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나:돌아올 수 없지만 여전히 나를 위로하는 추억들
나는 사우나를 참 좋아한다. 주말마다, 때로는 일주일에 두 번씩도 찾을 정도다. 나의 최애 취미?라고나 할까.
그 시작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갔던 일요일 아침의 어느 날이었다. 엄마는 아버지께 검은색 목욕가방을 쥐어주시고, 아버지의 다른 한 손은 내 손을 잡아 문을 나섰다. 그때는 뜨거운 사우나가 좋아서 따라간 게 아니었다. 지금이야 각종 이온음료를 비롯하여 마실 것이 많지만 그때는 목욕을 마치고 마시는 병에 든 탄산음료 중 하나였던 '오란씨' 한 병. 아버지는 단숨에 비워내셨고, 나는 빨대를 꽂아 천천히 오래도록 마셨다. 그 작은 즐거움 하나로 매주 사우나를 '숙제'하듯이 따라갔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사우나는 내게 단순히 몸을 씻는 공간을 넘어섰다. 고민이 있을 때, 스트레스가 쌓였을 때, 중요한 결정을 앞두었을 때, 혹은 전날 술자리의 숙취를 풀고 싶을 때 찾는 곳. 때로는 오랜 친구와 만나 저녁자리를 갖기 전, 뜨거운 사우나실 안에서 그동안의 회포를 푸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여름엔 수영장 같은 냉탕에서 피서를 즐기고, 겨울엔 얼어붙은 몸을 녹이며 피로를 푸는 쉼터. 그렇게 십수 년을 오가다 보니, 그곳엔 웃지 못할 해프닝과 때로는 위급한 순간까지 수많은 이야기가 쌓여갔다.
남탕 특유의 묘한 풍경도 있다. 사우나실에 들어서면 모래시계를 뒤집고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시작된다. 괜히 남보다 오래 버티면 뭐랄까, 승리자가 된듯한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 나는 늘 10분쯤이 한계였는데, 그때 겪었던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다. 건식 사우나실 안에는 흡사 산신령을 연상시키듯 흰머리, 흰 수염, 흰 눈썹의 어르신과 온몸에 문신을 한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가고 나도 10분을 채우고 나왔지만, 두 사람은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결국 젊은이가 먼저 나오자, 그제야 바로 뒤이어 나온 어르신이 젊은이의 등을 손바닥으로 찰싹 내려치며 껄껄 웃으셨다.
"이보게, 젊은 사람이 참을성이 그렇게 없어서야 원."
말을 남기고는 곧장 냉탕으로 몸을 던지셨다. 어르신은 마치 당신 혼자만의 전투를 치루어낸 듯싶었다. 순간 정적이 흘렀지만, 이내 모두가 유쾌한 웃음으로 마무리된 '사우나 대전'이었다.
아찔한 기억도 있다. 뜨거운 열탕 안에서 오래 몸을 담그고 계시던 한 어르신. 뭔가 이상하다 싶어 다가가니 이미 의식을 잃으신 상태였다. 사람들과 함께 급히 꺼내어 심폐소생술을 하고 119에 연락했던 순간은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았을 정도로 생생하다.
그리고 오늘 찾아간 사우나. 처음으로 그곳에서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와 함께 온 어느 한 아빠를 바라보는데, 문득 내 유년 시절과 내 딸아이의 어린 시절이 교차했다. 작은 욕조 안에서 장난감을 가득 넣고 물장구치던 그 모습. 그런데 오늘 그 낯선 아이가 들고 있던 장난감이, 예전에 딸아이와 함께 쓰던 그것과 똑같았다.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스며들었다. 10년 전의 내 젊은 시절이 그리운 건지, 아니면 이제는 사춘기를 겪으며 아빠보다 친구가 더 좋은 나이가 되어버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시절 딸아이와의 추억이 아득하게 느껴져서인지.
그때 또 다른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내 아버지 또래의 어르신 등을 밀어드리는 아들의 모습. 그 순간, 마음 한켠이 크게 흔들렸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아버지와의 목욕을 피하기 시작했을까. 생각해 보면 '아빠'라 부르던 시절이 지나,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불러야 했던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반쯤은 강요된 듯한 그 호칭의 무게가 낯설고 서먹해지면서, 자연스레 아버지와 함께하는 사우나라는 공간도 멀어졌다.
그러나 뜨거운 증기 속에서 불현듯 깨닫는다. 세월은 아버지의 등을 넓디넓은 들판에서 한없이 작아진 언덕으로 바꿔놓았지만, 그 위에 스민 땀과 시간은 여전히 나를 품어주던 기억 그대로라는 것을.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언젠가 다시 늦지 않게, 한없이 쪼그라든 그 등을 천천히 밀어드리고 싶다. 잊혀진 호칭과 거리를 녹여내듯, 사우나의 뜨거운 김 속에서 아버지와 나 사이의 시간이 다시 이어지기를.
그리고 나는 바란다. 앞으로도 사우나는, 내 삶의 무게를 덜어내고 다시 나를 단단하게 세워주는 휴식처로 오랜 시간 남아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