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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의 거리두기

사회적 거리 두기만큼 친할수록 거리가 필요한 이유

by GOLDRAGON

오래된 인연일수록 더 많은 공감과 거리, 그리고 존중이 필요하다.

너무 가까워서 무너진 우정은, 다시 세워야 할 [성]과 같다.


36년 친구, 너무 가까워서 상처가 났다

내게는 무려 36년을 함께한 친구가 있다.

10대 시절의 유치한 장난부터, 40대의 삶의 무게까지 모든 걸 함께 겪어온 유일한 친구다.
각자의 집안일부터 서로의 실패, 사랑, 고민, 병까지...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아는 사이.
누군가 말했듯, "인생에서 눈 감기 전까지 곁에 있을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성공한 삶"이라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이미 인생을 크게 얻은 셈이었다.

우리는 자주 만났다. 많을 땐 한 달에 3~4번씩.
서로 일상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털어놓고, 술 한 잔에 마음을 쏟아내며 살아냈다.
'맛집 찾아 삼만리'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이 동네 저 동네를 떠돌며 밥을 먹고, 다시 한 주를 살아갈 에너지를 얻곤 했다. 그 시간들이 너무 좋아서였을까.

마음 한켠에서 형용할 수 없는 불안함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건 '친구 사이의 거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가까움이 불러온 건, '존중의 실종'

오래된 친구는 가족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쉽게 상처 주는 사이도 가족이고 친구다.
우리는 너무 편했다. 그래서 말을 할 때 한 번 더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갔고, 고민하고 판단 하기보다 감정이 먼저였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서로의 말이 공감이 아니라 비난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그날도 그랬다.
나는 그냥 나의 계획과 실행에 대한 마음을 털어놓고, 위로와 격려 한마디 듣고 싶었다.
그저 "그렇구나, 지지한다. 잘 선택했어"라는 말이면 족했는데 돌아온 건 예상치 못한 비판이었다.

순간, 마음이 요동쳤다. 화도 났고, 서운함도 컸다.
설명하듯 내 입장을 풀어내는 나 자신이 초라해졌고, "왜 내가 이해받기 위해 이렇게까지 말해야 하지?" 싶은 감정이 북받쳤다. 억울했다. 그렇게 우리는 상처를 남긴 채 헤어졌고, 지금까지 한 달 넘게 연락이 없다.

나이를 먹을수록, 감정의 공백은 더 깊어진다

이전에도 몇 번, 다툼과 공백이 있었지만 그땐 어리고 단순해서였을까? 금세 다시 풀렸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서로의 삶이 복잡해지고, 자존심도 커지고, 먼저 연락하는 게 어쩐지 패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 침묵의 시간을 깨뜨릴 누구도 없어 보인다.

생각해 본다. 정말 우리가 자주 만나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가끔 만나 반가움을 나눴다면 어땠을까?
존중이란, 자주 만나서 생기는 게 아니라 거리를 잘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생기는 것은 아니었을까?

진짜 친구라면, 질투가 없을까?

문득 이런 생각도 스쳐 지나간다.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처럼, 친구가 잘 될 때 진심으로 기뻐하지 못한 적은 없었을까?
나는 과연 한 번도 친구의 자랑에 배가 아픈 적이 없었을까?

솔직해지자면, 인간이란 감정의 동물이기에 질투라는 감정 자체를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고, 얼마나 빨리 내려놓느냐가 우정을 결정짓는 요소일지도 모른다.
친구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건, 그만큼 성숙한 감정 훈련이 필요한 일이다.


결국, 존중이 사라진 관계는 망가진다

결국 이 모든 일의 본질은 '존중'이었다.
아무리 오래된 사이여도, 아무리 자주 만나더라도 경계 없는 친밀함은 오히려 관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
편안함과 무례함은 한 끗 차이이고, 친함과 이기심 역시 뇌 한 가닥만 스치면 뒤바뀔 수 있다.

서로의 감정에 상처를 남긴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하다.
하지만 이 침묵이 단절이 아니라 성찰의 시간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마주하게 되겠지만, 그때는 서로에 대한 존중을 더함으로 허물없는 거리에서 웃을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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