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전망이 보이는 라운지에 앉아 한동안 수평선을 바라본다. 조금 전 피트니스에서 명상을 할 때 느꼈던 고요함과는 결이 다른 평안함이 천천히 스며든다. 물결은 분명 일렁이지만 이상하게도 잔잔해 보인다. 거대한 배가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항해하는 덕분인지 흔들림도, 속도도 체감되지 않는다. 오늘은 기항지 없이 온전히 바다 위에서만 보내는 하루이다.
멀리 펼쳐진 바다와 하늘은 한 줄의 경계선으로 또렷하다. 구름은 금세 모양을 바꾸며 흘러가지만, 바다는 묵직한 검푸른 색을 유지한다. 바라보면 볼수록 변하지 않는 것과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풍경 속에서, 마음이 외려 비워지는 듯한 순간이 찾아온다. 사방을 둘러봐도 배 한 척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목소리도, 도시의 소음도 끼어들지 않는 이 공간에서 느껴지는 고독은 외로움이 아니라 평온에 가까운 감정이다.
사람의 마음은 늘 무언가로 채워져 있다. 해야 할 일, 지켜야 할 것, 잃을까 두려운 것들, 혹은 누군가와 비교해 스스로를 괴롭히는 생각들로 가득하다. 그런 마음은 마치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파도 같아 스스로도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바다 한가운데서 바라본 수평선은 단순한 한 줄의 선일 뿐인데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힘이 있다. 비는 공간이 없다면 새로운 바람이 스며들 자리가 없듯, 마음도 비워져야 평온이 깃든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가장 자주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과 걱정이라 한다. 안정적인 미래를 원하면서도, 그 미래가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까 염려하고, 손에 쥘수록 잃을 것들이 늘어나는 모순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몰아붙인다. 풍족함은 분명 삶을 윤택하게 하지만, 그 풍족함이 오히려 불안을 키우는 경우도 많다. 이미 채워진 항아리에 물을 더 붓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는 모습과 닮았다.
바다 위에서 보내는 이런 하루는 그 사실을 잠시 잊게 한다. 수평선 너머가 보이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고, 목적지 없이 움직여도 조급하지 않다. 이 넓고 조용한 풍경은 ‘덜 가지는 것이 더 자유롭다’는 단순한 진리를 일깨워준다. 비우는 행위는 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나를 가볍게 만드는 선택에 가깝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놓아주는 일이다.
비워야만 들리는 소리가 있다. 나 자신이 원래 무엇을 바라던 사람인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차츰 분명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바다 위에서의 고요는 그 빈 자리로 스며드는 깨달음들의 집합이다. 평안한 여행이란 결국 화려한 기항지나 새로운 풍경을 찾는 일이 아니라, 마음속 작은 고요를 발견하는 과정인지 모른다.
많이 가지는 삶이 강함을 의미했던 시대가 있었다면, 이제는 조금 덜 가지되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지닌 삶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 노후의 평안은 의외로 큰 변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짐을 하나씩 내려놓는 과정에서 완성된다. 오늘 바다 위에서 마주한 긴 수평선은 그런 삶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도 된다는 묵묵한 위로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