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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조토, 기다림의 물결

요리의 도

by 나일주

리조토, 기다림의 물결


이탈리아의 부엌은 언제나 소리를 품고 있다. 마늘을 써는 칼의 리듬, 버터가 녹는 소리, 와인이 증발할 때의 ‘치익’ 하는 숨결. 그 중에서도 가장 고요한 소리를 내는 요리가 있다. 국물이 쌀알을 덮을 때 나는, 거의 들리지 않는 속삭임. “찰칵, 찰칵—.” 그건 리조토의 시간, 기다림의 소리다.




쌀의 나라, 북쪽의 부엌

리조토는 이탈리아의 북부, 포(Po)강 유역의 논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햇볕이 강하지도, 비가 많지도 않은 땅이었다. 하지만 물을 길게 머금는 능력을 가진 평야였다. 르네상스 시대, 아랍을 통해 들어온 쌀이 이 땅의 기후를 만나면서 이탈리아식의 “쌀의 요리”가 시작됐다.


쌀은 처음엔 부자들의 호기심이었으나, 곧 농부와 어부의 일상이 되었다. 그들이 먹은 쌀은 단단했고, 불 위에 오래 있어도 쉽게 퍼지지 않았다. 그 단단함이 바로 리조토의 기초였다.


리조토는 북쪽 사람들의 음식이다. 뜨거운 태양이 아니라, 차가운 안개와 느린 물의 나라에서 태어난 요리다.


조리의 철학 — ‘계속 젓는 요리’

리조토는 손이 많이 드는 요리다. 한 번 불을 켜면, 불을 끌 때까지 쉼이 없다. 쌀이 팬 위에서 버터와 마주하는 순간부터 요리사는 그저 저어야 한다.


국물을 한 국자 붓고 저어준다. 다시 한 국자 붓고, 또 저어준다. 이 단순한 행위가 20분, 30분 이어진다.

리조토는 급한 사람에게 불가능한 요리다. 불의 강도는 중간보다 약해야 하고, 국물은 항상 따뜻해야 한다. 그래서 리조토의 요리사는 불과 물, 손과 시간의 리듬을 모두 알아야 한다.


이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는 손이다. 젓는 행위는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시간과의 대화다.


“너무 세면 끓고, 너무 약하면 식는다.” — 리조토의 시간은 늘 ‘그 사이’를 요구한다.


물의 기술 — 흡수의 미학

파에야가 불로 익는 음식이라면, 리조토는 물로 익는 음식이다.

리조토의 쌀은 끊임없이 국물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중심을 조금씩 내어준다. 그 결과, 겉은 부드럽고 속은 단단한 독특한 식감이 만들어진다. 이 미묘한 경계가 바로 리조토의 핵심이다.


물이 쌀을 삼키는 게 아니라, 쌀이 물을 끌어안는 것 — 이것이 리조토의 조리 구조다.

그래서 이탈리아 사람들은 리조토를 ‘흡수의 요리(la cucina dell’assorbimento)’라 부른다.


삶의 지혜도 이와 같다. 세상을 바꾸려 하기보다, 세상을 흡수하는 일.


재료의 질서 — 최소의 구성, 최대의 조화

리조토는 겉으로 보기엔 단순하다. 쌀, 육수, 버터, 파르메산 치즈, 그리고 향을 맡게 하는 약간의 와인. 하지만 이 단순함이야말로 완벽한 질서다.


한 가지 재료라도 과하거나 모자라면 균형이 무너진다. 리조토는 화려하지 않다. 대신 ‘적당함’이라는 미덕을 지녔다.


이탈리아의 철학자들은 이를 “la misura”라 부른다 — 측정된 삶, 절제된 아름다움. 리조토는 바로 그 la misura의 부엌 버전이다.


기다림의 리듬 — 불완전함의 미학

리조토는 완전히 익지 않는다. 언제나 조금 덜 익은 채로 남는다. 그 덜 익음이 입속에서 마저 익으며 완성이 된다. 이 미묘한 ‘불완전함’이 이탈리아 미학의 핵심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모든 걸 끝내려는 사람은 언제나 불을 꺼버린다. 리조토는 우리에게 말한다. “완벽은 식어버린 맛이다.”


좋은 리조토는 늘 ‘지금 막 익고 있는 상태’다. 그 순간의 온도, 그 덜 익은 리듬이 우리의 하루와 닮아 있다.


여행자가 만나는 리조토

밀라노의 트라토리아(trattoria)에서 여행자는 리조토를 주문한다. 커다란 팬 대신 작은 냄비가 나온다. 주방에서는 나무 주걱이 천천히 움직인다. 한참이 지나야 식탁 위에 놓인다.


그릇에는 황금빛 리조토가 담겨 있다. 사프란 향이 은은하고, 버터의 윤기가 미세하게 빛난다. 숟가락으로 한입 뜨는 순간, 그 부드러움 안에 작은 저항이 느껴진다 — 쌀알의 중심이 아직 살아 있는 감촉.


여행자는 그 미묘한 ‘덜 익음’에 놀란다. 하지만 곧 깨닫는다. 이 요리는 완성이 아니라 과정의 맛임을. 입속에서 천천히 익어가는 시간, 그것이 리조토의 진짜 맛이다.


불과 물의 도(道)

리조토의 도는 단순하다. 불은 멈추지 않고, 물은 조급하지 않다. 두 힘이 서로를 잠식하지 않는 상태 — 그곳에 요리의 조화가 있다.

요리사는 그 사이에서 젓는다. 그의 손은 ‘도구’가 아니라 ‘매개’다. 불과 물, 뜨거움과 차분함이 그 손끝을 통해 하나가 된다.그것은 곧 인간의 삶의 은유다. 우리는 언제나 불과 물 사이에서 살고, 끓어오름과 식음 사이에서 자신을 조절해야 한다.




삶을 저어가는 기술

리조토는 단순히 한 끼의 음식이 아니다. 그건 인내의 기술이자, 리듬의 훈련이다.

불을 너무 세게 하지 말고, 손을 멈추지 말라. 물을 한 번에 붓지 말고, 조금씩, 반복하라. 이 지루하고 세밀한 과정 속에 리조토는 빛난다.


“인생의 맛은 불완전한 순간에 있다. 저으며 기다려라. 그러면 언젠가 그 맛이 온다.”


리조토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어떻게 저어가고 있는가?”


불과 물, 손과 시간의 춤 속에서 삶의 농도는 서서히 익어간다. 그 부드럽고 단단한 한 그릇이, 오늘의 ‘요리의 도’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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