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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을 지키는 마지막 수단에 대하여

by 라온재


나이가 들면 삶의 많은 것이 손에서 흘러내린다. 몸의 민첩함이 무뎌지고, 기억은 흩어지고, 한때 명확하던 사고는 흔들린다. 걷는 속도는 느려지고, 남들이 보기에 답답한 동작들이 늘어난다. 옷을 갈아입는 일도, 씻는 일도, 때로는 대소변을 챙기는 일조차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인간이 스스로 유지한다고 믿던 독립은 조용히 경계선을 잃고, 타인의 손을 빌려야 하는 시간들은 자연스럽게 늘어난다. 이 과정 전체는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다가오는 노년의 풍경이지만, 그 안에서 가장 먼저 흔들리는 것은 몸이 아니라 존엄이라는 감각일지도 모른다.


존엄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을 때 더 강하게 느껴지고,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할수록 희미해진다. 어린아이가 성장하며 의존에서 독립으로 나아가듯, 노년은 반대 방향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이 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든 존엄의 상실을 경험한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언제나 남는다. 인간의 존엄이 능력의 크기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몸이 약해지고 기억이 흐릿해져도, 인간은 여전히 하나의 삶을 경험하는 주체다. 문제는 그런 본질적 존엄이 현실의 구조에서 충분히 보호되고 존중받는가이다.


여기서 돈이라는 요소가 불편할 정도로 선명한 현실의 힘을 드러낸다. 인간의 존엄이 돈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지만, 노년의 존엄을 외부 세계로부터 실질적으로 지켜내는 데에 돈만큼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수단도 찾기 어렵다. 돈은 도움을 선택할 권력을 남겨두고, 돌봄을 타인의 시혜가 아니라 서비스로 바꾸며, 의존을 수치가 아니라 계약 관계로 전환한다. 이는 노년기의 삶에서 매우 본질적 차이를 만들어 낸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같지만, 그 도움을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어떤 범위까지 받을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은 존엄의 중요한 조건이 된다.


경제적 능력이 남아있을 때, 도움은 굴욕이 아니라 선택이 된다. 몸을 씻겨주는 손길이 낯설지 않고, 옷을 입혀주는 시간이 모멸이 되지 않는 이유는 그 관계의 구조 속에 주체성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도움을 받는 사람도 계약의 주체이며, 자신의 삶의 방식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돈은 바로 그 권리를 끝까지 보존해주는 현실적 장치다.


물론 어떤 이들은 말할 것이다. 인간의 존엄은 조건 없이 존재하는 것이며, 돈이 없다고 해서 존엄을 잃는 것은 아니라고. 그 말은 철학적으로 완전히 옳다. 그러나 인간은 철학적 개념만으로 살지 않는다. 우리는 제도, 시스템, 돌봄의 구조, 그리고 그 구조를 움직이는 경제적 조건 속에서 살아간다. 실제 삶의 존엄은 언제나 현실에서 구현되거나 훼손된다.


그러므로 노년에 접어든 인간이 마지막까지 지켜낼 수 있는 존엄의 형태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돈이라는 수단을 통해 도움을 선택하고, 자기 삶의 방식에 대한 최소한의 통제권을 유지하는 일이다. 스스로 걸을 수 없게 되더라도, 자신의 시간을 타인의 일정에 끌려가지 않도록 조정할 수 있는 힘. 식사와 약물, 위생과 일상의 흐름을 타인의 기분이 아니라 계약된 돌봄의 기준에 맞춰 유지할 수 있는 힘. 이것은 노년기의 존엄을 현실 세계 안에서 구체적으로 지켜주는 가장 현실적인 형태의 자유다.


어쩌면 노년의 존엄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늙어가는 몸을 관리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권을 유지하는 일이며, 삶의 방향을 스스로 설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끝까지 확보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자유를 현실에서 가장 분명하게 보장해 주는 것이 돈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인생의 마지막 장에서도 인간이 주체로 남기 위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해, 나답게 쓰는 돈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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