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의 오계명

'눈치'의 룰을 깼을 때

by 서린

바야흐로 2015년, 빅뱅의 뱅뱅뱅과 오버사이즈 힙합 패션이 대한민국을 지배했던 그 시절 나의 첫 직장 생활은 시작되었다. 당시 유행과는 다르게 2015년의 기업문화는 지금보다 더 수직적이고 보수적이었다. 항상 자유!를 외치던 나는 첫 직장으로 유연하고 젊은 조직을 택했고, 사무실에서 크게 흘러나오는 힙합 음악과 후디+조거 팬츠 조합의 패션이 가득한 자유롭고도 활기 넘치는 회사 분위기에 입사 참 잘했다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이때는 몰랐다. 이 자유로움 속에 살벌한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첫 출근, 나는 다음 날 새벽 5시에 퇴근을 했다. 프로젝트를 코앞에 두고 있어 많이 바쁠 거라는 얘기를 들어 각오를 하긴 했지만 새벽 동이 틀 때까지 사무실은 한낮처럼 밝았고, 사람들의 에너지도 꺼질 줄을 몰랐다. 그렇게 '일-점심-일-저녁-일' 생활에 익숙해져 갈 무렵,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팀장님은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밥을 먹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팀장님이 밥을 먹지 않으면 우리도 밥을 먹을 수 없다는 것. 그동안은 신입인 나를 나름 배려하여 팀장님이 자리를 슬쩍 피해 줬기에 우리 모두 행복한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나의 선배들은 불편한 마음을 안고..)


어느 순간부터 팀장님은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미간에 인상을 팍 쓴 채 모니터를 응시하며 자리를 지켰다. 과장님이 슬쩍 "팀장님 식사.."라고 운을 떼면 그는 짧게 "어." 하고는 다시 모니터를 응시했다. 눈치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아니, 게임이랄 것도 없이 우리는 점심을 쫄쫄 굶은 채 팀장님 눈치만 살피며 애꿎은 키보드만 두드릴 뿐이었다. 이유를 묻는 나에게 선배는 "어쩔 수 없지 뭐.. 팀장님 식사 안 하시면 우리도 못 먹어.."라며 암묵적인 룰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편의점 생활을 한지 일주일쯤 지나니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었다. 다 잘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마음에 작은 파도가 일렁였다.


그날도 팀장님은 역시나 자리 보존한 채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10분 정도 지났을 무렵, 나는 팀장님 자리로 저벅저벅 걸어가 옆에 놓인 작은 의자에 앉았다. 보통 팀장님 자리까지 갈 일은 없었기에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이었는지 그가 살짝 당황한 말투로 "어, 어, 왜?"라고 물었고 나는 "팀장님, 밥."이라 짧게 답했다. 팀장님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응." 하고는 다시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그를 보채지 않았다. 20분쯤이 지나서야 그는 너 아직도 여기서 뭐 하냐는 눈빛으로 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질 수 없다. 나에게 말을 걸 때까지 묵언 수행이다. 하지만 그도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점심시간이 다 지나서야 "너 왜 안 가냐"라는 그의 말에 나는 그동안 참아왔던 서러움이 터져 그를 몰아붙였다.


"팀장님, 팀장님이 밥을 안 드시면 저희가 눈치 보여서 밥을 먹겠어요?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밥도 못 먹게 인상만 찌푸리고 있으면 눈치 보여서 가겠냐고요! 배고파서 집중이 안 된다고요. 밥 좀 먹어요!"


순간 정적이 흘렀고, 그리 크지 않은 사무실 규모에 사장님 포함 모든 임직원이 나의 한풀이를 듣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점심시간 사무실 상주 금지 룰이 생겼고 우리는 점심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일화는 한동안 회식 안줏거리가 되었고 나중에 알게 된 얘기지만 우리 팀에는 막내 오계명이 있다고 했다.


<막내의 오계명>

1. (눈치껏) 30분 일찍 출근할 것

2. (눈치껏) 출퇴근 인사 잘할 것

3. (눈치껏) 마지막으로 퇴근할 것

4. (눈치껏) 일 찾아 할 것

5. (눈치껏) 팀장님 기분 살펴 행동할 것


왜 진작 얘기 안 해줬냐는 나의 물음에 알아서 잘하길래 말 안 해줘도 되겠다 싶었단다. 그런데 마지막 규칙을 깨는 걸 넘어 이렇게 부숴버릴 줄 몰랐다며 내가 배고픔에 이성의 끈을 놓고 미쳐버린 줄 알았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한동안 꼴통으로 불리었는데 그 '애칭'이 썩 마음에 들었다. 이 애칭 안에는 그들을 배고픔에서 해방시켜 준 나에 대한 고마움과 악습을 미리 끊어내지 못하고 막내에게 떠넘기게 된 상황에 대한 미안함이 들어있지 않았을까. 이후에도 나의 이유 있는 반항은 종종 있었는데 그걸 묵묵히 지켜봐 주고 또 뒤에서 지켜준 나의 선배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직장인이라면 내가 하는 일이 회사에서 의미가 있고 인정도 받았으면 한다. 팀장도 포함이다. 그러나 조급한 마음에 본질은 잊은 채 나의 일 그 자체에 매몰되어 땅굴을 파는 경우가 있다. 일명 삽질이라고 한다. 이때 팀원들이 엉뚱한 삽질로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올바른 방향에 에너지를 쏟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문제 해결력, 팀원 성장에 대한 관심) 개인에게 주어진 미션이 팀 성과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으로(소통 능력) 흔들리는 팀원들을 다독여 같이 걸어갈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책임감, 리더십) 이 팀장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쓰고 보니 참 어렵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너는 어떤 리더가 되고 싶어?"

금요일 연재
이전 01화프롤로그. 직장 생활 백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