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Thomas USVI 기항지 투어
점심을 먹고 시내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그저 다리가 아플 때까지 걷다가 자연스럽게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기항지 투어라는 것이 원래 대단한 기념물이나 특별한 볼거리를 찾아 나서는 경험이라기보다, 잠시 그 땅의 표정을 스쳐 지나가는 시간에 가깝다. 현지인들의 생활 냄새, 가벼운 수공예품, 잠깐의 바람 같은 만남들. 어차피 여행자에게는 일회성이고, 현지인에게는 금세 사라질 흔적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배에 남아 조용히 머무는 편이 더 좋다.
그래도 카리브해에 오면 늘 마음이 흔들리는 주제가 있다. 바로 해적 이야기다. 영화 속 잭 스패로우에게 영감을 준 블랙비어드의 전설은 이 지역 풍경과 이상하리만큼 잘 어울린다. 오늘은 블랙비어드 캐슬을 직접 보고 싶어 길을 나섰다. 구글이 알려준 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뜻밖에도 블루비어드 호텔이 자리한 언덕이었다. 이름도 비슷하고 풍경도 좋아 잠시 착각할 만했지만, 목적지는 다른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
골목을 여러 번 되짚으며 마침내 블랙비어드 캐슬 앞에 섰을 때, 땀에 젖은 이마보다 더 뜨겁게 두근거린 것은 오래전에 들었던 그 전설들이었다. 나선형 계단을 천천히 올라 전망대에 서자, 바다가 둥글게 들여다보였다. 바람은 부드러웠고, 햇빛은 짙게 쏟아졌고, 잠시나마 해적들이 바라보았을 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듯했다. 그 자리에서 한 장의 사진을 남겼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언덕길은 복잡했고 차도와 인도의 경계가 모호해 걷는 내내 신경이 곤두섰다. 오늘은 무슨 날인지, 트레일러만 한 차에 DJ 장비를 싣고 젊은이들이 온 거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시끄러운 음악과 알록달록한 복장, 춤추고 마시는 사람들로 길이 거의 막혀 있었다. 그 열기 속을 헤치고 지나오는 일은 꽤 버거웠다.
겨우 빠져나와 우체국에 들러 아이들에게 엽서 한 장씩을 보냈다. 여행지에서 엽서를 보내는 일은 여전히 작은 의식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선착장으로 걸음을 옮겨 배로 돌아왔다. 오늘 걸은 거리는 6.5마일. 다리는 확실히 피곤했지만 마음은 묘하게 충만했다.
블랙비어드 캐슬과 이름도 닮은 블루비어드를 모두 들른 날. 카리브해의 가장 유명한 이야기 한 조각을 직접 밟아본 날. 그 나름의 소란과 고단함 속에서도 오래 기억에 남을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