걸 이야기했다. 응원하고 있는 아이돌이 매일 슬퍼하면 팬들도 같이 슬픈 법.


중요한 것은 가끔씩 부모님이 성인인 자식이랑 살면서 지루함을 느끼게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이놈을 쫓아내서 내 눈에 안 보이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한다. 부모님은 자식한테 돈낭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기에 부모님이 나에게 쓰고 있는 모든 재정이 낭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십년 가까이 나의 모든 실패와 우울과 괴로움과 고통까지도 모두 부모님에게 쏟아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청난 불효자다. 그런데 뭐, 그때 당시 나는 누군가에게 쏟아내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님의 기분까지 헤아리기에는 내가 너무 힘들었다.


부모님께 미안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뭐 결국은 상관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부모님은 지루함을 참다못해 전기고문이라도 당하기 위해 나를 낳는 것을 선택했기에.

자식으로서 나는 부모님께 지루함이 없는 시간들을 선사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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