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물 한잔

by 스누즈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순조로운 운행 중 흥을 깨는 목소리가 들린다. 내비게이션을 잘 보며 가고 있었던 운전자도 갈림길이 나오면 방향을 미리 알려주던 보조석의 이도 뜬금없는 목소리에 긴장을 하게 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어느 갈림길에서 헷갈린 것인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오늘의 우리 집 갈림길은 '단지 물 한 잔'이었다. 저녁을 다 먹은 남편은 둘째 아이에게 물 한 잔을 떠달라고 시킨다. 둘째는 평소 애교 섞인 투정을 부리면서도 아빠 말을 잘 따라던 아이였다. 티격태격 거리면서도 애정이 솟아오르는 부녀 사이였으나 오늘따라 둘째의 투정에는 애교 대신 짜증이 담겨 있었다. 아빠가 먹을 물은 아빠가 따라야 한다는 아이와 너의 말대로라면 학원은 네가 다니는 것이니 나는 이제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아빠. 마른 낙엽에 순식간에 불이 번지듯 가벼운 농담으로 시작된 언쟁은 어느새 서로의 감정까지 건들게 됐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물을 떠 오라고 시키는 아빠와 맞는 말이지만 버릇없는 말투를 사용한 딸. '단지 물 한 잔'이었는데 말이다.



별거 아닌 것들로 이루어진 하루다. 하늘의 구름, 살랑거리는 찰나의 가을바람, 찌르르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 어깨를 살짝 스쳐가는 낯익은 이들 혹은 낯선 이 그리고 차가운 물 한 잔. 그냥 하루다. 내가, 우리가 매일 겪어내는 평범한 하루 말이다. 툭 내뱉는 말 하나에, 감추지 못한 짜증 한 스푼에 하루를 살아내는 방향이 틀어진다. 예상하지 못했던 길로 들어서버린다. 흠. 그러고 보면 모든 다툼과 논쟁은 어쩌면 티끌 같은 것들 때문일지도. 예를 들면 물 한 잔 같은?



다행히도 우리의 내비게이션에는 새로운 경로탐색이란 고마운 기능이 탑재되어 있다. 내가 탄 차량이 추천한 길을 벗어났더라도 친철한 네비씨는 언제나 새로운 길을 찾아낸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만 믿고 따라오세요"라면서. 그렇게 다시 찾아낸 길로 가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다. 길을 잃었더라도, 먼 길을 돌아오더라도 최종 목적지는 바뀌는 않는다. 우리 집의 두 부녀도 지금 살짝 길을 벗어난 것뿐이다. 눈앞에 갈림길이 나타났고 서로가 원하는 방향이 맞지 않아 잠깐 흐트러졌을 것이다. 이제 엄마 네비가 경로탐색에 들어갈 타이밍이 왔다.


"여보, 그래도 지우가 여보 마음 제일 잘 알아주는 거 알잖아."

"지우야, 네 마음도 알겠어. 아빠가 조금 섭섭해서 그런 거야."



내가 찾은 새로운 경로가 부디 목적지에 잘 도착하게끔 했으면 좋겠다. 나 또한 모든 걸 옳은 길이라 판단할 수 없겠지만 등을 돌린 서로의 방향을 조금씩 돌릴 수는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14년 차 엄마이자 아내이니깐. 아마 우리 집의 네비는 심심치 않게 안내음을 울릴 것이다. 사춘기 첫째와 나. 남편과 나. 첫째와 둘째 사이와 같이 네 명이 만들 수 있는 모든 관계에서 쉴 틈 없이 경로 이탈 경고음을 내뱉을 것이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 생각지 못한 금빛 저녁노을을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잠깐 쉬어갈 큰 느티나무를 발견할 수도 있을 테니깐. 그곳에서 우린 잠깐 놓았던 서로의 손을 꼭 잡을 것이다. 그리고 네비에 찍힌 우리의 목적지는 변함없이 '행복'만을 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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