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판편지로 하는 학급 경영

Episode 8 움직이지 마! 고개 돌리지 마!

by 꾹쌤

“선생님, 우리 반은 왜 물감 안써요?”

“수채화 언제해요?”

“물감 쓰는 미술 시간 언제 와요?”


밑그림 그리고, 물감 쓸 준비하고, 채색하고, 뒷정리까지 하면

세시간이 훌쩍 지나가는 수채화 활동.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하는 활동은 교사에게 선물과도 같은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과정의 빈틈과 융통성을 최대로 끌어당겨

요리조리 피해가고 있었는데...

학생들 입에서 질문이 나온 이상 더이상 미룰 수 없으니,

굳이 미루고 있는 선생님의 속사정에 약간의 각색과 재미를 덧붙여 전해본다.


때는 바야흐로 2001년.

초등학교 4학년 개구쟁이의 이야기.

여느 날과 다름 없이 집에서 알림장을 보며 미술시간 준비물을 챙기는데

'오잉? 집에 준비물이 다 있네?'

소싯적 취미로 서예를 하셨던 어머니 덕분에

친구들이 부러워 할 대왕 서예붓을 챙겨 기대에 부풀어 잠에 들었어요.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등교했던 사건 당일.


생각보다 이론 설명이 길었던 탓에

좀이 쑤셔 엉덩이가 의자에서 들썩들썩...

지루한 설명 시간이 끝나니 드디어 가로 획, 세로 획 긋기 연습시간이 찾아왔고,

선생님은 화선지에 빼곡하게 연습을 하라고 하신 후 잠시 자리를 비우셨어요.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어머니의 대왕 서예붓'을 자랑하기 위해 좁은 책상 사이를

요리조리 돌아다니며 친구들 화선지에 낙서를 하던 나.

대왕 붓을 부러워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깔깔거리며 즐거웠던 것도 잠시,

담임선생님 특유의 실내화 굽 소리가 조용한 복도를 울리고

본능적으로 꾸지람의 냄새를 맡은 나는 황급히 자리로 돌아와 몸을 샥~ 돌리며

부드럽게 엉덩이를 의자 위에 얹었어요.


'휴 다행이다. 안걸렸다.' 안도의 마음도 잠시


"으악!!! 이게 뭐야!!!"


고요한 교실과 복도를 채우는 짝꿍의 울음섞인 비명과 눈을 뜨고 있음에도 믿겨지지 않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그만 시간이 멈췄어요.


오른 손에 대왕 서예 붓을 들고 엉거주춤 앉아 있는 나.

아끼는 노란색 원피스에 선명히 찍힌 대왕 점 일곱 개를 바라보며 울먹이는 짝꿍.

차분하지만 분노로 가득찬 호랑이의 눈으로 교실 뒷 문에서 나를 응시하던 담임선생님.


'망했다.'

'미안하긴 한데... 그만 울지... 선생님한테 죽었다...'

'선생님이 엄마한테 전화하면 어떻게 하지?'


미안함으로 가득한 우뇌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좌뇌의 움직임이 격렬하게 이어졌지만

정신차려보니 여자화장실 앞에서 쭈뼛쭈뼛 다리를 동동 구르며 친구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내가 있었어요.

똑똑 떨어지는 수도꼭지의 자잘한 소음과 그 사이를 채우는 흐느낌.

미안한 마음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그 자랑스럽던 대왕 서예붓은 더이상 아무 쓸모 없이 느껴졌어요.


이후의 상황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먹물을 쓰는 미술 시간에 저지른 실수와 생생한 기억에


"잔소리로 너희의 정신을 무장시킬 자신이 없어 선생님이 망설이고 미뤘던 것이다!" 라고 말하며

선생님의 변명을 마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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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노파심이겠지만,

과거의 선생님이 한 실수를 여러분이 반복한다면

과연 차분하게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나봐요.

그래도 순진하면서도 당돌한 요구성 질문에 이렇게 바로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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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러분이 선생님보다 더 개구쟁이일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도 뭐가 그렇게 불안하고 걱정되는 건지... 그쵸?

바닥에 물감도 쏟을 수 있고, 장난치다가 물통을 엎지를 수도 있어요.

그래도 선생님 이야기를 들었으니 선생님이랑 똑같은 실수는 하지 않겠죠?

믿어요.


믿지만, 그래도 물감 쓰는 시간에 이거 하나만 지켜요.


'움직이지 마! 고개 돌리지 마!'


오늘도 이렇게 편지쓰기를 통해 하는 학급경영이 힘을 얻어가고 있어요.



다음 이야기 미리 보기

Episode 9 뒤에서 욕하지 말라고 했다. ㅡㅡ


주먹다짐보다 무서운 편가르기와 그들의 정치.

그 오묘한 세상에 어른이 난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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