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프레임을 극복하는 기이한 방법]
데이비드 던(브루스 윌리스)은 아내와 아들을 사랑하고,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풋볼 스타디움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는 것에도 큰 불만은 없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지고, 아내와의 사이도 멀어진다. 그러나 원인을 알지 못한다. 그는 요즘 뉴욕의 경비원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데, 다른 곳으로 가서 환경을 바꿔보면 괜찮아질 거라고 막연히 기대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는 언제부턴가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낀다. 사실 자신이 슬픔을 느끼는 줄도 몰랐다. 어떤 낯선 메시지를 받고서 문득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은 깊은 슬픔이다. 가장 깊고 끈질긴 죄책감은 자신을 온전하게 실현하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일어난다.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그의 슬픔의 정체다.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언브레이커블(Unbreakable)>(2000년)은 두 남자가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데이비드 던과 일라이저 프라이스(새뮤얼 L. 잭슨)는 모든 면에서 정반대의 위치에 있지만, 정체성 혼란을 심하게 겪는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일라이저는 데이비드에게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 알아?(Do you know what the scarist things is?)
자기 존재 이유를 모르는 것이야.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 의미를 모를 때야.(Do not know your place in this world. Do not know why you are here.)”
나에 관한 지식이 없다면, 세상에서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할지 모르고, 왜 여기 있는지 모른다.
마치 단기 기억상실에 걸린 것처럼,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고 하며 늘 혼란 속에 있게 된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이름'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
1-1> '경험'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는 아이러니
1-2> 새로운 프레임을 찾는 방법
2. '대중'의 출현과 프레임 전쟁
3. 프레임을 넘어설 때 슬픔과 죄책감에서 해방된다.
1-1> '경험'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는 아이러니
어슐러 르 귄(Ursula Le Guin)의 SF소설인 <어스시의 마법사(The Wizard of Earthsea)>에는 어떻게 마법사가 되는가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그 훈련 및 교육과정은 꽤 긴데, 그 긴 과정 동안 마법사가 되고자 하는 이는 ‘네이머’라는 스승(the Master Namer)과 함께 대단히 집약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이 스승은 만물의 ‘진정한’ 이름을 다 알고 있다. 진정한 이름은 통상적, 대중적 이름과는 다르다. 만일 당신이 어떤 사물의 진정한 이름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그 사물이 당신에게 행사하는 권력을 도로 빼앗을 수 있다.
- 앤 윌슨 섀프, <중독사회>, 강수돌 옮김, 이상북스, P29 -
<어스시의 마법사>에서는 사물의 이름을 아는 마법사가 가지는 막강한 권능에 관해 말한다.
공전의 히트를 친 <데스노트>라는 만화에는 누군가의 이름을 적으면 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위력을 가진 '데스노트'가 세상에 나온다.
물론 엉뚱한 사람이 희생되지 않도록 대상자의 얼굴과 이름을 동시에 알아야 하며, 몇 가지 규칙과 제약이 있지만, 데스노트를 얻은 자는 신과 같은 힘을 가지게 된다.
두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전제하는 것은 '이름'은 인간 존재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은 이름이 없다. 인간이 개별 동물에게 이름을 붙여준다 해도 그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고 관심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부모로부터 첫 번째 이름을 받는다. 그러나 최초의 이름은 구분 표식일 뿐, 나의 고유성과 관련이 없다. <언브레이커블>의 두 주인공은 '데이비드'나 '일라이저'와 같이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이 될 이름을 찾지 못한다.
진정한 정체성을 주는 이름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아이는 자라면서 여러 가지 사회적 경험을 축적하게 된다. 그러나 경험을 많이 한다고 해서 정체성이 자동적으로 생겨나지는 않는다. 우리는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적절한 틀(프레임)이 필요하다.
구조주의나 인지언어학적 입장을 빌어오지 않더라도, 인간이 경험을 해석하는 가장 큰 틀은 언어임이 틀림없다. 언어를 통해 우주 만물에 이름을 붙이고 비슷한 류(類)를 묶어서 개념화하는 작업은 인간이 자신의 이름과 자리를 찾기 위한 기반이 된다.
이렇게 우리의 경험에 적절한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사회화'의 한 과정이다. 이 과정은 양육과 교육을 통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적절한 사회화 과정에 동화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자신의 경험에 제대로 이름을 붙이지 못하게 되며, 경험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는 아이러니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혼란은 보통 두 가지로 귀결되는 것 같다. 자신의 프레임을 어떻게든 만들거나, 프레임 없이 견디거나.
예를 들어, 세미나에 가면 보통 입구에 놓인 테이블 위에 이름표가 세팅되어 있다. 참석자들은 자신의 이름표를 찾아서 입장한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자신의 이름표는 없다. 이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아무 이름표나 집어 들고 들어갈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입구에서 멈춰서 우왕좌왕할 수도 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수 있다. 사회의 소수자들에게는 친숙한 느낌이다.
사람들과 다른 특이한 조건을 타고난 데이비드와 일라이저는 세상에서 자신에게 맞는 이름표를 찾지 못한다. 일라이저가 자신이 매혹된 이름표를 집어 들고 그에 맞춰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단한다면, 데이비드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서 있다. 일라이저는 그런 데이비드에게 자신이 만든 이름표를 건넨다.
1-2> 새로운 프레임을 찾는 방법
'왜 우리는 자신을 규정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프레임을 통해 자신을 인식할 수밖에 없는가?' 이 문제는 뇌의 작동 방식과 관련된다.
우리 뇌는 프레임을 통해 생각한다. 인지언어학에서는 우리가 미리 짜인 틀, 즉 프레임을 통해 생각하며, 이 프레임은 우리의 신경 시스템이 완전히 뒤바뀌지 않는 한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프레임의 본질은 언어이다. 왜냐하면 뇌는 언어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도구일 뿐 아니라 인식체계로서 기능한다.
프레임은 우리의 뇌가 생각하는 틀이다.
인간은 자신의 인지 장치로부터 독립적으로 ‘세계 내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를 경험할 수 없다. 우리에게 유일한 실재는 뇌와 마음이 자신에게 지각하도록 허용해 주는 실재이다.
우리는 보통의 상태에서는 프레임 밖에서 세상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따라서 '어떤 프레임을 가질 것인가?'가 우리가 실제로 고민할 수 있는 문제이다.
올바른 프레임을 갖지 못했을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중독사회>에서는 '경험에 제대로 이름을 붙이지 못한다면, 그 경험에 특정한 이름을 붙이려고 하는 사회적 시도(Framing)에 저항하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틀은 매우 미묘하고 지속적이어서, 우리는 자신의 삶에 개입이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기 힘들다.
진정한 이름을 찾는 것은 알맞은 프레임을 찾는 것이며, 이 과정이야말로 나의 삶과 힘을 되찾는 출발점이 된다.
프레임은 상징적 이야기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 사회에는 표준적 이야기 구조들이 존재하고, 거기에 속하지 못하는 비주류의 이야기 구조들이 암암리에 숨어있다.
사회에서 '비정상'으로 간주하는 소수자들은 자아를 인식할 표준적 이야기가 없는 사람들이다.
일라이저는 태내에서 이미 팔다리가 골절된 상태로 태어났다. 그는 선천적인 유전적 결함으로 단백질이 합성되지 않아 매우 약한 뼈를 가지고 있다. 그는 54회나 골절을 겪었고, 아이들은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그를 '미스터 글라스'라고 불렀다.
일라이저는 자신과 같은 소수자들의 세계를 영웅이 나오는 액션 만화에서 발견한다. 그는 만화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적 형태로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집트의 벽화처럼 고대 역사 전달 방법의 유일한 끈이라 믿는다. 그리고 이 잃어버린 세계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대담한 계획을 세운다.
일라이저는 자신을 영웅 서사에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악당의 역할과 동일시한다. 특히 몸을 쓰는 것이 아닌 두뇌형 악당에 매료되었다. 이제 그에게는 자신의 우주를 완성시킬 주인공인 선한 영웅이 꼭 필요하다.
데이비드는 131명이 사망한 열차 사고 속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이다. 심지어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일라이저는 데이비드가 자신이 찾던 영웅 후보임을 확신한다.
데이비드는 사고 후 차창에 꽂혀 있는 쪽지의 주소를 보고 일라이저를 찾아간다. 그 메모가 어떤 해답을 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왜냐하면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처음으로 슬픔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아파봤습니까?" 이 질문은 데이비드가 자신을 근본적으로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아픈 적이 없고 다친 적도 없다. 게다가 사람과 접촉하게 되면 죄를 지은 사람을 감지해 내는 특별한 능력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규정할 프레임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특별한 경험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다.
데이비드가 새로운 프레임을 찾을 수 있도록 계기를 제공한 사람들은 일라이저와 데이비드의 아들 조셉이다.
새로운 프레임을 발견하는 방법은 기존의 시각을 전복하는 것이다. 시각을 바꾸면 기존의 프레임이 사용하는 언어를 바꿀 수 있다. '저주, 괴물, 질병, 과대망상'이 '재능, 초능력, 축복, 사명'으로 바뀐다.
<언브레이커블>에는 몸을 거꾸로 뒤집어서 세상을 바라보는 장면들이 많다. 프레임의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조셉은 소파에 거꾸로 누워서 TV로 아버지가 당한 사고 뉴스를 본다. 데이비드가 탄 기차의 앞 좌석에 앉은 아이가 데이비드를 거꾸로 바라본다. 역 계단에서 넘어진 일라이저는 거꾸로 세상을 보면서 데이비드의 능력에 관한 증거를 목격한다.
조셉이 아버지가 죽지 않는 불사신임을 증명하려고 데이비드에게 총을 겨누는 것은 일종의 충격 요법이다. 충격을 주는 것도 프레임을 전복시키는 한 방법이다.
일라이저는 자신과 정 반대편에 있는 데이비드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완성하게 된다. 절대 다치지 않는 '언브레이커블(Unbreakable)'이라는 존재를 통해, 어린 시절의 수치스러웠던 이름인 '미스터 글라스(Mr.Glass)'가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는 '나를 누구라고 믿는가?'의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프레임이란 '사실'이 아니라 '믿음'이다.
미스터 글라스 vs. 언브레이커블
뛰어난 두뇌 vs. 불사신의 육체
안티히어로 vs. 히어로
악(惡) vs. 선(善)
이 한 쌍의 이름들은 서로의 프레임을 절묘하게 완성해 준다.
일라이저는 미스터 글라스라는 닉네임을 쓰는 뛰어난 두뇌형 악당이므로 악행을 행하는 것이 사명이 된다. 데이비드는 언브레이커블이라고 불리는 히어로이다. 일라이저는 초보 히어로인 데이비드에게 선을 행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나는 <언브레이커블>의 리뷰를 시작하면서 '프레임 밖에 있는 사람들이 정체성을 찾는 방법'을 주제로 삼았다. 그러나 글을 쓰다 보니 프레임의 안이든 밖이든 정체성 혼란은 모든 사람이 겪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정체성을 찾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이 정상인가? 인간이 다른 이웃에 비해 자기 인식이 있는 동물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정체성 문제는 날이 갈수록 더 복잡해지는 것 같다.
'과도한 정체성 혼란'. 이것은 현대 사회의 만연한 특징인 것 같다.
일라이저는 우리 시대의 특징에 관해 날카로운 통찰을 한다.
"현대는 평범한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희망을 잃고 자신에게 특별한 힘이 있음을 믿지 않고 있죠."
그렇다. 현대에는 '평균인'이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했다. 과거의 계급이 타파된 자리에는 '대중'이라는 신화적 집단이 사회의 주류로 들어서며, 정치, 문화의 주된 참여자가 되었다.
군중은 갑자기 출현해 사회의 주요 장소를 차지했다. 예전에는 존재했다고 해도 사회 무대의 뒤쪽에 있어서 간과되었지만, 이제는 전면에서 조명을 받는 주역이 되었다. 주연들은 사라지고, 합창단만 있을 뿐이다.
대중이란 '평균인(el hombre medio)'이다. 자신을 타인들과 구별하지 않고 오히려 일반적 유형을 되풀이하는 사람. 자신을 '다른 모든 사람'과 동일시하면서 불편함보다는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
우리 시대의 특징은 평균인이 자신이 평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당차게 평범함에 관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그것을 어디서든 실현하게 하려는 데 있다. 오늘날 우리는 '과대민주주의(hiperdemocracia)'를 목격하고 있다.
또 다른 특징은 우수한 전통을 지닌 집단에서도 대중이나 범인이 우세하다는 것이다.
- 오르테가 이 가세트, <대중의 반역>, 황보영조 옮김, 역사비평사, P18 ~ 25 발췌 -
우리는 현대의 과학, 기술에 도취하여 지금 이 시대를 가장 뛰어난 시기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는 정신적, 영적인 측면에서는 칼 야스퍼스가 말한 '기축 시대(Axial Age)' 이후로 인류의 발전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붓다, 노자, 공자, 플라톤, 예수 등이 탄생한 BC 8세기에서 3세기 전후에 인류의 정신은 가장 꽃 피웠고, 그 후는 동어반복과 지엽적 변주일 뿐이다.
극도로 개인화된 현대인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들 개성을 표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별반 차이가 없다.
나만의 색깔, 나만의 향기, 나만의 패션, 나만의 철학을 말하지만, 서로 모방하고 재조합하여 만든 자신의 얄팍한 고유성에 안도할 뿐이다. 누구나 뛰어나고 싶지만 사실은 무리에서 뒤처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수많은 대중이 정체성 시장에 등장하면서, 그들을 포획하고 또 그들에게 영합하기 위한 프레임이 이토록 극심한 시대가 있을까? 이제 조지 레이코프(미국의 인지언어학자)가 말한 '프레임 전쟁' 시대인 것이다.
나는 여기서 과대민주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거나, 철인정치나 엘리트주의와 같은 주제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거시적인 문제를 조망할 능력이 전혀 안 될 뿐만 아니라, 나의 관심은 오직 개인이 현실적으로 겪는 정신적 현상이다.
우리가 자신을 규정하는 이름을 발견하지 못하면, 삶의 전 과정을 무지와 혼란 속에서 헤매게 된다. 그러나 이 정체성 게임은 너무나 과도해졌다.
대중이 하늘이라면 프레임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같다. 하늘도 구름도 실체가 없는 현상이다. 나는 대중을 신화적 집단이라고 본다.
하늘이 여기저기 퍼져 있는 구름을 잡으려 한다.
일라이저의 엄마는 일라이저가 개최한 전시회에서 데이비드를 만났을 때, 아들을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저 애를 보면 마음이 뿌듯해요. 정말 고생이 많았죠. 몇 번씩 좌절의 고비를 넘겼죠. 정말 힘들었어요. 하지만 이겨냈죠. 그래요. 이겨냈어요."
미국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대사 중 하나는 "나는 네가 자랑스러워(I'm proud of you)."인 것 같다. 나는 이 대사를 들을 때마다 양가감정에 휩싸인다.
부모로부터 저 말 한마디를 들으려고 자식들이 자신의 삶을 얼마나 허비하는가?
일라이저는 어린 시절에 잦은 부상을 겪으며 집에서 나가기를 거부한다. 그런 아들을 보며 엄마는 지금 네가 나가지 않으면 평생 집안에 갇혀있게 될 것이라고 협박한다. 그리고 집 밖 놀이터의 벤치에 선물을 미리 놓아두고, 직접 가서 가져오라고 아들을 설득한다. 일라이저가 받은 선물은 영웅 만화였다.
일라이저의 엄마는 강인한 성정을 지닌 인물이다. 장애물이 있다면 기어이 넘어서고 세상과 맞서는 자신의 스타일을 자식에게도 그대로 강요한다. 엄마는 당근과 채찍 전략을 구사하며 일라이저를 밖으로 내보내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너무 성공해 버렸다. 일라이저는 너무 멀리 나갔다.
세상의 엄마들은 자식을 얼마나 모르는가? 특히 아들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녀는 아들의 속사정은 전혀 모른 채,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사람 구실을 하는 모습을 자랑스러워한다.
일라이저가 광적인 인물이 되어서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과정에서 엄마의 역할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여기서도 '최종 빌런은 엄마'인가?
일라이저의 엄마는 아들에게 어떻게든 새로운 프레임을 찾을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 준다. 일라이저는 선악 구도의 만화 속에서 자아를 찾아서 엄마의 기대에 부응한다.
일라이저는 데이비드에게 자신의 모든 악행을 폭로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제 자네는 자네가 누군지 알고, 나는 내가 누군지 아네. 난 실패작이 아니야!(I'm not a mistake!)"
이 말은 일라이저가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실패작인 자신을 낳아 상심한 엄마에게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데이비드의 아들 조셉은 아빠가 히어로라는 것을 절박하게 믿었다. 아빠가 죽지 않는 불사신임을 증명하려고 총을 겨눌 만큼 절실했다. 아빠가 히어로라면 자신도 뭔가 특별한 것이 있지 않을까?
청소년기의 정체성 압박은 상상 이상이다. 질풍노도일 수밖에 없다. 조셉의 엄마는 일라이저의 엄마보다 훨씬 부드러운 데도 그렇다.
기존의 프레임을 반대로 뒤집거나, 새로운 프레임을 만드는 것은 삶에 새로운 의미를 줄 수 있다. 그러나 또다시 새로운 프레임에 갇힌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일라이저는 '미스터 글라스'라는 새로운 자아를 찾았으나, 또 다른 프레임 속에 자신을 얽어매어 심각한 부작용을 낳는 결과가 되었다.
마치 정상인과 광인의 기준을 뒤바꾼다든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계급을 뒤집는 혁명처럼, 뒤집힌 이후에 다시 또 다른 불평등과 불합리가 생겨나는 것과 같다.
프레임에 갇힌 삶은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 알아? 자기 존재 이유를 모르는 것이야.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 의미를 모를 때야."
프레임에 갇힌 삶은 '프레임에 동일시된 삶'을 말한다. 자신의 이름과 동일시된 삶은 자신을 역할로만 규정하는 것이다.
프레임을 넘어선 삶은 말한다.
"왜 사냐건 웃지요."
프레임을 넘어선 삶은 프레임과의 동일시를 벗어난 삶이다. 프레임을 단지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서 바라본다.
올바른 프레임을 갖는 것이 첫 번째 과제이다. 두 번째 과제는 우리의 정체성은 단지 '존재(Being)'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일라이저는 '미스터 글라스'가 아니라 그냥 존재이다. 데이비드도 '언브레이커블'이 아니고 그냥 존재이다.
의미와 목적을 찾는 여정에는 프레임이 반드시 필요하다. 프레임은 구름과 같은 것이어서 그 속에 들어가면 또다시 공허하고 슬퍼진다.
의미와 목적을 내려놓으면 슬픔이 가라앉는다. 죄책감도 사라진다. 그리고 도(道)를 찾는 삶의 여정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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