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이상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배려하겠다는 말이 누군가를 침묵시키는 무기가 되고, 차별을 없애겠다던 운동이 새로운 계급을 만들어냅니다. 약자를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 PC 주의)'은 이제 그 누구도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 거대한 검열 체계로 변질되었습니다. 선한 의도로 시작된 이 운동은 왜 이토록 왜곡되었을까요. 그 뿌리를 파고들면, 우리는 한 가지 결정적인 부재와 마주하게 됩니다. PC 주의에는 진정한 비움의 철학이 없었습니다. 연결의 감각이 없었습니다. 하나됨의 자각이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 오직 비대해진 자아와 이기심만이 있었습니다.
말의 폭력과 최초의 각성
1970년대 미국 대학가에서 시작된 PC 주의는 분명 정당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수백 년 동안 흑인을 향해 던져진 모욕적 언어,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 장애인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말들이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이 언어들은 단순한 소리의 나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칼날이었습니다. 말은 사람의 존엄성을 베어내고, 그들의 정체성을 짓밟았으며,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작동했습니다.
PC 주의는 이 폭력적 언어를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negro를 African American으로, cripple을 person with disability로 바꾸었습니다. 말을 바꾸면 사고가 바뀌고, 사고가 바뀌면 현실이 바뀔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 믿음 자체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언어는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틀이며, 우리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형성합니다. 존중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존중하는 관계를 만드는 첫걸음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PC 주의는 언어를 바꾸는 데 집중했지만, 정작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내면을 바꾸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면의 변화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차별적 표현을 쓰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왜 그 표현이 폭력인지, 타인의 고통이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우리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하나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외적인 행동 규범만을 제시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오류였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밖에서 안으로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합니다. 규칙으로 억누른 차별은 사라지지 않고 지하로 숨어듭니다. 표면적으로는 올바른 말을 하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경멸과 분리감이 자리 잡습니다. PC 주의는 증상을 치료했지만 병의 뿌리는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비움 없는 배려의 역설
진정한 배려는 비움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먼저 나의 편견, 나의 판단, 나의 이익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타인의 목소리가 왜곡되지 않고 내 귀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이것을 케노시스 (Kenosis)라고 불렀습니다. 신이 스스로를 비워 인간이 되었듯, 우리도 우리의 자아를 비워야 타인과 진정으로 만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불교는 무아 (無我, anātman)를 말했습니다. 나라는 고정된 실체는 본래 없으며, 우리가 집착하는 자아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입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텅 빈 그릇만이 쓸모 있다고 했습니다. 가득 찬 그릇은 더 이상 무엇도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PC 주의는 이 비움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PC 주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더 강하게 붙잡으라고 요구했습니다. 나는 여성이다, 나는 흑인이다, 나는 성소수자다, 나는 장애인이다. 이 정체성이야말로 당신의 본질이며, 이 정체성을 통해 당신은 억압받아왔고, 이 정체성으로 당신은 보상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정체성은 권리의 근거가 되었고, 피해의 증거가 되었으며, 도덕적 우월성의 표지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아는 비워지기는커녕 오히려 비대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더욱 깊이 갇히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렇게 억압받았다, 나는 이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 자아는 더 견고해졌고, 경계는 더 두터워졌으며, 분리감은 더 심화되었습니다. PC 주의는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그들의 정체성이라는 감옥에 더 단단히 가두어버렸습니다.
더 나아가, PC 주의는 피해자 의식을 하나의 자산으로 만들었습니다. 누가 더 억압받았는가를 놓고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피해의 정도가 발언권의 크기를 결정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상처받았는지를 증명하려 애썼고, 그 상처를 통해 도덕적 권위를 얻으려 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치유가 아니었습니다. 상처를 끌어안고 그것을 정체성으로 삼는 것은, 상처를 영구화하는 일입니다. 불교 심리학에서 말하는 집착 (upādāna, 우빠다나)의 가장 교묘한 형태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에조차 집착할 수 있습니다.
비움이 없는 배려는 진정한 배려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나의 이익과 정체성에 꽉 붙잡혀 있는 상태에서 타인을 배려한다는 것은, 결국 나의 도덕적 우월감을 확인하거나 나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PC 주의가 점점 공격적이고 배타적으로 변해간 이유입니다. 진정으로 자아를 비운 사람은 부드럽고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자아에 꽉 붙잡힌 사람은 방어적이고 경직되어 있습니다. PC 주의는 점점 더 많은 금기를 만들고, 점점 더 가혹한 처벌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배려가 아니라 통제였습니다.
연결의 망각과 분열의 심화
비움의 다음 단계는 연결의 자각입니다. 내가 나라는 고정된 경계를 내려놓을 때, 나는 비로소 나와 세계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불교의 연기 (緣起, pratītyasamutpāda) 사상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존재는 독립적으로 홀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원인과 조건의 그물망 속에서 서로 의지하며 존재합니다. 스토아 철학의 심파테이아 (sympatheia)는 우주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공명하며, 한 부분의 움직임이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합니다.
이 연결의 감각이 살아있을 때, 타인의 고통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타인이 차별받는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아픕니다. 그것은 도덕적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그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몸의 다른 부분들과 같습니다. 손이 다치면 머리가 자동으로 반응하듯, 타인의 상처는 나의 상처로 느껴집니다. 이런 연결감 속에서 우러나오는 배려는 억지스럽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러나 PC 주의는 이 연결의 감각을 키우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사람들을 더욱 분리시켰습니다. PC 주의는 세상을 억압자와 피억압자로 나누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로, 특권층과 소외층으로 나누었습니다. 이 구분은 점점 정교해지고 세분화되었습니다. 백인 남성 이성애자는 최고의 특권층이 되었고, 유색인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은 가장 억압받는 층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무수한 등급이 매겨졌습니다.
이 구분은 현실의 불평등을 드러내기 위한 분석 도구로 시작되었지만, 곧 사람들을 가르는 장벽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특권을 가진 사람이니 이해할 수 없다. 당신은 남성이니 여성의 고통을 알 수 없다. 당신은 백인이니 인종차별을 논할 자격이 없다. 당신은 건강하니 장애인을 대변할 수 없다. 정체성은 소통의 다리가 아니라 소통을 막는 벽이 되었습니다.
이 논리의 끝에는 완전한 고립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우리의 정체성에 완전히 갇혀 있고,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의 경험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영원히 타자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공감은 불가능해지고, 대화는 무의미해지며, 연대는 환상이 됩니다. 각자는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감옥에 갇혀 다른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향해 소리칠 뿐입니다.
실제로 PC 주의가 지배하는 공간에서는 진정한 대화가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습니다. 대신 서로를 판단하고, 분류하고, 비난합니다. 당신은 어느 집단에 속하는가. 당신은 특권을 가졌는가, 억압받았는가. 당신의 발언은 당신의 정체성에 맞는가. 이런 질문들이 대화를 지배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그의 관점을 이해하려 하고, 나와 다른 생각을 통해 배우려는 자세는 사라졌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PC 주의가 공감 능력 자체를 약화시켰다는 점입니다. 공감은 나와 타인 사이의 경계가 일시적으로 흐릿해질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나는 잠시 나의 관점을 내려놓고, 타인의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봅니다. 이것은 내가 나를 비우고, 나와 타인이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PC 주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더 꽉 붙잡으라고 요구했습니다. 동시에 타인의 경험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이것은 공감의 씨앗을 말리는 일이었습니다.
연결의 망각은 또 다른 왜곡을 낳았습니다. 바로 대리 분노의 폭발입니다. 진정으로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그의 고통에 슬퍼하고, 그를 돕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 슬픔은 부드럽고 건설적입니다.
반면, 연결감 없이 단지 도덕적 의무감이나 정체성 정치의 논리로 타인을 대할 때, 우리의 반응은 공격적이고 파괴적이 됩니다. 실제로 피해를 당하지 않은 사람들이 피해자를 대신해 가장 격렬하게 분노하는 현상이 PC 주의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분노는 진정으로 피해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과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피해자는 이 분노의 주인공이 아니라 도구가 될 뿐입니다.
하나됨의 부재와 새로운 계급의 탄생
비움이 깊어지고 연결이 자각될 때,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됨의 진리와 마주합니다. 나와 너는 결국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생명이 다양한 형태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힌두교의 아드바이타 베단타 (Advaita Vedanta)는 모든 개별적 자아 (ātman, 아트만)가 궁극적으로는 우주적 자아 (Brahman, 브라흐만)와 하나라고 가르칩니다. 기독교 신비주의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Meister Eckhart, 1260-1328)는 신의 근거와 영혼의 근거가 하나의 근거라고 말했습니다. 이슬람 수피즘의 이븐 아라비 (Ibn Arabi, 1165-1240)는 존재의 단일성 (waḥdat al-wujūd, 와흐다트 알우주드)을 말하며, 피조물과 창조주의 구분이 사라지는 경지를 묘사했습니다.
이 하나됨의 자각은 가장 심오한 윤리적 변화를 가져옵니다. 타인을 해치는 것은 나를 해치는 것이 되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이때 윤리는 더 이상 외부에서 부과된 규칙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본성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표현입니다. 예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이웃과 나의 몸이 본래 하나라는 진실을 깨달은 자의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PC 주의에는 이 하나됨의 철학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습니다. PC 주의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하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당신과 나는 다른 집단에 속하며,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차이는 영원하며, 우리는 이 차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 논리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계급 사회를 만들어냈습니다. 과거에는 귀족과 평민으로 나뉘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뉘었습니다. PC 주의는 억압자와 피억압자라는 새로운 계급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계급은 과거의 어떤 계급보다 더 복잡하고 정교했습니다. 인종, 성별, 성적 지향, 장애 유무, 심지어 정신 건강 상태까지 모든 것이 계급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계급 사회에서는 피억압자 계급이 도덕적 우월성을 가집니다. 그들의 말은 절대적 권위를 얻고, 그들의 감정은 최우선으로 보호받아야 하며, 그들의 요구는 무조건 수용되어야 합니다. 반면 억압자 계급, 특히 백인 이성애자 남성은 원죄를 타고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며, 아무리 노력해도 이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신의 특권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사죄하며, 침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원죄 개념을 세속화한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원죄는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것이며, 신의 은총을 통해 구원받을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반면 PC 주의의 원죄는 특정 집단에만 부과되며, 어떤 구원의 가능성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용서 없는 종교이며, 구원 없는 죄악 체계입니다.
더 나아가, 이 계급 체계는 끊임없이 세분화되고 복잡해졌습니다. 교차성 (intersectionality) 이론은 여러 억압이 교차하는 지점을 분석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억압의 위계를 만드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누가 더 억압받았는가를 놓고 경쟁이 벌어졌고, 피해자 계급 내부에서도 서열이 매겨졌습니다. 이것은 연대가 아니라 분열이었습니다.
하나됨의 철학이 있었다면, PC 주의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갔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르지만, 그 차이는 표면적인 것이며, 깊은 곳에서 우리는 하나의 인류라는 인식이 있었다면, 서로를 적대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억압받은 사람의 고통이 곧 우리 모두의 고통이며, 누군가의 해방이 곧 우리 모두의 해방이라는 감각이 있었다면, 분열이 아니라 진정한 연대가 가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PC 주의는 이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했습니다.
이기심의 변장: 도덕의 무기화
PC 주의가 본래의 선한 의도에서 벗어나 왜곡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결국 이기심의 또 다른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는 타인을 배려한다고 했지만, 그 배려의 이면에는 자신의 이익과 우월감을 추구하는 욕망이 숨어 있었습니다.
먼저, PC 주의는 도덕적 우월감을 얻는 가장 쉬운 수단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PC적으로 올바른 말을 함으로써, 실제로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트위터에서 올바른 해시태그를 쓰고, 차별적 표현을 쓴 사람을 비난하며, 정치적으로 올바른 입장을 표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실제로 가난한 사람을 돕거나, 차별받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무언가를 내어놓거나, 구조적 불평등을 바꾸기 위해 행동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말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이것은 예수가 비판했던 바리새인의 위선과 정확히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세세한 규칙을 지키며 자신들의 의로움을 자랑했지만, 정작 율법의 핵심인 정의와 자비와 신실함은 버렸습니다. PC 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어의 세세한 규칙을 지키며 자신들의 도덕성을 자랑하지만, 정작 진정한 공감과 사랑과 연대는 실천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PC 주의는 자신의 적을 만들고 그를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메커니즘이 되었습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투사 (projection)와 그림자 (shadow) 현상이 여기서 작동합니다. 칼 융 (Carl Jung, 1875-1961)은 우리가 자신 안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부분을 타인에게 투사하여 그를 적으로 만든다고 했습니다. PC 주의자들은 자신 안에 있는 편견, 우월감, 공격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이것을 타인에게 투사합니다. 그리고 그 타인을 공격함으로써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환상을 유지합니다.
이 과정에서 PC 주의는 점점 더 비관용적이고 전체주의적으로 변했습니다. 누군가가 PC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말을 하면, 그는 즉시 적으로 낙인찍혔습니다. 그에게는 변명의 기회도, 설명의 기회도, 배움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즉각적인 단죄와 사회적 처형이 뒤따랐습니다. 취소 문화 (cancel culture)는 이 현상의 극단적 표현입니다. 과거의 발언, 실수, 심지어 농담까지 파헤쳐서 사람을 파괴합니다. 이것은 정의가 아니라 린치입니다.
이 모든 것의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자신이 공격받을까봐, 자신이 배제될까봐, 자신이 도덕적으로 부족한 사람으로 보일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더욱 공격적으로 타인을 비난하고, 더욱 엄격하게 규칙을 적용하며, 더욱 큰 소리로 자신의 올바름을 주장합니다. 이 두려움은 사랑의 반대편에 있는 감정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됨을 자각한 사람은 배제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근본적으로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결국 PC 주의는 이기심을 도덕의 언어로 포장한 것입니다.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고, 자신의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욕망이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위장되었습니다. 이것이 PC 주의가 본래의 선한 의도에서 멀어진 결정적 이유입니다.
침묵의 제국과 진실의 질식
PC 주의의 가장 파괴적인 결과는 진실이 질식당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진실을 말하지 못합니다. 아니, 진실을 생각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어떤 생각이 PC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면, 그 생각 자체가 금지됩니다. 조지 오웰 (George Orwell, 1903-1950)이 『1984년』에서 묘사한 사고죄 (thoughtcrime)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단순히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할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을 탐구할 자유입니다. 인간은 대화와 논쟁을 통해 진실에 가까이 다가갑니다. 서로 다른 관점이 충돌하고, 증거가 검토되고, 논리가 검증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조금씩 더 나은 이해에 도달합니다. 하지만 특정한 질문이 금지되고, 특정한 답이 미리 정해져 있으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처벌받는다면, 진실을 향한 여정은 멈춥니다.
더 위험한 것은, 이 검열이 외부에서만이 아니라 내부에서도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검열합니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이 PC적으로 올바른지 먼저 점검합니다. 만약 올바르지 않다면, 그 생각을 즉시 억압합니다. 이것은 자유로운 사고의 죽음입니다. 프로이트 (Sigmund Freud, 1856-1939)가 말한 초자아 (superego)가 병적으로 비대해진 상태입니다. 내면의 감시자가 모든 생각을 감시하고 통제합니다.
이 과정에서 언어 자체가 왜곡됩니다. 단어들은 원래의 의미를 잃고, PC 주의가 부여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예를 들어, 관용 (tolerance)이라는 단어는 본래 내가 동의하지 않는 것을 참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PC 주의에서 관용은 모든 것을 동등하게 긍정해야 한다는 의미로 변질되었습니다. 차별 (discrimination)은 본래 구별하고 판단한다는 중립적 의미였지만, 이제는 절대악이 되었습니다. 언어가 정치적 도구가 되면서, 명료한 사고가 불가능해졌습니다.
진실의 질식은 또 다른 역설을 낳습니다. PC 주의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진실을 억압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약자에게 가장 큰 해를 끼칩니다. 왜냐하면 진실한 대화가 없으면 진정한 이해도, 진정한 해결책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지하로 숨어듭니다. 그리고 언젠가 더 큰 폭발로 터져 나옵니다.
역사는 이것을 증명합니다. 20세기 초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특정 사상을 금지했습니다.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억압된 사상은 지하에서 더 과격해졌고, 결국 나치즘이라는 괴물로 부활했습니다. 소련은 모든 비판을 억압하고 공산주의 이념만을 허용했습니다. 결과는 수천만 명의 죽음과 체제의 붕괴였습니다. 억압은 결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문제를 키울 뿐입니다.
진실을 말할 자유가 없는 곳에는 진정한 배려도, 진정한 정의도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실이야말로 모든 선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위에 세워진 선은 결국 무너집니다.
돌아가야 할 길: 비움, 연결, 하나됨으로
PC 주의의 실패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외적인 규칙과 강제만으로는 진정한 변화를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표면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내면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비움, 연결, 하나됨의 철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먼저 비움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 편견, 판단, 욕망을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명상, 기도, 성찰을 통해 우리 마음의 중심을 비워야 합니다. 이것은 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나를 발견하는 과정입니다. 고정되고 경직된 자아에서 벗어나, 유연하고 열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연결의 감각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개념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을 넘어, 실제로 그것을 느껴야 합니다. 자연과 시간을 보내고, 타인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며, 모든 생명과의 친족 관계를 자각해야 합니다. 이 연결의 감각이 살아있을 때, 배려는 자연스러운 표현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됨의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지적인 이해를 넘어선 직접적인 체험을 요구합니다. 신비주의 전통들이 가르쳐온 명상과 관상의 길을 따라, 우리는 모든 분리가 환상이며 하나됨이 유일한 실재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깨달음이 있을 때,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 됩니다.
PC 주의가 실패한 지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봅니다. 강제가 아닌 자유, 분열이 아닌 연대, 억압이 아닌 해방의 길입니다. 이 길은 더 어렵습니다. 내면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이 진정한 길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 마음의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변할 때, 세상도 변합니다.
차별과 억압은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존중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목표에 도달하는 길은 PC 주의가 걸어간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 깊은 곳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비움에서, 연결에서, 하나됨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PC 주의의 실패에서 배워야 할 교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