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회는 2030을 과연 사람으로 보고 있는가.
아이를 낳지 않는 세대, 연애를 포기한 세대, 책임지지 않는 세대라는 낙인은 너무도 쉽게 붙는다. 그러나 그 선택들이 정말 개인의 무책임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결과인지는 거의 묻지 않는다.
연애부터 그렇다. 호감을 표현하는 기준은 모호하고, 허용되는 선은 불분명하다. 언제, 어떤 말과 행동이 문제가 되는지 명확하지 않다. 조심하라는 말은 넘치지만, 안전하게 다가갈 수 있는 사회적 합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20대의 미숙한 호감 표현은 익명 애플리케이션과 커뮤니티를 통해 순식간에 박제되고,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된다.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성인지 감수성과 교육의 취지는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방식이 청년들에게 ‘시도하지 말라’는 신호로 작동하고 있다면, 이는 교육이 아니라 위축이다. 결국 남는 선택지는 하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실패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시도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애를 넘어 결혼을 고민하려 하면 또 다른 벽이 나타난다. 결혼을 둘러싼 각종 산업은 젊은 세대의 불안과 결핍을 정확히 가격표로 환산한다. 주거, 예식, 혼수, 중개 서비스까지—개인의 삶을 시작하는 일에는 터무니없이 높은 입장료가 붙는다. 이 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는 반복되고, 각종 규제와 지원 정책도 신설된다. 그러나 체감은 없다. 제도는 늘 발표되지만, 청년의 통장은 변하지 않는다.
출산은 더 노골적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보장되었다고 말하지만, 현실의 직장에서 육아휴직은 여전히 ‘불편한 변수’다. 남성 육아휴직을 보장하는 직장도 늘고 있다고 하지만, 현장에서는 그것이 곧 경력의 단절, 보이지 않는 낙인으로 작동한다. 제도는 존재한다. 다만 그 제도를 사용한 사람만이 손해를 감수하면 될 뿐이다. 사회는 손뼉 치지만, 책임은 개인에게 남긴다.
그럼에도 사회는 당당하게 묻는다. 왜 연애하지 않느냐, 왜 결혼하지 않느냐, 왜 아이를 낳지 않느냐고. 그러나 정작 그 선택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여건을 보장하는 데에는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하다.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말하면서, 지속 가능하게 살아갈 조건은 제공하지 않는다.
이렇게 계속 간다면 머지않아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조차 사라질 것이다. 무책임한 것은 2030 세대가 아니다. 책임을 개인에게만 떠넘기고, 실패의 원인을 개인의 태도와 가치관으로 환원해 온 이 사회다. 사람을 탓하기 전에, 사람을 살 수 없게 만든 구조부터 돌아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