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통증을 다시 읽는 시간 # 11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어디가 불편하신지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여기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저기가 아픈 것 같기도 해요.
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갈게요.”
때로는,
자신이 어디가 아픈지조차 알 수 없어
말끝을 흐리다 돌아서는 사람이 있다.
무엇이 불편한지도,
무엇을 도와달라 해야 할지도
정작 본인조차 잘 모른 채—
그저 막막한 얼굴로 조용히 자리를 떠난다.
그런 모습을 마주할 때면,
그 사람의 아픔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
더 깊게 느껴진다.
이런 환자에게
“제가 무엇을 해드리면 좋겠습니까?”
라고 묻는 일이,
가끔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때가 있다.
표면적으로는 일상의 피로, 가족 문제, 육체적인 불편을 이야기하지만—
그 말의 이면, 내면이 조용히 외치는 소리는
전혀 다른 방향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괴리는 비단 환자와 의사의 관계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일상의 대화 속에서도,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표현하는 말과 실제 감정 사이에
커다란 간극을 품고 산다.
그래서 문득,
생각하게 된다.
나는 지금—
무슨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알고 있으면서도
그 감정을 꺼내어 마주하기가
두려운 걸까.
혹시, 그런 감정을 느끼는 내가
부끄럽고, 초라하게 느껴졌던 건 아닐까.
적어도,
나의 마음만큼은
내가 알고 있어야 했다.
누구도 대신 들여다봐 줄 수 없기에,
그 마음만은
외면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느 날,
매주 치료를 받으러 오시는 익숙한 분이
조용히, 본인에게 있었던 일을 들려주셨다.
나름 믿고 의지했던 직장 동료의 한마디에
마음이 툭, 내려앉았다고 했다.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그 사람이 일부러 무시하려던 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쁘고, 마음이 허전하고…
그냥, 말없이 자리를 피하게 됐어요.”
그리고는, 이내 덧붙였다.
“제가 좀 예민한가 봐요. 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
마음에도 없는 긍정으로
자신의 감정을 얼버무려 버리는 순간이었다.
다음 주,
어김없이 찾아온 그분은
통증이 아닌 마음을 묻는 나의 질문에
조금씩,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 마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서운했어.”
“무시당한 것 같아서… 슬펐어.”
“관심받고 싶었는데, 외면당한 느낌이었어.”
그리고 그 감정 아래에는
조용히 깔려 있는 생각들이 있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중요하지 않구나.”
“나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었나 봐.”
“이런 일로 마음 아픈 내가… 이상한 걸까?”
어딘가 낯설지 않다.
우리 모두,
한 번쯤은 이런 마음을
조용히 지나쳐온 적이 있다.
한 고등학생 아이가
친한 친구가 중요한 일을
자기에게만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겉으로는
“그럴 수도 있지”라며 웃어넘겼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해야 쿨해 보이고,
집착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여서 친구들이 더 가까이 와줄 것 같았어요.
그렇지 않나요?”
그 마음엔
처음엔 서운함,
곧이어 배신감,
그리고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혼란이 차례로 밀려왔다.
그렇게
겹겹이 쌓여가는 감정들 앞에서
삶이 문득,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사람들은 종종
그 감정을 애써 무시하거나,
지나치게 왜곡해서 받아들이곤 한다.
“그래, 난 원래 혼자였잖아.”
“기대하지 않는 게 편해.”
“나만 이런 마음 가지면 안 돼.
그건 좀, 비참하니까.”
관계는 늘
말처럼 단순하지 않다.
표현되지 않은 감정들과
감정 뒤에 숨어 있는 생각들이
엉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만 따로 떼어 보아서는 안 된다.
그 감정이
어떤 생각과 연결되어 있는지까지—
조심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삶에는,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고통의 순간들이 있다.
무너질 듯한 마음.
반복되는 관계의 실망.
그리고—
내가 왜 이렇게 아픈지조차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날들.
그럴 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감정과 생각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일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마음이
슬픔인지, 분노인지,
외로움인지, 아니면 억울함인지—
조용히, 정확한 이름을 붙여주는 것.
그리고 그 감정 뒤에 깔려 있는
‘나는 실패자야.’
‘나는 혼자야.’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않아.’
같은 생각들을
감정과 분리해 바라보는 일.
그 두 가지가,
조용한 회복의 시작이 된다.
우리는 종종
상황 자체가 불안을 만든다고 믿는다.
하지만 많은 경우,
불안과 우울은
상황보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또 어떻게 피하려 드는가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시험을 앞둔 학생이 느끼는 불안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런데 여기에
“나는 꼭 잘해야 해.”
“망치면 나는 무가치해져.”
같은 비합리적인 신념이 더해지면,
불안은 걱정을 넘어
공포로 바뀌고,
그 감정은 어느새
몸의 병리적 반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때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으로,
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만성통증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처럼,
왜곡된 사고는 감정을 부풀리고
삶의 해석을 흐리게 만들며,
결국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정도의 스트레스조차
질병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 조용히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이 생각은 현실을 제대로 담고 있는가.”
“이 해석은 나를 살리는가,
아니면 천천히 무너뜨리는가.”
하지만 이 질문들을 꺼낼 때는,
반드시 나를 지탱할 수 있는
안전한 내면의 기반 위에 서 있어야 한다.
그 기반은
누군가의 따뜻한 지지,
사랑하고, 용서받았던 감정의 순간들,
조용히 쌓여온 신뢰,
그리고 수없이 버텨낸 날들의 기억일 수 있다.
감정을 정직하게 불러보는 일.
생각을 다시 바라보는 일.
그리고 내 안의 자원을 되새기는 일.
이 세 가지는
우리를 다시 앞으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걸어가게 하는 힘이 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완전한 통제도, 완벽한 회복도 아니다.
불안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무너지지 않고 살아가는 힘.
그 힘을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묻는 연습을 해야 한다.
지금,
내 감정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그 감정을 만든 생각은 어떤 모양이었는가.
그 생각은 현실인가,
아니면 오래된 상처의 그림자인가.
감정의 진실을 마주할 때,
그 감정은 더 이상
우리를 해치지 않는다.
도리어,
혼란을 풀어내고
삶을 조용히 정돈해 나간다.
불안과 우울은
그렇게 조금씩
비워지기 시작한다.
감정과 생각을 하나씩
정직하게 마주하고,
그 뿌리를 따라가는 시간이 깊어질수록—
우리 안을 짓누르던 무게는
서서히 가벼워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를 오래 괴롭혀왔던
이유를 알 수 없던 그 통증들 역시
이미,
조용히 자리를 떠난 뒤일지 모른다.
“If we want to find the way back to ourselves and one another, we need language.”
“마음을 잇는 길은, 언제나 언어에서 시작한다.”
— Brené Brown (“Atlas of the He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