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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에서 살아남기 에필로그

급 떠난 말레이시아 추억여행

by 봄날의 봄동이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언제 말레이시아에 다시 한번 가고 싶다고 계속 생각하고 말했더니 정말로 딱히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는데 상황이 물 흐르듯 흘러 짧은 환승여행 삼아 다녀올 기회가 생겼다. 사실 말레이시아를 떠난 후로 한 번도 다시 가보지 못한 데는 코로나라는 특수 상황과 많이 바빴던 그간의 생활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가고 싶으면서도 아직 안 가고 싶은 이상한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오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상황도 내 마음도 이제 한번 기회가 되면 다시 가볼까...라는 생각을 하는 상태가 되었지만 그러고도 당장은 말고, 지금 하는 일만 마무리 짓고, 하는 식으로 자꾸 미루고 있었는데 마치 우주가 '응 그냥 지금 가~'하듯이 상황이 그렇게 되어 정신 차려보니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오 년 만에 방문한 말레이시아는 뭐 강산이 변할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니 대체로 여전했지만 그래도 이곳저곳에서 시간이 흘렀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선 자동화된 입국심사 절차. 라떼는 거주비자를 받은 게 아니면 때로는 몇 시간씩 하염없이 줄 서서 기다리느라 다리 아파 고생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는 자동심사대에서 여권만 스캔하고 바로 들어가니 너무 편하다. 물론 MDAC이라는 사전 신고서를 온라인으로 작성해야 했지만 별 것 아니었고 서서 기다리는 수고에 비하면 그쯤이야. 물가도 확실히 전보다 오른 듯 느껴졌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버스도 내가 살던 시절엔 10링깃 정도였는데 이제는 15링깃에 공항 키오스크로 발권하니 16링깃. 그리고 식당에서도 8% 서비스 택스에 자율 책정인 서비스 차지도 10%로 채워받는 곳이 많아 팁 내는 것처럼 실제 메뉴판 가격보다 높다는 느낌을 받았다. 환승여행이라 공항 식당을 많이 이용해서 더 그렇겠지만. 그래도 말레이시아 물가는 아직은 다른 나라보다 착한 편이다.


뜨거운 햇볕과 더운 날씨는 여전했고 영어는 왜인지 예전보다 더 잘 안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ㅋ 또 식당에서의 때로는 부족한 위생 관념까지. 오랜만에 나시르막을 먹을 생각에 설렜는데 삼발소스 좀 더 달랬더니 왜 청소용 라텍스 장갑을 낀채로 행주들고 테이블 닦다가 그 장갑 그대로 엄지를 살짝 담가서 갖다 주는 거냐고...ㅠ 조금은 아쉬운 일처리와 착하고 순한 사람들과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사람을 번갈아 만날 수 있는 모습도 여전했다ㅋ


그리고 중국인 관광객이 크게 늘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어딜 가나 알리페이 결제를 쉽게 할 수 있게 된 것도 전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인데 내가 중국 쪽 생활을 하다가 와서 눈에 들어오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체감으로는 확실히 늘었다. 덩달아 나도 어딜가나 중국인 취급ㅋ 오랜만에 방문한 좋아하는 판미 식당에서는 여전히 수완 좋으신 주인 아주머니가 중국어로 말을 거셔서 내가 못 알아듣는다고 했는데도 다른 중국어를 더 거쳐서야 비로소 한국인이냐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예전에 여기서 일할 때는 점심 먹으러 오니까 한국인이냐고 물어봤었잖아요... 같은 애에요...), 슈퍼에서는 비닐봉투 살 수 있냐고 했더니 말레이식 영어로 don't have 했으면 됐지 내가 알아들었다고 오케이~ 하는데 왜 메이요우(없어요) 뒤에 붙이냐고... 나의 비한국인 취급은 어느 순간부터 자리를 잡았는지 한국 공항 면세점에 들어가도 점원분이 무슨 언어로 응대할까 나를 매의 눈으로 스캔하다가 '칸 이샤~(한번 보세요~)'하기 일쑤고, 호주에서는 점심시간에 한국 식당에 갔더니 한국인 사장님이 내 앞에 동기들한테는 차례차례 어서오세요~하다가 내 차례가 되자 현지인한테 하듯 가벼운 'hey,'로 응대하신 일 등등.. 같은 한국인도 속일 수 있다니 이 정도면 자부심마저 느낄 지경이다.



전에 라떼가 살던 곳도 방문해 보았다. 예상대로 라떼는 없었지만 그 자리에는 여전히 밥과 물그릇이 놓여져 있어 누군가가 주변 고양이들을 챙겨주고 있음을 알게 되어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라떼와 고양이들도 잠시 나를 찾았을 수는 있겠지만(아닐지도) 그래도 밥은 굶지 않고 지냈겠구나. 다행이다 생각하고 돌아서려는데 처음 보는 고양이가 눈이 왕방울 만해져 나를 보고 있다. 모르는 얼굴이라 '새로운 고양이네~ 삼색이를 닮은 것이 혹시 삼색이의 후손 중 하나이려나'(삼색이는 내가 떠날 무렵 새끼를 낳았다) 하고 사진찍고 나왔는데 나중에 가만히 사진을 살펴보니 왠지 그 아이가 삼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얼굴이 너무 변해서 도저히 예전의 그 미묘냥 삼색이라고 하기에는 다른 고양이처럼 보였다(당시 암컷 고양이 삼색이가 너무 예쁘고 수컷 고양이 라떼가 너무 귀여워서 집사들은 둘이 이어지길 바랬지만 삼색이는 어느날 알 수 없는 다른 동네 고양이의 새끼를 임신해왔고, 라떼에게는 밥주는 우리를 공격해 모두가 싫어했던 포악한 암컷 고양이가 연신 플러팅을 해대서 혹시나 라떼가 플러팅에 넘어갈까봐 모두 조마조마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세월이 무상하다ㅋ 고양이도 저렇게 변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으니 내가 느끼는 노화도 자연스러운 것이야(?) 만약 그 고양이가 삼색이었다면 라떼도 아직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못 봤지만...


잠깐이지만 다녀오고 나니 뭘 그리 미뤘나 싶고 후련하다. 정확히는 말레이시아보다 나의 무모하고 용감했던 스물여섯의 기억이 그리웠던 것 같다. 또 한번 인생의 분기점에서 주류와 조금 다르게 흘러가는 내 인생의 방향에 대한 생각과 고민, 때로는 약간의 후회 등등이 섞여있었는데 이번에 말레이시아를 다시 다녀 오니 그냥 나 참 잘 살았다 싶다. 덕분에 언제고 편하게 가서 일상에서 벗어나 쉴 수 있는 나라도 하나 생긴 셈이고. 나만의 방식으로 이십 대를 이십 대답게 보낸 것 같아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칭찬해주었다. 삼십 대를 또 삼십 대답게 내 생각대로 열심히 살아보자. 사십 대의 내가 돌아보고 또 잘살았다 셀프 쓰담쓰담해줄 수 있도록. 가장 중요한 건 내가 평가하는 내 인생이니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사는 게 아니니까. 라고 종종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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