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

으로부터 자유

by 손진일

쓰지 않고 보관된 물품들이 성가시게 여겨져서 막상 버리려 하면 쭈밋쭈밋 망설이다가 결국 제자리로 원위치한다. 수년 동안 꽂혀있는 책도 그렇다. 한번 볼 책은 사지 말라는 조경철 교수님의 저서는 네댓 번 읽었다. 하지만 여태 실행을 못하고 있다.

골동품 친화적 속성이 집안의 내력인가? 동생은 나보다 더 심하다. 온갖 잡동사니를 지고 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나름대로 이유야 있겠지. 나는 해외로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며 이사를 자주 하다 보니 어느 정도는 버리는 훈련이 된 셈이다. 그런데 다른 물품은 비교적 잘 버리지만 유독 책이나 내가 쓰던 것 즉 내 손때가 묻은 것들은 애착이 심해서 이사할 때마다 곤욕을 치른다. 그리고 보던 책은 빌려주지 않고 아예 새책을 사서 주기도 했다. 좀 이상한 성격 일종의 결벽증 현상이라고 여겨진다.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사람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 강해서 주변에서 보기에도 어리석을 만큼 문제가 있다. 반면 동생은 나와 달리 관계에 대한 생각은 상당히 쿨하다. 그런 점에서는 나보다 한 수 위라고 인정한다. 글쎄 같은 속성의 90프로 이상의 비슷한 유전인자를 받은 형제라도 그 속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일찍 요절하신 외삼촌은 동경제대를 다닌 수재였다. 어릴 때 들은 이야기는 대부분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귓전으로 흘렸지만 몇 가지는 늘 떠오른다. 복싱은 선수급이고 도쿄에서 세칭 동아리 같은 클럽도 만드셨다. 덕분에 어릴 때 마당에서 하던 새도우복싱 연습을 이 나이에도 가끔 스텝을 밟는다. 외삼촌은 해방 후 미군 통역 장교도 하셨고 고향인 마산에서 중앙권투 도장도 세우셨다. 그러나 그렇게 뛰어난 분이 다른 것은 몰라도 외숙모에 대해 애착이 강하셨다는 점이 특이했다. 옛말처럼 팔불출 숙맥이셨다. 그 때문인지 술을 많이 드셨고 결국 술병으로 세상을 떠나신 것이 아닌가 싶다.

다들 아는 상식이지만 인간관계는 본능적 또는 감정적 행위로는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대단히 복잡한 구조다. 그런데 한 가지 핵심적인 요소는 집착이다. 그것은 관계 개선에 도움이 아니라 방해꾼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집착의 역효과로 인하여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안타깝게 생을 마치신 것이 아닌가 싶다. 요즈음 같이 심리 상담이 발달된 사회시스템이라면 달라졌을 운명이라 생각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한편 외숙모의 입장도 지금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외갓집의 지위와 재산이 엄청났기에 외숙모가 상처를 많이 받았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당시에는 어린 나이라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외숙모 역시 외삼촌이 세상을 떠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스스로 생을 마감하셨음을 보고 뭔가 그분의 삶에는 우리가 이해하거나 알 수 없는 부분이 있구나 여겨졌을 뿐이다.

멘델의 유전자법칙에 따라 나도 어느 정도 외삼촌의 그러한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소싯적부터 이상한 꿈에 사로 잡혔다. 중학교 시절부터 결혼에 대한 로망을 꿈꿨다.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었다. 그리고 그 로망을 우상으로 삼았다. 삶에서 로맨스야말로 피곤한 인생의 쉼터 내지는 오아시스이며 동시에 목적인 셈이었다. 모든 일의 성취의 동기는 그 방향으로 초점을 맞췄다.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이유와 동기가 그곳에 있는 것은 어디 내뿐이겠는가. 당시의 대부분 내 또래 역시 비슷한 생각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시대가 요즘처럼 다양한 선택이 없는 협소한 구조여서 자신을 가장 가까이하며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 유일한 근거였고 삶을 지탱해 주는 기둥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참 어리석고 한심한 무지렁이 같은 생각이었음을 수많은 안타까운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잘못된 사유의 결과를 현실은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노년에 이르러 대가를 요구한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실수와 착오로 인한 관계파탄은 서로에게 심대한 상처를 입히고 강퍅한 심성으로 만드는 것이 삶의 포뮬러다. 엉뚱한 기대감이 실망으로 돌아올 때 치미는 분노를 제어하지 못해 저질렀던 실수도 많았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롤러코스터 같은 삶을 살다가 은혜로 신앙을 가지게 된 사건이 만만 다행이다. 내 인생의 가장 성공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산다. 그냥 그대로 살았다면 아마도 제명을 살지 못하고 떠났을 게 뻔하다.

어느 날 마지막 인생 나들이의 친구가 나를 떠나고 싶어 하길래 쿨하게 말했다. 그래 원하는 대로 살아라.

그러나 말은 뱉기 쉬워도 그 뒷감당은 만만찮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나를 인도하시는 분에게 맡겼다. 자신도 제대로 책임지지 못하는 주제에 가족을 책임진다는 건방진 생각이 곧 교만함 임을 성경을 통해서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실망과 좌절감의 무게는 내 힘으로는 도저히 들어올리기 어려운 벤치프레스다. 그래서 코치님께 부르짖는다. 도와주세요.

어느 설교자가 강조했다. 우리 인생은 누구라도 내일까지 살 수 있다는 보장을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을. 우리의 호흡은 우리가 정하지 못한다. 논리적으로 납득이 되고 수긍도 했다. 그리고 붙어사는 사이도 언젠가는 물리적으로 분리될 것도 너무 잘 안다. 게다가 자연의 법칙과 보통률에 따라도 내가 훨씬 더 먼저 떠나는 궁극적 이별이 있음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빈칸처럼 공허하다. 그렇다. 익숙함과의 이별이 주는 슬픈 선물이 두렵기 때문이다.

부르짖는다. 집착으로부터 자유를!

그렇다. 자유의 개념은 내게 새로운 패러다임 시프트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신의 도움으로 궤도에 정착하게 될 것을 확신한다. 자유의 Orbit를 향하여.

But I want you to be without care. He who is unmarried cares for The Things Of THE LORD —how he may please THE LORD.(고린도전서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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