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원을 재우고 난 뒤 휴대폰을 열었다.
SNS 피드에 생중계 영상이 떠올랐다.
화면 하단에는 실시간 댓글이 빠르게 흘러가고, “#Trump #Tylenol” 같은 해시태그가 줄줄이 달려 있었다.
좋아요 버튼 옆에는 이미 수십만이 각자의 반응을 남기고 있었다.
트럼프가 단상 위에서 기자의 질문을 받았다.
“전문가들은 타이레놀과 자폐 사이의 연관성을 인정하지 않는데요?”
그는 잠시 손짓을 멈추고 정면을 응시했다.
“그들에겐 이득이 있잖아요.”
짧고 투박한 대답이었지만, 댓글창은 곧바로 분열했다.
“역시 진실을 말하는 사람!”
“과학을 무시하는 위험한 발언!”
나는 그 시끌벅적한 글줄 속에서 이상하게도 한 가지 울림만을 붙잡았다.
수많은 보고서와 그래프보다, 이해관계를 찌르는 이 한마디가 더 진정성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날 한국 법원에서는 코로나19 백신과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판결이 나왔다.
화이자 백신을 맞고 일주일 만에 두개내출혈로 세상을 떠난 한 시민이 있었다.
질병관리청은 인과성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법원은 고개를 달리 끄덕였다.
“망인의 사망과 백신 접종 사이 인과관계가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판결문은 조용히 유족의 손을 잡아주었다.
재판부는 덧붙였다.
“코로나19 백신은 예외적 긴급 절차에 따라 승인된 만큼, 피해 발생 확률조차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의학의 불확실성을 개인이 떠안게 해서는 안 된다는, 책임의 언어였다.
트럼프의 발언과 한국 법원의 판결은 서로 다른 장면에서 나왔지만, 본질은 닮아 있었다.
과학적 확실성이 부재한 상태에서, ‘가능성’만을 근거로 사회적 결론을 내렸다는 점이다.
의심은 칼날을 세웠고, 무게는 상처로 남았다.
다른 길을 걸었지만, 결국 같은 몸 위에 새겨졌다.
누가 불확실성을 건널 것인가.
그 짐을 개인이 질 것인가, 사회가 나눌 것인가.
나는 결국 코로나 백신을 맞지 않았다.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택한 것은 안전이 아니라 자유였다.
비합리적으로 보일지라도, 다수의 행복이라는 미명 아래 묻히는 것보다는 내 선택을 지키고 싶었다.
그 선택은 때로 나를 외롭게 만들었지만,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공리주의는 효율적 일지 몰라도, 효율만으로 인간을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
오늘은 안전하다 여겼던 것이 내일은 위험으로 판명된다.
오늘은 인과가 없다고 했던 것이 내일은 책임으로 뒤집힌다.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었듯, 스트레스가 위궤양의 원인이라 믿던 시절이 세균 발견으로 무너졌듯, 진실은 늘 잠정적일 뿐이다.
우리가 붙잡는 ‘과학적 사실’도, ‘법적 판결’도, ‘도덕적 확신’조차도 잠정적일 뿐이다.
잠시 의지할 수 있을 뿐, 영원히 고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더욱 의심은 필요하고, 책임은 무겁다.
아이의 잠은 깊었고, 방 안은 적막했다.
창밖의 하늘은 검게 드리워졌고, 바람은 서늘하게 스며들었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자유와 책임이라는 가치마저 지워버려도 되는가?
그리고 우리가 진실이라 믿는 것마저, 언젠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진실은 무너지고, 우리에게는 질문의 벽만이 서 있다.