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 미국에서 환생하다

그 구황작물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by 한이람
미국의 달력은 맛으로 넘어갑니다.
미국맛 시즌3은
시간이 맛으로 유통되는 순간을 관찰합니다.




나는 당근을 싫어한다.


매우, 몹시, 진심으로.


생당근도 싫고, 익힌 당근은 더 싫다.

당근이 들어간 음식은 일단 피하고 본다.


그런데 예외가 딱 하나 있다.


당근케이크.


이것만큼은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질 못한다.


며칠 전 카페에서 발견하고 주문하려는데,

옆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하는 거다.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케이크에 굳이 당근을 넣어?


... 어?

듣고 보니 진짜 그렇네.




이 채소에게도 사정이 있다

이 채소도 처음엔 영문도 모르고 불려 왔다... 아마도.


그러게, 왜 당근이었을까. 고구마나 단호박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애들은 그렇다 쳐도 굳이? 그 단단하고 흙내 나고, 익히면 흐물거리기까지 하는 걸.


사실 이 채소가 케이크에 들어가게 된 서사는 의외로 짠하다. 때는 2차 대전기 영국, 설탕이 귀해지며 베이커리들은 비상에 걸렸다. 달콤한 건 만들어야 하는데 재료가 없다. 새로운 걸 찾아내는 길도 있지만 진부한 것들을 구원하는 길도 있다고 누가 그랬던가. 그때 호출된 게 당근이었다. 당류 함량이 높은 데다, 전시 상황에서도 흔하고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는 실질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창고를 굴러다니던 이 채소가 '설탕 대신'이라는 임무를 띠고 디저트의 세계에 데뷔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신인이 생각보다 유능했다. 단맛은 물론이고 묵직한 수분감까지 보태며 식감의 구조를 단단하게 잡았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생존력, 겨울 내내 창고를 지키는 저장성까지. 디저트 판에 나타난 가성비 용병이었달까.


다만 이때의 당근케이크는 크림치즈를 뒤집어쓴 지금의 호화로운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칠고 투박한, 겨우겨우 단맛 흉내만 낸 버티기용 음식에 가까웠다. 미트로프(meatloaf)와 비슷하다. 고기가 부족할 때 빵가루와 채소를 섞어 양을 불리던 음식. 당근케이크 역시, "어떻게든 달콤한 걸 먹고 싶다"는 인간의 절실함이 찾아낸 해답이었다.


그렇게 전시의 대체재로 태어난 이 소박한 케이크는 이후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미국은 늘 그래왔듯, 소박한 음식을 소박하게 두지 않았다. 당근에게는 곧 전혀 다른 운명이 주어진다.



당근은 거들 뿐

This is where America kicks in


미국에 와서 당근케이크는 아예 다른 장르가 된다. 채소의 단맛을 빌려 쓰던 이 검박한 디저트 위에 미국은 향신료와 크림치즈를 끼얹어버렸다.


가장 먼저 혀를 때리는 건 향이다. 시나몬, 넛맥, 정향 같은 따뜻한 향신료들의 하모니. 미국식 당근케이크는 사실상 스파이스 케이크의 문법 위에 서 있다. 여기에 묵직한 크림치즈 프로스팅이 올라가는 순간, 이 케이크는 대체식에서 축하식으로 격상된다.


이 미국식 얼굴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건 아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크림치즈 프로스팅이 더해졌고, 1970년대 헬시푸드 무드와 1980년대 뉴욕의 카페·델리 문화를 타며 지금의 비주얼로 완성됐다.


여기서 당근은 주인공이 아니다. 건강한 재료로서 입장은 했지만 실제 존재감은 향신료와 크림치즈가 가져가버린다. 당근케이크가 나 같은 당근 혐오자들에게도 먹히는 건 그래서다. 당근 맛으로 승부하는 게 아니라 익숙한 미국식 달콤함으로 진입하기 때문이다.


식감도 마찬가지다. 당근케이크는 매끈하게 정리된 음식이 아니다. 질감의 아카이브 그 자체다. 호두와 피칸, 건포도와 코코넛, 때로는 파인애플까지. 한 조각 안에 부서지고, 씹히고, 걸리는 것들이 다 들어 있다. 그리고 그 투박한 풍요로움은, 꽃보다 흙냄새를 먼저 떠올리게 하는 미국식 봄의 감각과도 닮아 있다.



꽃보다 정원에 가까운 봄

이 나라에선 당근이 요리가 아니라 장식이 된다.


계절은 기온보다 이미지로 먼저 온다. 누군가에게 봄이 벚꽃이고, 누군가에게 딸기인 것처럼. 자연이 도착하기 전에 문화가 먼저 그 계절의 색을 칠해둔다.


한국은 봄을 꽃잎과 분홍색, 피크닉 감성으로 기억한다. 반면 미국은 봄에 꽃 대신 정원을 통째로 쇼윈도 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토끼와 당근이 한 팀처럼 붙어 다니고, 부활절 달걀이 잔디에 굴러다닌다. 봄 시즌마다 미국의 매장이 당근 이미지로 도배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 사회가 봄이라고 학습한 기호들을 마케팅이 상품 언어로 꺼내 쓰기 때문이다.


이렇게 학습된 계절의 기호들은 우리가 음식을 인지하는 방식까지 바꾼다. 단순히 제철 식재료를 사용했다고 해서 '계절의 맛'이 완성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가 특정 메뉴를 보고 "봄이다!"라고 느끼는 건, 그 음식이 보내는 감각적 신호들이 우리 뇌 속에 저장된 계절 데이터와 맞아떨어지는 반응이다(Tran et al., 2023). 이런 맥락에서 당근케이크는 더없이 성실한 미국식 봄 디저트다. 미국이 봄을 그리는 설계도 한가운데 이미 당근이라는 강력한 시그널이 박혀 있으니 말이다.



굳이 당근이어야 하는 이유

당근: 저 이제 나가도 되지 않아요?


이제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간다.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굳이 당근?


지금의 당근케이크는 당근이 설탕 대신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당근 맛이 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얼핏 보면 이제는 빠져도 될 것 같다.


그런데 또 완전히 그렇진 않다. 당근은 이 케이크 안에서 맛이 전면에 느껴지는 재료는 아니지만, 시트의 수분감과 질감을 받쳐주는 쪽으로는 여전히 일하고 있다. 처음엔 기능이 전면에 있었다면 지금은 뒤로 물러나 바닥을 깔아주는 역할이다.


어쩌면 바로 그 점이 중요하다. 당근 맛이 선을 넘지 않기 때문에 이 케이크는 미국이 익숙하게 좋아하는 스파이스와 크림치즈 프로스팅의 문법 안에 무리 없이 스며들 수 있었다. 너무 낯설지도 않고 너무 지루하지도 않은 얼굴. 당근케이크가 쇼케이스 안에서 살아남은 건 이 균형 덕분이기도 하다.


더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당근은 이미 이 케이크의 건강 알리바이가 됐고, 봄의 아이콘이 됐다. "채소 들어간 케이크"라는 얼굴 하나만으로도 왠지 덜 죄책감 드는 무드를 만들고, 부활절 시즌이 오면 자연스럽게 봄의 세계관 안으로 들어간다.


처음엔 넣고 싶어서 넣은 재료가 아니었다. 그러다 향신료와 크림치즈 사이에서 존재감이 흐려졌다. 그런데도 끝내 잘리진 않았다.


익숙한 맛에 스며드는 유연함,
건강해 보이고 싶은 욕망,
그리고 미국이 봄을 설명하는 서사.

그 안에서 당근은 어느새 빼낼 수 없는 한 층이 되어 있었으니까.


자,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결국 당근케이크의 당근은 기능의 자리에서 시작해 서사의 자리로 갔다. 당근은 이 케이크 안에서 가장 크게 말하는 재료가 아니다. 하지만 빠지는 순간, 이 케이크는 자기 이야기를 하기 어려워진다.



Not every vegetable gets this ending.



어떤 재료는 맛보다 이야기로 남는다.


대체재에서 대체 불가능한 얼굴이 된 당근처럼.


당근은 그렇게

이 케이크의 이유가 됐다.





이 글은 미국맛 시즌3의 열두 번째 맛입니다.
처음부터 먹고 싶다면 프롤로그로.
지난 맛은 시즌1·시즌2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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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케이크... 좋아하세요? ฅᐢ..ᐢ₎
언젠가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답니다.
The name lies a little. The cake doesn’t.


※ 참고한 자료

[Edible Sacramento] The Sweet History of Carrot Cake

Tran et al. Seasonal multisensory eating experiences in Norway and Colomb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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