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좁은 길

by 손진일

좋은 친구 한 사람만 있어도 행복하다고 한다. 이 세상에 좋은 친구가 많은 사람도 더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격이 고매하고 학식이 높은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클래스다. 이런 사람은 따르는 친구가 많고 추종하는 사람도 있다. 그 많은 친구라 칭하는 사람들이 많아도 막상 그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가 찾아가서 진정으로 상의할 친구가 몇 명이 될까? 어쩌면 단 한 명이라도 있을지 없을지는 본인 외는 모른다. 내가 말하는 진정한 친구는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어머니가 어릴 때 내게 당부한 말씀의 의미를 나이가 많은 지금 다시 되새겨 본다. 늘 내게 부모 팔아서 친구를 산다 라는 말씀을 하셨고 친구가 집에 놀러 오면 반갑게 맞이하시며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씀도 하셨다. 강남은 서울의 부잣동네가 아니라 머나먼 이국땅을 의미했다. 어쩌면 엘도라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머나먼 남쪽 십자성이라는 노래도 생각이 난다. 뭔가 이상향이었을게다.


아무튼 친구라는 단어를 깊이 생각을 해봐도 내 짧은 지식과 사유로는 턱없이 부족해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봤다.


친구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정리를 해보니 철학자들에게 친구란 단순히 나를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고 정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친구는 그냥 평소에 생각하던 의미와는 상당히 다른 차원의 속성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던 친구는 사이가 좋고 서로 의지하며 즐거움을 나누는 정도였으니 수준이 평범하거나 보통 이하라고 보인다. 그러니 맨날 좋은 친구가 있었다면 하는 헛된 희망만 구름을 지나는 달을 쳐다보듯 해왔던 것이다. 뭔가 기대고 바라는 좋은 친구 정도였다.


내게는 에피쿠로스가 말한 친구의 정의가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그는 친구를 삶의 불안을 없애는 가장 큰 안전이라고 주장했다. 사실상 공감이 가는 것은 세상을 살면서 부대끼는 것이 온통 걱정거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염려되는 문제가 생기면 툭 터놓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친구가 아닐까.

몽테뉴처럼 친구는 이유 없이 하나가 되는 존재라는 말에도 일리가 있었고 선을 함께 추구하는 영혼의 동반자라는 말에도 잔잔한 울림이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생각하기로 친구는 좋은 존재며 함께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월나라의 범려라는 재상은 오나라를 이기고 의기양양한 왕인 구천을 피해 도망을 가면서 한 말이 있었다. 구천이라는 사람은 고생은 같이할 수 있지만 즐거움은 나눌 수 없는 소인배라서 성공하면 달라지는 인간이라고 평가를 했고 급기야 목숨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야반도주했다. 가는 곳마다 돈 버는 재주가 뛰어나서 거부가 되면 재산을 나눠주고는 홀연히 떠나서 또 다른 지역에 가서 거금을 벌었다는 설화가 있다. 흔히 돈을 보면 얼굴색이 변한다는 속설을 뛰어넘는 위인이었다.


우정에 관해서라면 우리나라는 오성과 한음이 상징이고 중국은 관포지교가 있다. 아무튼 시대를 막론하고 친구는 소중한 존재고 우정이야말로 인생을 풍요롭고 안전하게 만드는 개념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우정은 계산 불가능한 전인격적 결합이라고 설파한 몽테뉴의 말도 새겨볼 만하다.


어떤 사람이 좋은 친구일까? 단순히 내게 잘 대해주고 내 말을 들어주며 어려울 때 도와주는 사람일까?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이 정의하는 친구는 그런 친구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덕을 추구하고 선을 향한 동반자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감정을 초월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잘못된 부분은 솔직하게 지적해 주고 함께 해결해서 서로 성장하는 인간관계가 우정의 코어다.


현실적으로 내가 바라는 진정한 친구는 이상이었을 뿐 현실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문제는 아무리 좋은 친구가 있어도 내가 그를 알아볼 수 없고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내 역량이나 품성이 우정을 이어갈 수 없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니 절로 자괴감이 든다. 내게 훌륭하고 또 필요한 친구가 아무리 많았더라도 내가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좋은 친구가 없다는 냉철한 판단을 하게 되었다. 친구가 아니라 자신이 문제였다.


내 친구는 내가 절대적인 상황에서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이다. 친구가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벗이다. 그를 지키려는 마음이 뚜렷해야 하는 존재다. 더러 부모 형제도 상속 문제로 서로 다투는 광경을 신문이나 또 뉴스로 보면 혈육이라고 해서 좋은 친구보다 더 나은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누가 좋은 친구라는 개념은 아니다. 남이 아니라 스스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실천의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과연 누구의 좋은 친구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포기했다. 세상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내게는 없다. 딱 90퍼센트까지다. 10퍼센트는 사람의 능력으로 즉 내 능력으로 결국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 모든 현실적인 한계를 다 아시고 말씀으로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을 가르쳐 주셨고 시편에서 형제의 우정을 헐몬의 이슬이 시온산에 내리는 것 같다고 표현하셨다.

결국 하나님은 나에게 예수님은 좋은 친구라는 사실을 진리로 깨닫게 하신다. 아직도 나는 갈 길이 멀다. 예수님이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먼 길을 걸어야 한다. 좁고 힘들더라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이다.


“Enter by the narrow gate; for wide is the gate and broad is the way that leads to destruction, and there are many who go in by it. Because narrow is the gate and difficult is the way which leads to life, and there are few who find it.(마태복음 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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