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2장: 일상 속 신성: 평범함의 영성

by 이호창

제8-22장: 일상 속 신성: 평범함의 영성



8-22.1. 거룩한 평범함: 먹고, 자고, 일하는 순간들



아침 식사의 신비


당신이 아침에 빵 한 조각을 입에 넣는 순간을 떠올려보십시오. 배가 고파서, 습관이 되어서, 혹은 그저 시간이 되어서 먹습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의 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하시디즘 (Hasidism)의 창시자 바알 솀 토브 (Baal Shem Tov, 1700년경-1760)는 이 평범한 순간 속에서 우주적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그는 먹는다는 행위가 단순히 육체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생물학적 과정이 아니라, 흩어진 신성의 불꽃을 구출하는 영적 작업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카발라는 셰비라트 하켈림 (Shevirat HaKelim)이라는 우주적 파국을 이야기합니다. 그릇들이 깨지면서 신성한 빛의 조각들인 니초초트 (Nitzotzot)가 온 세상에 흩어졌습니다. 이 불꽃들은 돌멩이 속에도, 나무 속에도, 그리고 당신이 먹는 빵 속에도 갇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빵을 먹을 때, 그 안에 갇힌 신성의 불꽃을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해방은 자동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먹는 행위에 카바나 (Kavvanah), 즉 깨어있는 의도와 집중을 담아야 합니다.


바알 솀 토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은 모든 곳에 계시지만, 우리가 그분을 찾으려 하지 않으면 감춰진 채로 머뭅니다. 그러므로 밥을 먹으면서도 신을 의식하고, 이 음식이 생명을 유지하게 해주는 신의 선물임을 깨닫는다면, 그 순간 먹는 행위는 기도가 됩니다. 입 안에서 씹히는 빵 한 조각이 우주를 복원하는 티쿤 (Tikkun)의 도구로 변화합니다. 이것이 하시디즘이 발견한 혁명적 통찰입니다. 특별한 의식이나 복잡한 명상 없이도, 일상의 가장 평범한 행위 속에서 신과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우리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뉴스를 보고, 내일 할 일을 걱정합니다. 먹는 행위 자체에는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단 한 끼의 식사라도 온전히 깨어서 먹어보십시오. 음식의 맛과 질감을 느끼고, 이 음식이 당신에게 오기까지 거친 모든 과정을 생각해보십시오. 씨앗을 뿌린 농부의 손, 햇빛과 비, 흙의 영양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생명의 신비를 느껴보십시오. 그 순간 당신의 식탁은 신성한 제단이 됩니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


밤이 깊어지고 당신이 침대에 누워 잠에 빠져드는 순간, 카발라는 이를 작은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잠을 자는 동안 당신의 의식은 육체를 떠나 다른 세계로 여행합니다. 네페쉬 (Nefesh), 즉 생명혼은 몸에 남아 호흡을 유지하지만, 더 높은 영혼의 층위인 루아흐 (Ruach)와 네샤마 (Neshamah)는 위로 상승하여 신성의 근원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받아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은유가 아닙니다. 당신이 잠에서 깨어날 때 느끼는 상쾌함은 육체가 휴식을 취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영혼이 그 근원과 다시 접촉했기 때문입니다. 밤새 당신의 영혼은 아인 소프 (Ein Sof)의 무한한 빛을 마시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유대 전통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감사의 기도를 바칩니다. 모데 아니 (Modeh Ani)라는 이 짧은 기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당신 앞에 감사합니다. 살아계시고 영원하신 왕이여, 당신이 나의 영혼을 자비로 돌려주셨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매일 아침의 부활입니다. 당신은 어제의 당신이 아닙니다. 밤 동안 일어난 영혼의 여행을 통해, 당신은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이 깨달음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한다면, 하루의 모든 순간이 선물로 느껴질 것입니다. 잠자리에 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 없이 잠에 빠져드십시오. 당신의 영혼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신은 밤새 당신을 지켜줄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불면증으로 고통받습니다.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은 단지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이 쉼을 거부당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낮 동안 너무나 많은 정보와 자극에 시달리고, 끝없는 걱정과 계획으로 마음을 채웁니다. 영혼이 위로 상승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잠자리에 들기 전, 단 몇 분이라도 조용히 앉아 호흡을 가다듬으십시오.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을 놓아주고, 내일에 대한 걱정도 내려놓으십시오. 그렇게 마음을 비우면, 영혼은 자연스럽게 그 고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일하는 손


당신이 하는 일이 무엇이든, 그것은 티쿤 올람 (Tikkun Olam), 즉 세상의 복원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사무실에서 문서를 작성하는 일도, 공장에서 기계를 다루는 일도, 집안을 청소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의 가치는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해 보이느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일을 하는 사람의 의도와 마음가짐에 달려있습니다.


하시디즘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신을 섬기는 데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가 따로 없습니다. 토라를 연구하는 학자도, 가축을 돌보는 목동도, 모두 똑같이 신을 섬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면서 데베쿠트 (Devekut), 즉 신과의 달라붙음 (합일)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일을 하면서도 신을 의식하고, 이 일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 일은 거룩해집니다.


바알 솀 토브의 제자 중 한 명이었던 랍비 주시아 (Rabbi Zusya)는 가난한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작은 가게에서 구두를 고치며 살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성인처럼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구두 한 켤레를 고칠 때마다, 그 신발을 신을 사람이 편안하게 걸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고, 그 사람의 발걸음이 선한 곳으로 향하기를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구두를 고치는 일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세상을 치유하는 성스러운 작업이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에서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일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되었고, 우리는 주말과 퇴근 시간만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일터에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 삶의 대부분은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카발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하는 일이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그 일을 통해 흩어진 신성의 불꽃을 모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손으로 만든 제품이, 당신이 제공한 서비스가, 누군가의 삶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만든다면, 그것이 바로 티쿤입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 잠깐 멈춰서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내가 하는 이 일이 누군가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이 일을 통해 세상에 어떤 선을 더할 수 있을까. 이런 의식을 가지고 일한다면, 가장 평범한 일상의 노동도 거룩한 봉사가 됩니다. 당신의 일터는 성전이 되고, 당신의 손은 신의 손이 됩니다.









8-22.2. 관계 속의 세피로트: 사랑과 우정에서 신성 발견하기



우리는 흔히 신성을 찾기 위해 일상에서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깊은 명상에 잠기거나, 고독한 수행의 길을 걸어야만 신을 만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카발라는 정반대의 진리를 가르칩니다.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관계 속에서, 바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우정을 나누는 그 순간 속에서 신성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생명나무의 열 가지 세피로트는 단지 추상적인 우주 원리가 아닙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타인과 맺는 모든 관계의 숨은 구조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대화 한마디, 친구와 함께 웃는 짧은 순간, 가족을 위해 차려내는 저녁 식사, 이 모든 평범한 행위들이 사실은 신성한 빛이 흐르는 통로입니다. 카발라는 우리에게 관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라고 초대합니다. 단순히 감정적 만족이나 심리적 위안을 넘어서, 관계 자체가 우주적 치유의 작업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헤세드와 게부라: 사랑 안에서 균형 찾기


사랑의 관계는 두 개의 반대되는 힘 사이에서 춤을 춥니다. 하나는 헤세드 (Chesed)입니다. 이것은 무한히 베풀고 싶어 하는 자비의 충동이며, 상대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고 싶어 하는 확장의 에너지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헤세드의 세피라를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고, 끝없이 관대하고 싶어 합니다. 헤세드는 경계를 모르고 흘러넘치려 합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또 다른 힘이 필요합니다. 게부라 (Geburah)가 그것입니다. 게부라는 엄격함이고 경계이며, 때로는 거절할 수 있는 힘입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상대방의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때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제한을 가할 수 있어야 하고, 건강한 경계를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게부라가 없는 헤세드는 상대방을 망칩니다. 끊임없이 베풀기만 하면 상대방은 의존적이 되고 스스로 설 힘을 잃어버립니다.


건강한 관계는 헤세드와 게부라가 조화를 이루는 곳에서 꽃핍니다. 너그럽게 베풀 때와 단호하게 경계를 세울 때를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아이가 잘못된 길로 갈 때 바로잡아주는 엄격함도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헤세드와 게부라가 함께 작동하는 모습입니다. 이 둘의 균형이 깨지면 관계는 병들어갑니다. 지나친 헤세드는 집착과 의존으로 변질되고, 지나친 게부라는 냉정함과 거리감을 만들어냅니다.


카발라는 우리에게 관계 속에서 이 두 힘의 균형을 의식적으로 찾으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내가 누군가와 나누는 대화 속에서, 나는 헤세드로 흐르고 있는지 게부라로 수축하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반대편의 힘을 불러와 균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균형을 잡아가는 매 순간이 우주의 조화를 회복하는 티쿤 (Tikkun)의 작업이 됩니다.


티페레트: 관계의 중심에서 아름다움 발견하기


헤세드와 게부라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티페레트 (Tiferet)입니다. 티페레트는 아름다움이며 조화이고, 생명나무의 심장입니다. 건강한 관계는 결국 이 티페레트의 세피라로 이어집니다. 너그러움과 엄격함이 적절히 섞여서 하나의 아름다운 균형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티페레트를 경험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듯한 느낌,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순간, 함께 있을 때 느껴지는 깊은 평화로움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순간에 우리는 단순히 두 사람만의 친밀함을 넘어서 무언가 더 큰 것과 연결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카발라는 그것이 착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두 사람이 티페레트의 조화 속에 있을 때, 실제로 신성의 빛이 그 관계 속으로 흘러들어옵니다.


우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친구란 서로에게 헤세드의 관대함을 베풀면서도 게부라의 정직함을 잃지 않는 사람입니다. 친구가 잘못된 길로 갈 때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고, 힘들 때는 아낌없이 지지해줄 수 있는 관계입니다. 이런 균형 잡힌 우정 속에서 티페레트의 아름다움이 피어납니다. 오래된 친구와 함께 차를 마시며 나누는 대화, 서로의 삶을 진심으로 축복해주는 마음, 이런 평범한 순간들이 사실은 신성이 현현하는 순간입니다.


카발라 사상가들은 두 사람이 진정으로 조화를 이루어 만날 때 그 사이에 셰키나 (Shekhinah)가 깃든다고 가르쳤습니다. 셰키나는 신의 임재이며, 신성이 세상 속에 머무는 방식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으로 대할 때, 그 관계 자체가 거룩한 공간이 됩니다. 신은 멀리 하늘 너머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의 공간 속에도 함께 계십니다.


말쿠트와 예소드: 일상의 관계를 영적 실천으로


카발라는 관계를 단지 감정의 문제로만 보지 않습니다. 관계 속에서 우리가 하는 구체적인 행동 하나하나가 영적 의미를 지닙니다. 말쿠트 (Malkhut)는 물질 세계이며 구체적인 행위의 영역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아름다운 말과 좋은 의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것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현실화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것, 아픈 친구를 찾아가 돌보는 것,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는 것, 이런 평범한 행동들이 말쿠트의 세피라에 속합니다. 카발라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행동들은 단순한 일상적 의무가 아닙니다. 이것들은 위로부터 흘러내려온 신성한 빛을 이 땅에 구현하는 거룩한 작업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섬기고 돌볼 때마다, 흩어진 신성의 불꽃을 모아 제자리로 돌려놓는 티쿤 올람 (Tikkun Olam)의 실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소드 (Yesod)는 말쿠트 바로 위에 있는 세피라로, 위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빛을 모아서 말쿠트로 전달하는 통로입니다. 관계에서 예소드는 신뢰와 약속의 자리입니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지속되려면 믿을 수 있는 토대가 필요합니다. 약속을 지키고, 말한 대로 행동하며, 변함없이 그 사람 곁에 있어주는 것이 예소드의 역할입니다. 예소드가 튼튼할 때 관계는 오래갑니다.


부부 관계에서 예소드는 특별히 중요합니다. 카발라 전통에서 결혼은 단순한 사회적 제도가 아니라 우주적 결합을 반영하는 신성한 의식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사랑으로 결합할 때, 그것은 위에 있는 제이르 안핀 (Ze'ir Anpin)과 누크바 (Nukva)의 결합을 아래에서 재현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육체적 결합조차도 카발라에서는 거룩한 의미를 지닙니다. 카바나 (Kavvanah), 즉 올바른 의도를 가지고 사랑을 나눌 때, 그 행위는 신성한 빛을 이 세상으로 끌어내리는 통로가 됩니다.


관계 속에서 클리포트를 치유하기


모든 관계가 아름답고 조화롭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상처받고 배신당하기도 합니다. 사랑했던 사람이 떠나가고, 믿었던 친구가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이런 고통스러운 경험들도 카발라의 관점에서는 의미를 지닙니다.


클리포트 (Qliphoth)는 깨진 그릇의 껍데기이며, 신성한 빛을 가두어버린 어두운 힘입니다. 관계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부정적인 감정들, 질투와 분노와 원망도 일종의 클리포트입니다. 이것들은 관계를 파괴하고 우리를 고립시킵니다. 그러나 카발라는 클리포트조차 완전히 버릴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 안에도 여전히 신성한 불꽃이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관계 속에서 상처받았을 때, 그 고통을 단순히 억압하거나 피하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 갇혀 있는 불꽃을 구해내야 합니다. 상처를 정직하게 마주하고, 그 안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찾아내는 것입니다. 때로는 관계가 끝나는 것 자체가 필요한 티쿤일 수도 있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끝내는 것도 용기이며, 그 안에 갇혀 있던 빛을 해방시키는 행위입니다.


용서도 클리포트를 치유하는 방법입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았을 때 우리 안에는 어둠이 자랍니다. 그 어둠은 우리를 더 많은 고통으로 이끕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그 어둠 속에 갇혀 있던 빛을 되찾는 것입니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용서할 때 우리는 클리포트의 껍데기를 깨고 그 안의 불꽃을 해방시킵니다.


관계는 티쿤 올람의 실천터


카발라의 궁극적 가르침은 티쿤 올람입니다. 깨진 세상을 고치고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계야말로 티쿤 올람이 가장 직접적으로 실천되는 장소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마다, 우정을 소중히 지킬 때마다, 가족을 돌볼 때마다, 우리는 깨진 그릇의 파편들을 주워 모으고 있습니다. 흩어졌던 빛을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고 있습니다.


관계는 단지 개인적인 행복을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적 복원의 작업입니다. 내가 오늘 누군가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함께 나누는 식사가, 어려운 순간에 내미는 손길이 세상을 조금씩 치유합니다. 카발라는 이것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관계 속에서 신성한 에너지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대화에, 친구와 함께 마시는 커피에, 가족과 함께 보내는 저녁 시간에 새로운 눈을 떠보십시오. 그 평범한 순간 속에서 생명나무의 세피로트가 빛나고 있습니다. 헤세드와 게부라가 춤추고, 티페레트의 조화가 피어나며, 말쿠트를 통해 신성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관계 속에서 당신은 이미 성스러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고치는 카발리스트입니다.









8-22.3. 고통의 의미: 셰비라트 하켈림으로 본 삶의 시련



우리는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시련을 만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꿈이 무너지고, 몸이 아프고, 관계가 깨지는 경험 앞에서 우리는 묻습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 이 고통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는 이 근원적인 물음에 하나의 깊은 답을 제시합니다. 우주 창조의 가장 초기에 일어난 ‘셰비라트 하켈림’이라는 사건이, 지금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의 원형이자 동시에 그 의미를 밝혀주는 열쇠라고 말합니다.


16세기 카발라의 거장 이삭 루리아가 가르친 셰비라트 하켈림 (Shevirat HaKelim)은 ‘그릇들의 파괴’를 뜻하는 히브리어입니다. 태초에 아인 소프 (Ein Sof), 즉 무한한 신의 빛이 처음으로 열 개의 그릇 안에 자신을 담으려 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 빛의 강렬함을 감당하지 못한 아래의 일곱 그릇들이 산산이 깨어졌습니다. 루리아의 수제자였던 하임 비탈은 그의 책 『에츠 하임, Etz Hayyim』에서 이 순간을 "신성한 빛이 쏟아질 때 그릇들이 감당할 수 없었던 우주적 재난"으로 기록합니다. 이 거대한 파국으로 인해 신성의 불꽃들은 깨진 그릇의 파편과 뒤섞여 온 우주로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파편들이 클리포트 (Klippot)라는 ‘껍데기’가 되어, 세상의 모든 불완전함과 고통, 악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깨어짐 속에 숨겨진 삶의 목적


그런데 루리아 카발라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유대학자 게르숌 숄렘 (Gershom Scholem, 1897-1982)이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유대 신비주의의 주요 경향』에서 명확히 지적했듯이, 이 ‘깨어짐’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신성한 목적을 가진 ‘정화’의 과정이었습니다. 카발라의 창조 신화에 따르면, 빛이 담기기 이전에 먼저 침춤 (Tzimtzum)이라는 ‘신의 자기 수축’이 있었습니다. 신이 스스로를 비워냄으로써 비로소 창조를 위한 텅 빈 공간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그 공간은 완전히 비어 있지 않았고, 레쉬무 (Reshimu)라고 불리는 희미한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신성 안에 섞여 있던 미분화된 잠재적 불순함, 즉 심판의 뿌리들이 응축되어 있었습니다.


침춤이 이 불순한 요소들을 신의 본질로부터 분리해내는 첫 단계였다면, 셰비라는 그 두 번째 단계였습니다. 그릇이 깨지는 격렬한 과정을 통해 순수한 빛과 불순한 찌꺼기가 마침내 완전히 분리되었고, 악은 비로소 그림자처럼 독자적인 영역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출산의 과정과 같습니다. 아이가 세상에 나오려면 어머니는 반드시 산고를 겪어야 하고, 탯줄이 끊어져야 하듯이, 순수한 세상이 창조되려면 불순한 것들이 먼저 떨어져 나가야 했습니다.


이 깊은 통찰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고통을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합니다. 한 직장에서 십 년 넘게 헌신했지만 하루아침에 해고 통보를 받는 순간, 우리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깨어짐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자신이 그 직장의 안정성에 얼마나 집착하고 있었는지, 나의 진정한 가치를 직함과 연봉으로만 증명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연인과의 관계가 끝났을 때, 우리는 심장이 조각나는 아픔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시간을 지나며, 내가 상대방에게 얼마나 의존적이었는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소유하려 했던 이기심은 없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갑작스러운 질병은 건강이라는 축복을 당연하게 여겼던 우리의 오만함을 깨닫게 하고, 삶의 유한함 앞에서 무엇이 진정 소중한지를 절실히 느끼게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겪는 모든 깨어짐의 경험들은 단순한 파괴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내면에 섞여 있던 불순한 집착과 이기심, 오만함이 드러나고 떨어져 나가는 고통스러운,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정화의 과정입니다.


고통의 껍데기 속에서 신성한 불꽃 발견하기


루리아 카발라는 여기서 우리에게 더욱 심오한 가르침을 줍니다. 깨진 그릇의 파편, 즉 클리포트 안에는 여전히 신성한 불꽃이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니초초트 (Nitzotzot)라고 부르는 이 불꽃들은 어둠의 껍데기에 둘러싸여 본래의 빛을 잃은 채 우리 삶의 모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진정한 임무는 바로 이 흩어진 불꽃들을 구해내어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티쿤 (Tikkun), 즉 ‘복원’과 ‘치유’의 작업입니다.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하고, 양심에 따라 살아가고, 자신의 일에 온전히 집중할 때마다,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신성의 불꽃이 하나씩 해방되어 신성한 근원으로 돌아갑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고통을 대하는 완전히 새로운 태도를 요구합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시련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신성한 불꽃을 발견해야 할 기회입니다. 실직의 고통이라는 껍데기 속에는,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는 ‘소명의 불꽃’이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배신으로 인한 상처라는 껍데기 속에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더 깊은 신뢰를 배울 수 있는 ‘성숙의 불꽃’이 갇혀 있습니다. 질병의 고통이라는 껍데기 속에는, 유한한 삶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타인의 약함을 보듬을 수 있는 ‘연민의 불꽃’이 빛나고 있습니다. 유대 신비주의의 핵심 경전인 『조하르, Zohar』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고통이 끝날 때, 그 고통은 마침내 거대한 빛으로 변할 것이라고. 지금 우리가 겪는 시련의 어둠이, 언젠가는 우리를 비추는 찬란한 기쁨의 빛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셰비라트 하켈림은 결코 끝이 아니었습니다. 일곱 개의 그릇이 깨진 이후, 신은 파르추핌 (Partzufim)이라 불리는 새롭고 더 강한 구조의 그릇들을 만들었습니다. 이전의 단순한 그릇들과 달리, 이 새로운 그릇들은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고 지지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무한한 빛의 강렬함을 능히 견딜 수 있었습니다. ‘깨어짐’이라는 실패를 통해 얻은 지혜가 더 완전한 재건의 과정에 반영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겪는 깨어짐의 경험은 우리를 더 강하고 성숙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깊은 상처를 겪어본 사람은 타인의 상처를 더 깊이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습니다. 처절한 실패를 경험한 사람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알기에 쉽게 좌절하지 않습니다. 소중한 것을 잃어본 사람은 지금 가진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압니다. 우리는 깨어진 과거의 파편들을 주워 모아, 이전보다 더 아름답고 단단한 새로운 그릇을 만들어갑니다. 이는 마치 깨진 도자기를 옻으로 붙이고 그 틈을 금으로 장식하는 일본의 킨츠기 (金継ぎ) 기법과 같습니다. 깨진 흉터는 더 이상 숨겨야 할 약점이 아니라, 그 그릇만이 가진 고유한 역사와 아름다움이 됩니다.


셰비라트 하켈림의 가르침은 혼돈과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당신이 겪는 고통은 결코 의미 없는 형벌이 아니라고. 그것은 당신을 더 온전한 존재로 만들기 위한 우주적 드라마의 일부라고. 당신이 마주한 시련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는 당신이 구해내야 할 신성한 불꽃이 숨어 있고, 그것을 발견하고 구해내는 것이 바로 당신 삶의 소명이라고 말입니다. 깨어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모든 고통의 상처는 언젠가 황금빛으로 빛날 것이라고. 이것이 수백 년의 시간을 넘어, 루리아 카발라가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깊은 위로이자 위대한 도전입니다.









8-22.4. 영혼의 치유: 클리포트를 통합하는 심리적 작업



앞서 우리는 셰비라트 하켈림, 즉 ‘그릇들의 파괴’라는 우주적 사건을 통해 삶의 고통이 지닌 깊은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릇이 깨지면서 신성의 불꽃은 클리포트 (Klippot)라는 ‘껍데기’ 안에 갇히게 되었고, 이것이 세상 모든 불완전함의 뿌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카발라는 여기서 우리에게 한층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우리 내면에서 이 어둠의 껍데기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그 껍데기를 깨고 그 안에 갇힌 빛을 해방시킬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바로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 ‘그림자’를 마주하는 심리적 작업에 있습니다.


클리포트, 우리 영혼의 그림자


카발라에서 클리포트는 단순히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악이나 부정적인 힘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어둡고 미성숙한 심리적 에너지의 총체입니다. 우리의 통제되지 않는 분노, 끝없는 탐욕, 타인을 향한 시기와 질투, 마음속 깊이 숨겨둔 열등감과 수치심이 바로 우리 영혼의 클리포트입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나’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래서 의식의 빛이 닿지 않는 무의식의 영역으로 밀어낸 또 다른 나의 모습입니다.


이 개념은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 칼 융이 제시한 ‘그림자 (Shadow)’의 원형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융에 따르면, 그림자는 우리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기는 모든 성격적 특성, 본능, 감정들이 모여 형성된 무의식의 인격입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선하고 이성적인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할수록, 그 반대편의 어둡고 비이성적인 측면들은 더욱 깊은 그림자 속에 억압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그림자를 외면하고 억누를수록, 그것이 더욱 강력하고 파괴적인 힘을 갖게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인정하는 대신, 그것을 외부 세계의 특정 대상에게 무의식적으로 떠넘깁니다. 이것이 바로 심리학에서 말하는 ‘투사 (projection)’입니다. 내 안의 분노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이 온통 부당한 일로 가득 차 있다고 불평합니다. 자신의 이기심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고 의심합니다. 내 안의 열등감을 마주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성공을 깎아내리며 비난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의 클리포트를 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면서, 정작 그것이 자신의 얼굴임을 깨닫지 못하는 비극 속에 살아갑니다.


티쿤의 여정: 그림자와의 통합


루리아 카발라가 제시하는 티쿤 (Tikkun), 즉 ‘복원’의 작업은 바로 이 자신의 그림자, 즉 클리포트를 정직하게 마주하고 통합하는 영혼의 치유 과정입니다. 중요한 것은 클리포트를 파괴하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카발라는 모든 클리포트 안에는 반드시 니초초트 (Nitzotzot), 즉 ‘신성의 불꽃’이 갇혀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가장 어두운 감정과 충동 속에도 생명력과 창조성의 근원이 되는 귀한 에너지가 숨어 있습니다. 따라서 티쿤의 목표는 껍데기를 부수고 그 안의 불꽃을 해방시켜, 그것을 의식적이고 성숙한 방식으로 삶 속에 통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심리적 작업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누군가에게 강렬한 질투를 느낀다고 가정해 봅시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 감정을 억누르거나 상대방을 탓하며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하지만 티쿤의 관점에서는 먼저 그 질투라는 클리포트의 존재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래, 나는 지금 저 사람을 질투하고 있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그 껍데기 안에 갇힌 불꽃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입니다. 질투의 감정은 종종 내가 진정으로 원하지만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열망을 반영합니다. 어쩌면 그 불꽃은 ‘더 나은 삶을 향한 갈망’일 수도 있고, ‘나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싶은 소망’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질투하는 대상은 바로 그 불꽃을 이미 자신의 삶에서 구현하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깨달음은 파괴적인 질투의 에너지를,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동력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열쇠가 됩니다. 비난과 자기 파괴에 쓰이던 에너지가, 이제는 자신의 잠재력을 계발하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창조적인 에너지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클리포트의 껍데기를 깨고 신성의 불꽃을 해방시키는 티쿤의 과정입니다.


온전함을 향한 길


영혼의 치유는 완벽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부분을 받아들여 온전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의 클리포트는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림자가 없는 빛은 존재할 수 없듯이, 어둠이 없는 영혼 또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분노할 줄 모른다면 불의에 맞설 수 없고,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으며, 두려움을 알지 못한다면 진정한 용기를 낼 수 없습니다.


진정한 영적 성숙은 우리의 어두운 본능들을 억압하여 고요한 평화를 얻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거칠고 혼돈스러운 에너지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 그것을 이해하고 길들여 마침내 춤을 추는 법을 배우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가장 깊은 어둠을 끌어안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가장 찬란한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클리포트라는 껍데기 속에 갇혀 있던 신성의 불꽃들이 마침내 해방되어 우리의 삶을 비출 때, 우리는 비로소 분리된 존재가 아닌, 신과 세상과 연결된 온전한 존재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카발라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영혼 치유의 길이며, 깨어진 세상 속에서 온전함을 회복하는 티쿤의 위대한 여정입니다.









8-22.5. 세키나를 환대하는 삶: 기쁨의 신학



우리는 앞선 여정에서 우주적 파국인 셰비라트 하켈림을 통해 이 세상에 고통이 들어온 이유를 살펴보았고, 우리 내면의 어두운 껍데기, 즉 클리포트를 통합하는 심리적 작업을 통해 영혼의 치유가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깨어진 그릇의 파편들을 그러모으고, 흩어진 불꽃들을 해방시키며, 내 안의 그림자를 정직하게 마주하는 이 모든 치열한 과정, 즉 티쿤 (Tikkun)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요? 단순히 부서지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전부일까요? 카발라는 우리에게 그보다 훨씬 더 장엄한 비전을 제시합니다. 티쿤의 궁극적인 목표는 상처 입은 세상을 완전한 기쁨의 상태로 변화시켜, 마침내 ‘신성한 현존’이 이 땅에 온전히 머무를 수 있는 거룩한 처소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성한 현존을 환대하는 삶의 핵심에는 바로 ‘기쁨’이라는 위대한 신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추방당한 여왕, 셰키나


카발라의 심오한 세계관 중심에는 ‘셰키나 (Shekhinah)’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셰키나는 본래 ‘거주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샤칸’에서 파생된 말로, ‘신의 현존’, 특히 이 물질세계 안에서 우리가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신의 내재적인 측면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나무에서 셰키나는 열 번째 세피라인 말쿠트 (Malkhut), 즉 ‘왕국’에 해당하며, 모든 신성한 빛이 최종적으로 흘러들어와 현실 세계로 발현되는 통로입니다. 카발라의 신비가들은 이 셰키나를 다양한 여성적 이미지로 묘사했습니다. 그녀는 지혜로운 어머니이자, 사랑스러운 신부이며, 고결한 여왕이자, 모든 이스라엘 영혼의 공동체인 ‘크네셋 이스라엘 (Knesset Israel)’ 그 자체입니다. 그녀는 신의 가장 부드럽고, 자비로우며,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는 얼굴입니다.


그런데 태초에 그릇들이 깨지는 우주적 재앙이 일어났을 때, 이 거룩한 여왕 셰키나는 자신의 신성한 짝이자 하늘의 왕인 여섯 번째 세피라 티페레트 (Tiferet)로부터 분리되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셰키나의 추방 (Galut ha-Shekhinah)’입니다. 신성 안의 남성성과 여성성, 하늘과 땅, 초월과 내재가 서로 분리된 이 우주적 이혼 상태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소외와 고독, 그리움의 근원적인 뿌리입니다. 셰키나는 자신의 자녀들인 인간 세상에 머물며 함께 고통받고 신음하는 ‘추방당한 여왕’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마치 길 잃은 자녀를 찾아 헤매는 어머니처럼, 우리의 고통 속에서 함께 울고 있으며, 우리가 본래의 신성한 집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깊은 실존적 외로움, 세상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이방인처럼 떠도는 듯한 느낌, 삶의 의미를 잃고 텅 빈 마음으로 방황하는 경험은 모두 이 셰키나의 추방을 우리 영혼이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직장에서의 부당함, 깨어진 인간관계,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불의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슬픔은 단순히 개인적인 불행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분리된 채 신음하는 셰키나의 아픔이 우리 삶에 울려 퍼지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그림자인 클리포트에 사로잡혀 분노와 탐욕, 시기심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이 세상을 더욱 차갑고 삭막한 곳으로 만들어 셰키나의 추방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기쁨은 의무다: 슬픔을 넘어선 신앙


그렇다면 우리는 이 추방당한 여왕을 어떻게 다시 그녀의 왕좌로 모실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 분리된 세계를 치유하고 신성한 합일을 이룰 수 있을까요? 놀랍게도 카발라와 이를 계승한 하시디즘 유대교의 스승들은 그 가장 중요한 열쇠가 바로 ‘기쁨’, 즉 심하 (Simcha)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쁨은 단순히 좋은 일이 있을 때 느끼는 일시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론적 의무이자, 세상을 치유하는 가장 강력하고 실천적인 도구로서의 ‘신학적 기쁨’입니다.


유대 신비주의의 핵심 경전인 『조하르, Zohar』는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셰키나는 슬픔과 비탄, 절망이 있는 곳에는 머무를 수 없다.” 슬픔, 우울, 무기력함은 영혼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우리를 클리포트의 껍데기 속에 더욱 깊이 가두는 힘입니다. 반면 기쁨은 우리의 영혼을 확장시키고, 닫혔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신성한 빛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듭니다. 따라서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셰키나를 우리 삶에 환대하기 위한 가장 첫 번째 조건입니다. 우리가 기뻐할 때, 우리는 내면의 성전을 정화하고 셰키나가 편안히 머무를 수 있는 옥좌를 마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더 나아가, 이 깨어진 세상 속에서 의지적으로 기쁨을 선택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매우 강력한 영적 저항이자 신앙 고백이 됩니다. 눈앞에 펼쳐진 고통과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 여전히 신성한 빛이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선하고 구원받을 가치가 있음을 온몸으로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시디즘의 창시자인 바알 솀 토브 (Baal Shem Tov, 1698-1760)는 슬픔이야말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악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슬픔에 빠지는 것은 마치 신이 창조한 세계에 결함이 있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쁨을 찾으려는 노력은 신의 선하심과 섭리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표현하는 가장 위대한 기도입니다. 이처럼 기쁨은 선택 가능한 감정을 넘어, 우리가 반드시 수행해야 할 신성한 계명 (Mitzvah)의 반열에 오릅니다.


일상 속에서 셰키나의 집을 짓는 법


이 위대한 ‘기쁨의 신학’은 결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셰키나를 환대하는 매우 실천적인 삶의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평범함의 성화 (聖化):


셰키나는 세상을 등지고 고립된 동굴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녀는 우리의 가장 평범하고 mundane한 삶의 한가운데 현존합니다. 우리가 먹고, 일하고, 잠자고, 관계 맺는 모든 순간이 셰키나를 만나는 성소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에 담긴 의식적인 마음, 즉 카바나 (Kavvanah)입니다.


예를 들어, 저녁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는 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기계적으로 허기를 채우는 대신, 잠시 눈을 감고 이 음식이 내 앞에 오기까지 거쳐온 수많은 생명의 연결고리를 떠올려 봅니다. 씨앗을 심은 농부의 땀방울,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비, 음식을 요리한 사람의 정성, 이 모든 것 안에 깃든 신성의 불꽃을 느끼며 감사한 마음으로 한 입을 베어 무는 순간, 우리의 식탁은 셰키나를 모시는 거룩한 제단으로 변모합니다.


관계 속의 현존:


셰키나는 본질적으로 관계성의 세피라입니다. 그녀는 고립된 개인 안에서보다, 마음과 마음이 사랑과 신뢰로 연결될 때 더욱 온전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유대 전통에서 안식일 저녁에 ‘안식일의 여왕’을 맞이하는 예식은 바로 이 셰키나를 우리 가정으로 초대하는 거룩한 드라마입니다.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모여 촛불을 밝히고, 축복의 노래를 부르며,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나눌 때, 그 사랑과 환대의 에너지가 충만한 공간에 셰키나는 기꺼이 임재합니다. 타인의 고통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주고, 작은 친절을 베풀며, 용서와 화해의 손을 내미는 모든 행위는 셰키나의 추방된 조각들을 하나로 모아 그녀의 왕국을 재건하는 위대한 티쿤의 작업입니다.


아름다움과의 만남:


셰키나는 이 땅, 즉 물질세계인 말쿠트의 다른 이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가장 직접적으로 마주할 수 있습니다. 붉게 타오르는 저녁노을을 바라볼 때, 숲속의 고요한 오솔길을 거닐 때, 거친 파도 소리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잠시 말을 잃고 경이로움에 휩싸입니다. 그 순간은 바로 셰키나가 자신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입니다. 예술 작품을 통해 깊은 감동을 느끼는 것, 마음을 울리는 음악에 온전히 몰입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다움과의 만남은 우리의 영혼을 잠시 일상의 근심에서 벗어나게 하고, 이 세계가 신성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몸으로 드리는 찬미:


기쁨은 머리로 이해하는 관념이 아니라, 온몸으로 살아내는 생생한 체험입니다. 특히 하시디즘 전통은 이 점을 깊이 이해하고, 열정적인 노래 (니군, Niggun)와 황홀경의 춤을 중요한 영적 수행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슬픔과 절망이 우리의 몸을 굳게 만들고 에너지를 차단하는 반면, 기쁨의 노래와 춤은 굳어진 클리포트의 껍데기를 깨뜨리고 갇혀 있던 신성의 불꽃을 해방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논리적인 기도의 언어가 닿지 못하는 영혼의 더 깊은 차원에, 우리의 몸짓과 허밍은 직접적으로 가 닿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이유 없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어깨를 들썩이는 단순한 행위가 수많은 시간의 명상보다 더 효과적으로 우리를 셰키나의 현존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기쁨의 마음이 곧 살아있는 성전이다


카발라의 가르침은 결국 하나의 진실로 우리를 이끕니다. 한때 예루살렘에 존재했던 돌로 지은 성전은 셰키나가 머무는 지상의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파괴된 이후, 셰키나는 진정으로 머무를 곳을 잃고 세상을 떠돌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녀가 돌아와 거할 수 있는 유일한 성전은 바로 우리 각자의 마음입니다.


셰키나를 환대하는 삶은 고통을 외면하고 맹목적인 긍정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깊은 슬픔과 깨어짐을 누구보다 정직하게 직시하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적으로 기쁨을 선택하는 용기 있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것은 나의 작은 기쁨이 곧 추방당한 여왕에게 따뜻한 안식처를 내어드리는 일임을, 나의 환한 미소가 세상을 치유하는 한 조각의 빛이 됨을 아는 거룩한 책임감에서 비롯됩니다. 우리의 삶의 과제는 슬픔의 재를 뒤집어쓰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진 그릇의 파편들을 모아 사랑과 기쁨이라는 황금으로 이어 붙여 마침내 우리 자신을 셰키나가 영원히 거주하는 살아있는 성전으로 재건하는 것입니다. 그 기쁨으로 충만한 마음의 성전 안에서, 추방당한 여왕은 마침내 자신의 신랑과 재회하고 세상은 온전한 치유와 평화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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