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의 주관성과 과대망상의 보편성]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때가 많다.
내가 만난 며느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시댁 사람들이 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힘드시겠어요. 아직도 그렇게 갑질하는 시댁이 있다니."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한편 시어머니들이 말하는 며느리들은 대체로 이기적이고 예의가 없다.
"이렇게 좋은 시어머니가 어디 있나요. 며느리가 복 받은 건데."
그런데 나는 어떻게 늘 착한 며느리와 인자한 시어머니만 만나는 걸까?
사실 이런 의문은 내가 만난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라쇼몽 Rashomon>(1950)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자신에 관해 정직해질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얘기할 때면 언제나 윤색을 가한다. 이 영화는 그러한, 즉 자신을 실제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자기 자신에 관해서 객관적 인식이 가능한가?
1-1> 라쇼몽 효과
1-2> 기억은 객관적인 것인가?
2. 두 가지 사건 속에서 나타나는 '내로남불'
2-1> 다조마루의 내로남불
2-2> 남편의 내로남불
2-3> 아내의 내로남불
2-4> 단도와 버려진 아기
3. 진실은 자아의 투명성에서 나온다.
1-1> 라쇼몽 효과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두 가지 단편소설 <라쇼몽>(1915)과 <덤불속>(1922)의 이야기를 섞어서 하나의 큰 이야기로 재창조해서 <라쇼몽>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라쇼몽'은 '생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뜻의 '나생문(羅生門)'의 일본어 발음이다. 라쇼몽은 일본 헤이안 시대 의 수도에 있던 정문이었으나, 후에 폐허처럼 방치되어 시체 버리는 곳으로 쓰였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 유래한 '라쇼몽 효과'는 같은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입장으로 해석하면서 본질을 다르게 인식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역사 기록이야말로 대표적인 라쇼몽 효과의 예시가 될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객관적 사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승자가 기록한 역사와 패자가 기억한 역사와는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라쇼몽>의 원작 소설은 여러 등장인물의 주장 가운데 '과연 어떤 것이 진실인가?'에 초점을 맞췄다면, 영화는 더 나아가 이 주제를 '과연 진실이 있기는 한가?'라는 물음으로 발전시킨다.
등장인물들은 한 남자의 살인 사건에 관한 자신의 기억을 재판정에서 증언한다. 증언자들은 모두 사건의 당사자이거나 간접적으로 연루된 자들이다.
이들은 권위 있는 재판관 앞이니만큼 의도적으로 거짓을 고하려고 하지는 않았으나, 이들의 기억은 교묘하게 왜곡되어 있다. 특히 사건의 당사자인 세 사람의 진술은 상당히 엇갈린다.
증인마다 진술을 왜곡하거나 윤색하는 지점들이 상당히 흥미롭다. 사건에서 자신과 관련된 부분, 특히 자만하거나 열등감을 느끼는 지점, 소위 '긁히는' 부분들이 집중적으로 윤색되고 있다.
<라쇼몽>의 주제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자기 자신에 관해서 객관적 인식이 가능한가?'의 문제이다.
1-2> 기억은 객관적인 것인가?
기억은 자기 인식 과정에서 어떻게 작동할까? 등장인물들의 기억은 어떤 식으로 왜곡되었을까?
기억은 사진첩에 꽂혀 있는 스냅사진들과 비슷하다. 감정과 정서가 묻어 있는 사진들을 내가 원하는 대로 골라서 배열하고 편집한 사진첩.
사진은 그림보다 객관적이고 사실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진도 그림만큼이나 매우 주관적인 매체이다. 인물이나 상황을 어떤 각도에서 어떤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 포착할 것인가는 오로지 사진작가에 달려 있다.
기억도 마찬가지다. 기억은 과거의 파편적인 몇몇 순간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감각으로 현재에 되살아나는 것이다. 공정한 기억이 되려면 24시간 365일 모든 방향에서 돌아가는 CCTV처럼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그대로 옮겨야 할 것이다.
그러면 기억의 편집 기준은 무엇인가? 사람의 기질에 따라 기억을 편집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에니어그램(Enneagram)은 사람의 심리적 유형을 아홉 가지로 구분하는 이론이다. 에니어그램의 각 유형은 기억하고 감각하는 방식도 서로 다르다.
픽사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는 한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다섯 감정이 의인화되어 나온다. '기쁨이(Joy)'는 7번 유형이고, '슬픔이(Sadness)'는 4번 유형이다.
에니어그램 유형을 긍정, 부정으로 구분한다면, 7번은 긍정 그룹에 속하고 4번은 부정 그룹에 속한다. 7번은 주로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만, 실상은 좌절과 슬픔으로 얼룩져 있는 기억을 감추고 있다. 4번은 비극적 슬픔, 이별 등을 기억하지만, 별일 아닌 상황을 과장해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기쁨이와 슬픔이는 몇 년 전의 하키 시합날에 관해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 기쁨이는 친구들과 헹가래를 치고 부모님과 즐겁게 보낸 시간을 기억하지만, 슬픔이는 시합에 지고 비 오는 운동장에서 홀로 처량하게 있었던 날로 기억하고 있다.
에니어그램 유형은 저마다 자신에 관한 가설을 가지고 그에 걸맞은 자아상을 지닌다. '나는 누구인가'를 규정하는 자아 이미지는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으나, 각 유형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자신의 자아상에 강하게 집착하고 고착되어 있다.
기쁨이는 '즐겁고 긍정적이며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자아 이미지에 걸맞은 기억을 편집한다. 슬픔이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독특하고 우울한 아웃사이더'에 맞는 기억을 편집한다.
<라쇼몽>의 증언자들도 자신의 자아 이미지에 어울리도록 윤색된 기억을 증언한다.
기억은 자신의 자아 이미지에 부합하기 위한 정신적 현상이다. 따라서 기억은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식 현상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관해 객관적 인식이 가능한가? '특별한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영화 <라쇼몽>은 동명의 단편소설 <라쇼몽>을 액자의 틀로 하고, 또 다른 단편소설 <덤불속>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액자식 구성을 취한다.
영화에는 두 가지 사건이 등장한다. 액자 안의 살인 사건이 주된 이야기이며, 액자 밖에서 일어나는 버려진 아기와 관련된 사건이 마지막에 잠깐 등장한다. 두 사건은 별개의 이야기이지만, 결국 '라쇼몽 효과'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같은 이야기이다.
영화의 첫 시작은 나생문이다. 하늘에 구멍이 난 듯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다. 사건의 목격자로서 재판에서 증언했던 나무꾼과 유랑 승려가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다. 이때 지나가던 떠돌이가 비를 피해 나생문으로 들어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들의 회상으로 재판 과정과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다.
첫 번째 사건의 핵심은 '다조마루가 여인을 겁탈하고 남편을 죽였다.'라는 것이다. 핵심 증인인 다조마루, 여인, 남편은 관아에서 증언할 때 자신은 진실을 이야기한다고 호소하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다. 각자 자기를 자신의 자아상에 걸맞은 더 나은 사람으로 포장한다.
세 사람이 이야기에서 강조하는 포인트는 서로 다르다. 이들의 진위를 판별할 수 있는 가장 객관적인 기준은 이 사건 전체를 외부자의 시선으로 관찰한 나무꾼의 증언이다.
2-1> 다조마루의 내로남불
다조마루의 자아 이미지는 '검술이 뛰어나며 냉혹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악당 다조마루'이다.
그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은 '사무라이', '여인', '나무꾼' 등의 보통명사로 불릴 뿐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과장된 악명을 이용하고 즐기고 있을 뿐 아니라, 나르시시스트적 측면도 보인다.
'악명 높은 도적 다조마루'를 체포하여 관아로 끌고 온 관리는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관리는 다조마루가 말에서 떨어져서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다조마루는 부인한다. 자신은 말을 달리던 도중 목이 말라 개울물을 마셨는데 뱀이 죽은 물이었는지 복통이 심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뒹굴거리고 있었을 뿐이다.
"감히 다조마루가 말에서 떨어졌다는 상상을 하다니!"
그는 자신이 체포된 것보다 말에서 떨어졌다고 하는 것에 더 화를 낸다.
사무라이 남편과의 결투도 한 판의 멋진 승부로 묘사한다. 사무라이는 23번이나 다조마루의 신출귀몰한 칼을 받아내며 훌륭히 싸웠다고 한다.
"내 칼을 20번 이상 받아낸 건 이제껏 그자밖에 없었다."
생사가 오가는 순간에 칼이 부딪친 횟수를 센다는 것은 그만큼 여유가 있고 실력이 뛰어나다는 방증이다. 상대방도 대단해야 자신의 실력을 자랑할 수 있기 때문에 사무라이의 능력도 업그레이드된다.
그러나 나무꾼이 목격한 싸움은 그야말로 초등학생들이 싸우는 것처럼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추태의 연속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눈치만 보며 빙빙 돌다가 여자의 비명에 놀란 토끼처럼 얼결에 싸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칼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제풀에 쓰러져서 바닥에서 뒹군다. 다조마루는 사무라이의 가슴에 검을 찌를 때도 사람을 한 번도 죽여본 적이 없는 것처럼 부들부들 떤다.
다조마루는 여자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한다. 자신은 쿨한 악당이므로.
"낮에 순간 산들바람이 불지만 않았어도 그를 죽이지 않았다. 산들바람에 여자의 얼굴을 가리던 베일이 걷히며 순간 그 여자가 천사처럼 보였다."
그는 갑자기 시인이 되어서 산들바람을 증인으로 세운다. 살인, 강간과 같은 흉악한 범죄를 낭만적인 일탈 정도로 치부한다. 처음에는 저항했으나 여자도 즐기며 호응했다는 강간범의 전형적인 기억도 덧붙여진다. 그리고 여자에게 곧 흥미를 잃고 상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여자의 격렬함에 마음을 빼앗겼지만 다른 여자들과 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더 안 찾았다."
그러나 나무꾼이 본 바에 의하면, 그는 여자 앞에서 무릎 꿇고 애걸복걸하며 아내가 되어 달라고 빌었다.
다조마루의 도적으로서의 명성은 실제보다 과장된 것일 수 있다. 전란 시대이므로 강력 사건이 많이 일어났을 것이다. 수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모두 유명한 다조마루에게 덮어씌우다 보니 어느새 유명인사가 된 것일 수 있다. 다조마루는 자신의 자아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지는 그런 명성에 흡족했다.
2-2> 남편의 내로남불
이미 죽은 자가 증언자로 등장하는 것은 <라쇼몽>의 백미 중 하나다. 남편은 무당을 통해 빙의하여 증언한다.
남편은 '사무라이 정신을 가진 용감하고 고결한 사람'이라는 자아상을 가지고 있다. 그는 두 가지 지점에서 자존심이 상했다. 싸움에서 패배한 것과 아내가 배신한 것.
패배자가 되는 것은 사무라이로서 용납할 수 없으므로, 그는 아내의 배신에 상심하여 나무에 꽂힌 단도를 뽑아 자결했다고 말한다. 자신을 패배자가 아닌 '고결한 희생자'로 설정한다.
그의 시나리오에 의하면 아내는 실제보다 더 악독하고 음탕한 여자가 될 필요가 있다. 다조마루는 오히려 더 인간적이고 사내다운 사람으로 나온다. 여기서 남자들의 교묘하고 비겁한 연대의식이 드러난다.
"아내는 도적을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남편이 보는 앞에서 '어디든 좋아요. 날 데려가 주세요.'라고 말한다. '저 사람을 죽여주세요. 저 사람이 살아 있는 한 당신과 함께 갈 수 없어요.' 그 한마디가 나를 암흑으로 던져버렸다. 인간이 어찌 그리 비열하고 저주스러운 말을 할 수 있는가?"
귀신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나? 있다. 우리의 자아의식은 육체가 무너져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을 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2-3> 아내의 내로남불
아내는 자신이 '정숙하고 순수하며 결정권이 없는 가련한 여인'이라는 자아상을 가지고 있다.
"여자인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여자는 다조마루와 남편과는 전혀 다른 진술을 한다. 겁탈당하고 일어나 보니 도둑은 도망가고 없고, 남편이 너무나 경멸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여자가 가장 강조하고 공들여 진술하는 부분은 남편의 '차가운 분노가 서린 눈빛'이다. 자신은 피해자일 뿐인데 남편의 태도는 너무나 냉혹했다. 이들 부부는 서로를 탓하기에 바빠서 악당 다조마루를 오히려 좋게 평가하는 아이러니가 생겼다.
여자는 증언할 때 두 남자가 결투에 이르게 된 과정에서 자기가 했던 역할을 슬그머니 생략한다.
여자는 남자끼리 결투하여 결정하라고 종용한다. 그러나 남편은 이런 여자를 위해서 목숨 걸고 싸우고 싶지 않다고 한 발 뺀다. 정조를 잃은 이 여자를 잃는 것은 말을 잃는 것보다도 못하다고 한다. 그러자 다조마루는 왠지 여자에 대한 열정이 식으며 그냥 여자를 버리고 가려고 한다.
졸지에 두 남자에게 모두 버림받을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안위를 위해 싸움을 부추긴다. 그녀는 두 남자의 '남성성'에 대한 불안 심리를 효과적으로 건드린다.
"약한 건 너희들이야. 똑똑히 들어. 여자가 원하는 것은 진짜 남자야. 여자는 칼로 쟁취하는 거야."
2-4> 단도와 버려진 아기
재판은 이렇게 혼란스럽게 종료되고, 시점은 다시 액자 틀이 되는 나생문 아래로 간다. 나무꾼, 승려, 떠돌이 세 사람은 사건에 대해 논평한다. 이들은 다조마루와 사무라이와 여인의 증언이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승려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믿음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믿는 사람이다. 진술이 엇갈리는 것에 대해서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조차 진실하지 못한 이유는 '약하기 때문'이라고 논평한다.
"인간이 인간을 못 믿다니.. 이게 바로 지옥이야. 아냐. 난 인간을 믿는다. 난 이 세상이 지옥이라고 믿고 싶지 않아."
떠돌이는 승려와 정반대의 견해를 가진 사람이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비정한 곳이며, 선악은 중요하지 않다. 사람 팔자가 개만도 못한 세상이므로,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나무꾼의 입장은 어떤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의 캐릭터는 좀 더 해석이 필요하다.
재판에서 해결되지 못한 부분이 하나 있다. 남자가 장검에 찔려 죽은 것인지, 단도로 죽은 것인지, 그리고 누가 죽였는지에 관해 진술이 엇갈린다. 다조마루는 자신이 장검으로 남자의 가슴을 찔렀다고 했고, 남자는 단도로 자결했다고 했고, 아내는 자신이 단도로 남편을 찌른 것 같다고 했다.
이때, 갑자기 나무꾼이 실토한다.
"그건 거짓이야. 그 남자의 가슴에 단도는 꽂혀 있지 않았어. 그는 장도에 찔려 죽었다."
나무꾼은 관아에서는 자신이 산에서 이미 죽어있는 남자의 시체만 봤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사실은 남자가 죽기 전부터 사건의 전말을 다 보고 있었다. 그는 단지 사건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거짓 증언을 했다고 하지만 석연치 않다.
이때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나생문의 한구석에 버려진 아기가 강보에 싸여 있다. 떠돌이는 아이의 몸을 둘러싼 옷가지를 재빨리 챙긴다. 승려와 나무꾼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내가 안 가져가도 다른 누가 와서 가져갈 거야. 저들이 좋아서 낳고 버린 부모도 있는데, 내가 무슨 문제냐." 이런 비정한 말에 나무꾼은 격분한다.
나무꾼 : "인간은 다 이기적이야. 모두 변명뿐이지. 다조마루도. 그 여자도. 그 남편도. (떠돌이를 가리키며) 너도!"
떠돌이 : "그런 당신은 달라? 웃기는군. 위증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잖아. 그 여자의 단도는 어쨌소? 값나가는 물건이라고 다조마루도 말했다며. 그 단도는 어디 있소. 여전히 그곳에 떨어져 있나? 당신 아니면 누가 훔쳐 가? 진짜 이기적인 건 바로 너야."
나무꾼은 값비싸 보이는 단도를 차지하기 위해 시치미를 떼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을 믿고 싶은 승려는 나무꾼의 이야기에서 허점이 많았음에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떠돌이는 진작에 나무꾼의 심보를 꿰뚫어 보았다.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도적 눈에는 도적만 보이는 것이다.
나무꾼을 제압한 떠돌이는 당당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챙겨서 훌쩍 떠나갔다. 나생문에는 아기를 품에 꼭 안고 있는 승려와 나무꾼만 남았다.
나무꾼이 승려에게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하자, 승려는 그를 의심하며 결사반대한다.
나무꾼 : "집에 아이가 여섯이나 있소. 하지만 여섯을 키우나 일곱을 키우나 힘든 건 마찬가지요."
승려 : "내가 부끄러운 말을 했군요."
나무꾼 : "이해하오. 나를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오. 부끄러운 것은 바로 나요.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소."
승려 : "아니오. 이건 고마운 일이요. 덕분에 나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소."
승려를 설득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처럼 쉽다. 그는 세상을 믿고 싶어서 뭐든 긍정적으로 해석해 버린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무꾼의 알 수 없는 미소의 의미는 무엇인가? 값비싼 단도처럼 아기도 단지 그의 거짓말의 동기가 되는 것인가?
다조마루와 남편과 아내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사건을 해석한 것과 동일하게, 나생문의 세 사람도 자신의 가치관대로 아기 문제를 대한다.
만약 아기가 죽거나 문제가 생겨서 세 사람이 재판에 불려 나가게 된다면, 아마도 내로남불의 두 번째 재판이 펼쳐졌을 것이다.
나무꾼의 동기는 재물욕과 생존이다. 그는 내면에는 아직 수치심과 양심이 남아있지만, 처참한 시대 상황에 몰려서 위선을 행하는 사람이다. 나무꾼은 어쩌면 예상과 다르게 행동할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다. 작은 희망을 하나 남겨둔 마지막 장면은 <라쇼몽>의 세 번째 백미이다.
<퍼펙트 데이즈>에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뜻하는 단어인 '코모레비(こもれび)'가 나온다. <라쇼몽>에도 코모레비가 나온다. 첫 장면에서 나무꾼이 산길을 걸을 때 한낮의 태양이 검은 배경의 나뭇잎 사이로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
<퍼펙트 데이즈>의 코모레비가 '지금 이 순간에만 포착할 수 있는 행복'을 의미한다면, <라쇼몽>의 코모레비는 '왜곡되기 쉬운 연약한 진실'을 상징하는 것 같다.
진실은 코모레비처럼 포착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의 자아는 한없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두운 덮개 속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자아의 파편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자아상이 바로 두꺼운 덮개의 정체이다.
자아는 자신이 부딪히는 상황에서 증인 겸 피고인 겸 판사 겸 배심원이 되어,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비난한다.
인식의 가장 큰 특징은 인식 대상이 있어야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식 주체는 인식 대상에 자신의 자아 이미지, 가치관, 욕망 등을 덮어씌우려는 무의식적 의도를 늘 가지고 있다. 자신과 대상을 '의도'라는 아교로 찰싹 붙여놓기 때문에 인식의 왜곡이 일어난다.
자아가 자신의 의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대상 사이에 틈이 있어야 한다.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에 대해 거리 두기를 할 수 있으려면 매우 맑고 또렷하며 투명한 정신이 필요하다.
라쇼몽 효과는 자아가 탄생한 이래로 늘 발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라쇼몽>은 봐도 봐도 명작이다.
# '기억'과 관련된 추천 영화
#라쇼몽 #Rashomon #나생문 #구로사와아키라 #라쇼몽효과 #에니어그램 #인사이드아웃 #기억 #코모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