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nch Drunk' : 처맞기 전까지는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이 있지
※Punch drunk:반복적인 충격으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를 가리키는 복싱용어
나는 한때 나 자신이 '복서'라고 생각했다. 아니, '아마추어 복서' 정도는 된다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런데, '복싱 수련생'이었다.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정확히 말하자면 그저 '복싱 애호가'였던 것 같다.
2년 남짓 복싱을 배웠다. 목표는 프로 라이선스를 따는 것. 처음으로 복싱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의 설렘과 수련생들의 열정 가득한 그곳의 기분 좋은 땀냄새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내 전공은 태권도였다.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태권도 도장에서 몸을 굴렸고, 그결과 4단에 사범 자격까지 갖췄다. 익숙하고 잘하는 운동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늘 복싱에 마음이 끌렸다. 보는 것도, 직접 뛰는 것도 복싱이 훨씬 재미있었다.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스포츠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언제나 복싱을 최고의 운동이라 예찬하곤 했다. 그러면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야, 넌 태권도 전공자잖아. 태권도가 최고라고 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럴 때마다 웃으며 대꾸했지만, 내 속마음은 변함없었다. 내겐 복싱이 단연 최고였다.
복싱을 배운 지 1년이 넘어갈 무렵, 매일의 루틴은 같았다. 테이핑을 감고 줄넘기로 시작해 체력운동으로 몸을 풀고, 관장님과 미트 치기를 한 뒤 샌드백과 쉐도우로 마무리. 태권도에는 승급에 따른 품세가 있지만, 복싱엔 그런 과정이 없다. 복싱의 기본은 단 네 가지 펀치, 잽·스트레이트·훅·어퍼컷. 여기에 '바디샷'과 '위빙'을 더해 무궁무진한 변주가 만들어지지만, 어느 순간 나는 다 배운 것 같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자신감은 끝없이 부풀었고, 스파링 욕심이 차올랐다. 하지만 관장님은 늘 말했다. "아직은 이릅니다. 조금 더 다져야 해요." 그렇게 말리면 말릴수록 더 하고 싶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나는 폭탄선언을 했다. "오늘만큼은 꼭 스파링을 하고 싶습니다. 안 시켜주시면 더는 못 다닐 것 같습니다."
마지못해 관장님은 말씀하셨다. "오늘 엇비슷한 상대가 출석하지 않아 김사범 님과 괜찮겠습니까?" 상대는 나와 비슷한 시기의 수련생이 아니었다. 그날 링 위에서 나를 받아줄 상대는, 늘 체육관에 상주하시는 동양 챔피언 출신 김사범 님이었다. 마우스피스도 없이, 단지 헤드기어만 쓴 채 나는 링에 올랐다. 난생처음으로 링 위에 오르자 흥분과 설레임으로 심장이 요동쳤다. 하지만 그 마음은 1분도 채 가지 않았다. 공이 울리자마자 나는 배운 모든 펀치를 쏟아냈다. 잽, 스트레이트, 훅, 어퍼컷.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정신없이 휘둘렀다. 하지만 사범님의 가드는 단단했고, 단 한 대의 유효타도 먹이지 못했다. 30초가 지나자 체력이 급격히 바닥났다. 1분이 조금 넘어가자 사범님의 펀치가 날아왔다. 묵직한 한 방, 두 방. 나는 웅크린 채 가드만 올리고 있었다. 그때 날카롭게 들려온 목소리. "웅크리지만 말고! 가드사이로 나를 봐야죠, 상대를 봐야죠!" 그 순간, 눈앞에서 별이 번쩍였다. 그리고 그대로 쓰러졌다.
잠깐의 기절. 눈을 뜨자 관장님과 사범님이 나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주변엔 그 짧은 새 많은 관원들이 모여 있었다. 아프기도 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땅이 갈라진다면 그 속으로 숨고 싶을 만큼 창피했다.
그날 이후 나는 체육관에 나가지 않았다. 부끄러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맞은 두려움이 더 컸다. 걸려오는 관장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왜 체육관에 나가지 않느냐는 주변 사람들에게는 대충 둘러댔다. "내가 프로 선수 할 것도 아닌데, 뭐... 적당히 운동 한 거지."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자만했고, 준비되지 않은 욕심을 부렸고, 겸손을 잃었었다.
그 사건? 이후 어느덧 6년 여가 흘렀다. 내가 다니던 체육관은 다른 어딘가로 이전했고 몸은 그때의 느낌을 잊었고, 줄넘기조차 자신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여전히 복싱에 머물러 있다. TV 중계로 보는 경기 하나에도 가슴이 뜨겁다. 그리고 요즘, 동네에 새로 생긴 복싱 체육관이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두려움은 옅어지고, 다시 설렘이 찾아온다. 내 나이 곧 반백살. 내 나이가 어때서? 언젠가 다시 링 위에 서서 나를 시험해보고 싶다. 그때는 쓰러져도 좋다. 별을 보더라도, 이번엔 웃으면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